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디스 워튼, <징구>
<순수의 시대>로 가장 유명한 이디스 워튼의 단편소설 모음집. 표제작인 <징구>, <로마의 열병>, <다른 두 사람>, 그리고 <에이프릴 샤워>까지 딱 네 편이 들어 있다. 네 편 모두 끝부분에 반전이 있다(반전의 크기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반전의 크기로 치면 <징구>, <로마의 열병>, <에이프릴 샤워>, 그리고 <다른 두 사람> 이 정도인 듯.
<징구>는 특히 반전이 중요해서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겠다. 교호양이 있다는 부인들이 모인 ‘런치 클럽’에 당대의 유명 작가인 오즈릭 데인이 초대를 받는다. 이 작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고 부인들은 수선을 떤다. 개중에 런치 클럽 회원들에게서 별로 (교호양을) 인정받지 못하는 로비 부인만이 자기는 그의 작품을 못 읽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다른 부인들은 데인 앞에서 어떤 주제로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주저하고 있는데, 로비 부인이 ‘징구’라는 말을 꺼낸다. 데인과 부인들은 이에 모두 당황하며 맞장구를 치기 시작하는데, 사실 그들 중 누구도 ‘징구’가 뭔지 모른다… 징구는 도대체 뭘까? (힌트)
<로마의 열병>은 25년간 친구였던 두 부인, 앤슬리 부인과 슬레이드 부인의 2인극이라 할 수 있다. 두 부인이 한 로마의 레스토랑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앨리다 와 그레이스 중 결국 델핀 슬레이드와 결혼해 ‘슬레이드 부인’이 된 것은 앨리다이지만, 사실 그레이스가 슬레이드 부인이 될 수도 있었다…? 25년간 쌓아온 우정이 고작 남자 하나로 무너지나, 진짜 이런 게 우정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드는 반전이 있는 이야기.
<다른 두 사람>에 라이트 노벨풍 제목을 지어 보자면, ‘내가 내 아내의 전남편과 전전남편과 친구가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이게 뭐냐고 하실 분들을 위한 패러디 원본) 이 정도로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웨이손은 앨리스라는 여자와 결혼해 릴리라는 딸이 있다. 웨이손은 앨리스의 전남편 해스켓, 그리고 전전남편 배릭과 마주치게 된다. 일단 해스켓은 릴리의 아버지기도 하니까 양육 문제로 얼굴을 안 볼 수도 없다. 전전남편인 배릭도 업무상의 관계 때문에라도 모른 척하고 지낼 수가 없다. 처음엔 질투도 하고 불안해하지만 결국 내 아내의 과거에 익숙해지는 웨이손. 뭐, 상대를 사랑하면 과거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당연한 결말.
마지막 <에이프릴 샤워>에서 작가 지망생인 테오도라는 자신의 소설 ‘에이프릴 샤워’를 출판사 ‘홈서클’에 판다. 이 글을 쓴다고 엄마 아침밥 올려 보내는 것도, 동생들 돌보고 밀린 수선을 하는 등등 집안일을 까먹고 잘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소설이 팔리다니 테오도라는 너무 기쁘다. 그런데 책이 나오는 날, 서점 앞에서 기다려서 책을 사서 집에 부리나케 달려와 책을 폈더니 이 무슨 일인가. 제목은 자기 소설과 같은 ‘에이프릴 샤워’인데 내용물은 자기가 쓴 글이 아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종이책 기준 160쪽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라 마음만 먹으면 앉은자리에서 다 끝낼 수도 있는 분량이다. 번역이 솔직히 최상은 아니지만 아주 쓰레기도 아니다. 얼마 전에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 텍스트를 가져다가 AI에게 번역시킨 걸 책이라고 낸 꼬라지를 본 이후, 이제는 적어도 인간이 그럭저럭 괜찮게 번역했으면 그저 감사하기로 했다. 정 퀄리티가 아쉬우면 도서관이나 이미 구독 중인 플랫폼을 통해서 읽으시는 게 좋겠다. 나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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