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사일런트 페이션트>
심리 스릴러 소설. 사진가 가브리엘과 화가 앨리샤는 부부이다. 어느 날, 앨리샤가 남편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앨리샤는 교도소 대신에 정신 질환 범죄자 수감소로 보내진다. 앨리샤가 그 사건 이후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앨리샤는 수감소로 보내지기 전 단 한 폭의 그림을 남겼는데 제목은 ‘알케스티스’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심리 상담가 테오는 심리 상담을 통해 앨리샤에게 그날의 진실에 대해 털어놓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앨리샤의 치료에 자원하는데…
‘전 세계 42개국 판권 계약’, ‘브래드 피트 제작사 영화 계약’이라는 홍보 문구가 띠지에 있는데 아직까지 영화 소식이 없는 게 신기하다(참고로 이 책은 국내에 2019년 5월에 출간됐다). 영화가 엎어졌나… 그런데 소재며 줄거리며, 영화화하기에 딱이라는 느낌이 들긴 한다. 저자도 영문학을 전공하고 시나리오로 석사 학위를 받은 데다, 시나리오 작가 생활도 했었다고 한다.
심리 스릴러들이 흔히 그렇듯이, 누가 범인인지, 반전이 무엇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이자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심장이 쫄깃하다는 느낌은, 소설 극후반에 가서 반전이 드러나고 나서야 느꼈다. 그 전까지는 ‘와 책 짱 길다, 이거 빨리 끝내야지’라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나를 그렇게 만든 건, 묘하게 느껴지는 ‘남미새’ 순간들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가 100% 남자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 앨리샤의 일기에 쓰인 내용이다.
맥스가 가브리엘과 형제라니 믿기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갖고 있는 고귀한 성품이나 품위, 친절함을 그에게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맥스는 구역질이 나는 존재였고,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앨리샤, 가브리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맥스가 말했다. “진짜야. 경고하는 거야.”
나는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혀에서 그의 피 맛이 느껴졌고 그래서 수돗물을 틀고 냄새가 사라질 때까지 입 안을 헹구었다. 그러고 나서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아내가 남편의 형, 그러니까 자기 아주버님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후의 상황인데, 물론 자기를 성희롱한 사람에게 역겹다고 생각할 수 있지. 근데 자기 남편을 ‘고귀한 성품이나 품위, 친절함’ 같은 단어로 거의 신격화하듯 표현하는 여자가 있나? 남편을 사랑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뭔가 남자를 너무 떠받드는 것처럼 그려지는 게 불편하다는 거다(요즘 들어 이런 남자를 찾기 힘든 분위기인 것도 이런 감상에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편 가브리엘이 아이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앨리샤는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좋다고 대답한다. 아 예… 그렇군요… 뭐,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여자도 있겠지. 하지만 다음 인용문까지 보시고 모든 걸 종합해서 생각해 주시길.
집에 돌아오니 가브리엘은 잠들어 있었다. 그이는 새벽 5시에 촬영하러 가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이를 깨웠고, 우리는 섹스를 했다. 그이에게 충분히 가까이 갈 수도, 내 속 깊숙이 그이를 느낄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이와 결합하고 싶었다. 그의 내면으로 기어 들어가 사라지고 싶었다.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워서 섹스하는 데에서 기겁… 자던 남편을 깨워서 하는 여자나, 자나 깼는데 하는 남자나… 참 거기서 거기다… 근데 앨리샤는 그냥 남미새도 아니고 철저히 남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남미새다. ‘나는 그이와 결합하고 싶었다. 그의 내면으로 기어 들어가 사라지고 싶었다.’ 어떤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하죠? 그냥 작가 본인이 이런 여자를 바라는 게 아닐지…
물론 작품만 두고 봤을 때 잘 쓰인 장치들도 있다. 예를 들어서 반전을 독자들이 예상치도 못하게끔, 일부러 앨리샤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도록 은근히 떡밥을 여기저기 놓아둔 것. 앨리샤뿐 아니라 화자 테오의 아내인 캐시도 본인 입으로 ‘난 미쳤어’라든가 ‘내가 돌았지’,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또한 테오가 캐시의 부정(不貞)으로 인해 집착과 광기에 물들어가는 과정도 일종의 힌트로 제공한다. 애초에 테오는 왜 앨리샤의 사건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고 앨리샤의 치료에 자원했을까? 반전을 알고 나면 다 이해가 된다. 잘 쓴 소설이, 잘 놓인 복선이 그러하듯이.
앨리샤가 남긴 그림의 제목이 ‘알케스티스’인 것도 의미심장한데, 이 사건(앨리샤가 가브리엘을 살해한 일)의 진실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알케스티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주지는 못했다. 알케스티스는 고대 희랍 신화 속, 글자 그대로 남편을 위해 죽은 아내이다. 아폴론 신이 아드메토스, 그러니까 알케스티스의 남편을 대신해 죽을 사람이 있다면 아드메토스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심지어 그의 부모조차 아들 대신 죽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게 알케스티스다(나중에 남편을 대신해 저승에 간 알케스티스를 헤라클레스가 구해서 데려오긴 한다). 근데 이 소재를 현대에 써먹을 거면 최소한 부모의 강요라든지 주위에서 손가락질하는 분위기 등 사회적인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는 현대적 해석을 곁들여 알케스티스를 좀 인간답게 그려야 하는 게 아닐지(나탈리 헤인스의 <천 척의 배>처럼, 고전을 현대적이고 새롭게 해석하며 여성주의적으로 보려는 노력들이 있다는 걸 저자가 몰랐던 걸까,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걸까?). 이 소설에서는 그런 거 없고 앨리샤처럼 그냥 남미새로 묘사된다.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다 읽고 나면 분명히 이런 타입의 추리 소설을 최소한 한 편 이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쁘진 않았지만 이걸 위해 416쪽(종이책 기준)이나 읽고 싶진 않았달까… 한 300쪽 이내면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했을 텐데. 영화면 2시간 남짓 낭비하면 끝인데 이건 너무 길어서 시도하기조차 어려우니, 이 책을 읽고 싶지는 않지만 반전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에 댓글 달아 주시면 제가 짧게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이 저자의 최신작 <메이든스>도 고대 희랍 신화에서 소재를 차용해 쓴 것 같던데, 이미 나는 이 책 하나로 이 저자는 다 파악했다는 느낌이라 굳이 읽지는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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