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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두온, <러브 몬스터>

by Jaime Chung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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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두온, <러브 몬스터>

 

 

미쳤다. 비루한 언어를 가진 내가 서수진 작가의 <코리안 티처>를 읽고 ‘개쩐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듯이, 이 책을 읽고서는 ‘미쳤다’라는 말만을 중얼거렸다. 진짜 대미쳤다. 이걸 굳이 설명하자면, 일단 한 단어로는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밑도 끝도 없이 사랑이라니 뭐야?’ 하실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단어를 더 골라서 설명하자면, ‘도파민’을 고르겠다. 이 책은 도파민 분출이 끝이 없다. 솔직히 저는 여러분이 이 책 리뷰를 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민음사TV의 김민경 편집자(김민경 편집자의 수영 이야기는 대략 15분 25초부터이고, 본격적인 책 이야기는 약 19분 45초부터 시작)가 이 책 추천하는 부분만 보셔도 좋으니 제발 이 책 좀 읽어 주세요.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이두온 작가는 이 책을 구상하게 된 계기를 (책 끝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습니다. 어느 날,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수영장 샤워실에서 샴푸로 두피를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그년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중년 여성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순간 머리 감기를 멈추고 비누 거품이 얹힌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걸로 끝이었어요. 하지만 귓가에 얹힌 목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찢어 죽이고 싶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이미 그 일을 당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거든요.

아니, 이걸 어떻게 참아요? 동네 수영장에서 ‘그년을 찢어 죽이고 싶다’ 이런 말을 듣는데 속사정이 궁금하지 않다고요? 저자는 ‘그래, 누군가는 누군가를 찢어 죽이고 싶어 하지’라고 생각하며 수영장에 다니고, 누군가를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하, 진짜 벌써부터 도파민이 싹 돈다…

 

400쪽에 가까운(종이책 기준 376쪽) 이 책은 말하자면 아침 드라마 같다. 상황이 막장이다 싶으면 그걸 뒤엎는, 더 큰 막장이 일어난다. 초반의 이야기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엄지민은 염선숙(후에 ‘염보라’로 개명, 앞으로는 ‘염보라’로 부르겠음)의 딸로, 어느 날 엄마가 사라져서 엄마를 찾으러 엄마네 집에 갔다가 (엄마 앞으로 온 우편물을 뒤져서) 엄마가 혈액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민은 엄마가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 다녔던 동네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한다. 엄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한마디라도 들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영장, 뭔가 수상하다. 남자 수영 강사 조우경은 불륜을 하는 건지, 일부러 수강생인 아줌마들에게 ‘여지’를 주듯 새롱거린다. 허인회라는 아줌마는 그 수영 강사에게 푹 빠져서 수강생들에게 ‘떡값’을 걷으러 다닌다. 그런데 지민은 허인회가 초면이 아니다. 지민의 엄마, 염보라가 불륜을 하던 남자 오진홍이 허인회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인회는 8년 전, 엄지민이 아직 어렸을 때 엄지민을 죽이려 한 적이 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직접 읽어서 확인하시길. 줄거리 요약만 들어도 도파민이 싹 돌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소설의 최고 강점이자 매력은 그거다. 불륜, 치정, 복수 등등 온갖 ‘막장 드라마’스러운 소재들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그게 단순히 ‘하하 도파민 쩌는 소설을 써야지!’ 하고 냅다 뽕빨물(저렴한 표현 죄송…)을 쓴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소재를, ‘사랑’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의 결과로서 적당히 잘 버무려 썼다는 것. 제목에도 있듯이 ‘사랑’은 단연코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인데 사랑이 가진 힘, 필사적인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게 만드는 힘, 사랑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믿음 등등이 이 소설에 가득하다. 예컨대 책 초반에 엄지민은 수영장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

복지회관은 불분명한 뜨내기를 만나느니 높은 경쟁률과 검열을 뚫고 수영장에 온 이성을 만나라고 홍보했다. 결혼이 하고 싶으면 수영복을 사서 수영장 회원등록 광클릭에 참여하라는 말도 있었다. 미혼반은 몸을 만들러 가는 곳이 아니라 만든 후 가야 하는 곳이라는 조언도 돌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어쩌면 전염되고 옮아 붙는 건지도 모른다. 미혼반 타임이 아닌데도 남녀가 저렇듯 곳곳에서 어흥대고 있지 않은가. 지민은 사랑이니 결혼이니 다 개같은 짓거리라고 생각하며 거칠게 물살을 갈랐다. 그러다 엄마라면 성호르몬을 풀어놓은 이런 정글 같은 곳을 싫어할 리 없다고 냉소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이니 결혼이니 다 개같은 짓거리”라니, 이런 대담한 표현을! 근데 공감합니다.

 

반면에 허인회는 웨딩숍에서 헬퍼로 일해 왔다. 어느 날 허인회는 자신이 맡은 신부 측의 신랑이 커플매니저와 바람이 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신부는 촬영이 끝나고 ‘헬퍼가 일을 엉망으로 해서 피해가 막심하다’며 웨딩숍에 항의를 한다. 허인회는 자신의 업무 능력에 트집을 잡혔다는 사실보다, 신성한 사랑을 우롱하는 것 같은 신부와 신랑에게 더욱더 분노한다.

그녀는 숍으로 가 예비부부의 연미복과 드레스를 자신의 차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목적지도 없이 마구 달렸다. 몇시간 후 CCTV를 확인한 원장이 전화에 불이 나도록 연락을 해왔다. 전화를 받을 마음도 없었지만, 받는다 하더라도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은 때였다. 허인회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워둔 채 통감자를 사 먹었다. 결혼식이 파기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이루어질 예식과 결혼생활은 신부와 신랑이 계획했던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허인회는 이십오년을 그 바닥에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신랑이나 신부를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자신을 모략하는 말을 들은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허인회는 그 결혼식을 망쳤다. 염보라의 연락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다만 신부와 신랑이 내내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던가. 서로를 기만하면서 그렇게 꼭 잡고 있지 않았나. 그들은 결혼할 자격이 없었다. 사랑이 그런 것일 리 없다.

허인회는 자신의 남편 오진홍과 염보라의 ‘사랑’을 이렇게 생각한다.

남편의 외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남편이 총각 시절 사무치게 좋아했으나 그를 거절했던 여자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맺은 관계였다. 남편과 여자 사이에는 열렬하고 아득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허인회를 고통에 빠뜨렸다. 남편은 열병에 빠져 허인회와 쌓은 시간과 정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인회는 남편의 사랑을 지켜보았다. 그가 새벽에 혼자 끄적이는 일기, 사랑을 속삭이던 문자, 새로 산 듯한 속옷, 늘어가는 옷가지, 그러다 자포자기하듯 허인회에게 시험관을 시도하자고 제안하던 아침의 흐릿한 빛, 형편없이 비어가던 남편의 통장 잔고, 새벽 화장실에서 상대 여자에게 울며 매달리던 남편의 회백색 목소리, 임신했다는 허인회의 말에 낙담하던 얼굴, 임신이 아니었다는 인회의 말에 신이 나 까딱이던 발가락, 염보라에게 가기 위해 달려나가던 뒷모습, 허인회는 그 모든 것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인회를 괴롭힌 것은 남편의 외도가 아니라, 남편이 하고 있는 사랑이었다. 누가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그것을 지켜보는 동안 허인회는 자신을 죽일 뻔하기도 하고, 타인을 죽일 뻔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황은 돌변했다. 상대편 여자가 암에 걸렸다. 남편의 외도는 끝이 났다. 왜? 그들의 관계가 비로소 끝이 났음에도 인회의 고통은 새롭게 시작된 듯 부풀어올랐다. 꺼질 줄을 몰랐다. 왜? 이상한 말이지만 인회는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느꼈다. 사정없이 당하고 말았다고, 그들이 쳐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인회는 TV를 끄며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훔쳤다. 그리고 닫혀 있는 서재 문을 노려보았다. 벌레 같은 자식이 저 안에 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더 말은 못하지만 읽다 보면 정말 기가 막힌 전개가 계속된다. 엄청 다양한 ‘사랑’의 모습과 정의가 나오는데 이게 제일 머리가 띵할 정도로 공감이 되어서 보여 드리고 싶다. 소설 후반에 나오는 부분이지만 스포일러가 될 만한 구석은 없어서 괜찮을 듯하다.

다시 묻는다. 사랑이 대체 뭐지?

착각인가. 학대받은 자가 학대받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 마법인가. 착취를 감추는 거짓된 이름인가. 헛된 망상을 부추기는 사기인가. 아니다. 처음에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랑은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인회의 삶에 주어지지 않았고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보여서 더 집착하게 되는 절실하고도 멀리 있는 것이었다. 인회는 사랑이라는 말에 자신이 품었던 소망들을 넣었다. 그러니까 좀더 안전해지고 싶은 욕구라든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갈망, 따뜻함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내밀한 기대, 사회 체제 안으로 무사히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 아름다운 것들을 소유하고 싶은 그런 바람들을 넣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그것들을 쭉쭉 흡수하며 자랐다. 그것은 분류되지 않은 쓰레기를 삼키는 쓰레기차 같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플라스틱을, 낡고 닳아빠진 아이의 칫솔을, 사연 많은 코 푼 휴지를, 새것인데 버려진 신발을, 손가락이 하나 없는 고무장갑을, 그 자리에서 우연히 알을 까고 있던 개미를, 세탁소에 보내지려다 버려진 가죽옷을, 그러니까 무언가가 되고자 몸부림쳤으나 되지 못한 채 버려진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분쇄해서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로 만들어버리는 쓰레기차 같다. 두려움과 수치심과 분노와 슬픔과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싶었던 어떤 바람들이, 무언가가 되고자 했던 소망이 사랑이라는 말에 전부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쓰레기 산, 모든 것을 담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말아 주는 막장 드라마 뺨치는 소설, 너무 끌리지 않습니까? 2025년은 이제 한 달밖에 안 지났지만 올해 말에 2025년을 돌아본다면 단연코 이 책을 기억할 것이다. 그만큼 임팩트 있고 대단한 소설이다. 단연코 추천한다. 이게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를 때려넣어 만든 ‘막장물’이 아니라 진짜 사랑에 대해 깊게 사유한 결과물임을 알게 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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