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오혜민, <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
알라딘에서 이 책을 보고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밀리의 서재에 떴길래 바로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6년간 페미니즘을 가르쳤다. 필수 교과목인 ‘예술가의 젠더 연습’이라는 교과명으로.
이 책은 그가 “6년간 강의실에서 혹은 과제물을 통해 자주 받은 질문을 엄선해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담아낸 것”이다.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각색을 거쳤다고 하는데, 사실 너무나 자주 받은 질문들이라 ‘혹시 나인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 자주 받은 질문들이 각 장의 소제목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 나도 ‘무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괜히 여자들에게 CPR 했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거 아닌가요?”, “성평등을 얘기하면서 군대 얘기는 왜 안 하나요?” 참으로 주옥 (🤬) 같은 질문들이다.
저자는 1장 첫 꼭지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페미니스트인 것’을 너무 티 내지 말라고 조언하는 지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업 첫 시간부터 페미니스트임을 밝힙니다. ‘젠더’ 수업을 하는 제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니까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곤 합니다. “‘여러분은 타인을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가요?” 어지간한 사람들은 “아니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차별을 끝내자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뭐가 문제죠?”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페미니즘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페미’, ‘페미’ 하면서 욕하는 것들이 한 다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저자는 “페미니즘을 세뇌하는 학교 선생님들이 있습니다!”라는 헛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받아칠 정도로 센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혹시 제가 모르는 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의 조직이 정말 존재한다면, 저에게도 소개해 주세요. 얼른 들어가고 싶네요. 서로 자료를 나누고 지지하고 응원할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곳을 언제나 찾아 헤매고 있으니까요. 저도 가끔은 고심하고 실패하고 설득하고 포기하며 괴로워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그냥 간단히 세뇌할 수 있는 곳에 있다면, 인생이 조금은 쉽게 느껴질 것 같고요. 그러니 그런 놀라운 비법을 터득한 모임이 있다면 혼자만 알지 마시고 꼭 알려 주세요.
페미니즘은 ‘○○병’(○○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문맥상 ‘정신병’)이라고 하는 멍청이들에게 저자가 해 줄 말은 딱 하나뿐. “모든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수준 이하라 대꾸조차 할 가치가 없다는 거다. 크, 멋져.
개인적으로 가장 유용하다고 느꼈던 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 할당제, 여자대학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 아닌가요?”라는 멍청한 질문에 저자가 정성스럽게 대답해 준 꼭지다. 애초에 남자들이 여자들을 차별하지 않았다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 할당제, 여자대학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이 운전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성 운전자가 아이와 함께 차에서 짐을 편하게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양육을 여성이 거의 책임지는 현실이 반영된 조치이죠. 두 번째는 주차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성을 겨냥한 폭력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주차장은 대체로 으슥하고 어둡죠. 자동차는 밀폐된 공간이고요. 매년 몇만 건의 범죄가 주차장에서 일어납니다. 범죄 상당수가 성범죄이고요. 이런 배경 때문에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거나 CCTV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피해 여성 전용 주차장을 만들어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차별로 공격받는 여성 전용 주차장은 여성들이 양육을 주로 책임지지 않거나,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필요 없는 정책입니다. 차별을 인지하는 그 민감성이 이제 그 방향으로도 발휘되길 바랍니다.
여성 할당제는 남성을 구제하는 도구로 활용될 때가 더 많다. 공무원 공채 시험에는 여성을 일정 비율 이상 채용하도록 강제하는 ‘할당제’가 있는데, 여성 합격자가 많은 경우 이를 적용해 오히려 수를 줄인다고 한다. 일례로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해 최종 합격자 전원이 여성인 사례가 있었는데, “모두 여성으로 뽑을 수 없다”면서 남성을 추가로 합격시켰다. 여성학 연구자인 저자의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학 전공자는 아무래도 여성이 많은데 ‘객관성’을 확보하겠다, ‘균형’을 맞추겠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자리를 일정 부분 배당했다고. 선발 단계부터 아주 적극적으로 여성 지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도 있다.
동덕여대를 뜬금없이 남녀공학으로 전환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 특히 이게 역차별 아니냐 하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 놈들이 많았다. 남자들은 왜 자꾸 여자들만의 공간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남자들만 있는 곳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여자들이 자기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여자들끼리 꽁냥꽁냥 잘 지내는 게 자기 존재에 대한 개무시이자 공격이 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모든 교육 공간이 평등했다면, 여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여자대학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극소수의 여성들만 고등 교육을 받았던 과거에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의 대학 진학률을 넘어선 지금도 여자대학교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 누적된 교육 공간 안의 불평등이 일상에서도 여전히 발견되고 있으니까요. 여자대학교는 평등한 교육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그곳에서 어떤 지식이 쌓일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구현하는 장소입니다. 모든 대학교가 여대만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세상, 여성들의 지식에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아마 역차별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자마자 발도 못 붙이고 사라졌을 거예요. 여기까지 읽고도 딱히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차별에 관해 고민할 필요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저는 다른 주제보다 역차별을 설명하는 데 더 길게 썼습니다. 책값을 더 받지는 않을게요. 똔똔으로 쳐 드리죠. 그 대신 이제 어디 가서 역차별이란 단어는 꺼내지 않는 걸로 해요.
그리고 “나는 그런 나쁜 남자 아니라고요,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마세요!”라는 기가 막힌 개소리에 대한 저자의 반박이 진짜 멋지다.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않습니다.”와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봅니다.”라는 발언이 한 쌍씩 교차되어 나오는 긴 목록이 있는데, 첫 두 쌍은 이렇다.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단톡방에서 여성 동창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있을 때 당신은 침묵한 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고, 품평도 종료되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봅니다. 친구들이 단톡방에서 여성 동창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있을 때 당신은 침묵한 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 또다시 단톡방에서 다른 여성의 외모를 품평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지 않습니다. 늦은 밤 귀가하다, 앞서가던 여성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걸 본 당신은 혹여나 여성이 두려워할까 봐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덕분에 긴장했던 여성은 다소 안도하며 무사히 귀가했지요.
나는 당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봅니다. 늦은 밤 귀가하다, 앞서가던 여성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걸 본 당신은 여성이 두려워하는 모습에 불쾌해했고, 그 불쾌감을 드러내려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 탓에 긴장했던 여성의 심장 박동은 몹시 빠르게 뛰었을 것입니다.
이게 진짜 명문인데 다 보여 드릴 수가 없어서 아쉽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서든, 도서관에서 빌려 보든, 개인적으로 구입을 하든, 아니면 서점에서 잠시 시간을 내서 흘끗 안을 살펴보든, 이 부분만큼은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이 하수상하여 이런 거지같은 질문을 마주쳐야 할지라도, 그래서 이들에게 2만 번이나 같은 말을 해서 이해하게 만들어 줘야 할지라도, 우리는 절대 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아도 다들 알 때까지. 그때까지 우리는 지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이 책을 강력 추천한다.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어 공부] incapacitate((질병 등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다) (0) | 2025.04.02 |
---|---|
[월말 결산] 2025년 3월에 읽은 책들 (1) | 2025.03.31 |
[책 감상/책 추천] 돌리 앨더튼,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 (2) | 2025.03.28 |
[책 감상/책 추천] 정대건, <GV 빌런 고태경> (1) | 2025.03.26 |
[책 감상/책 추천] 패멀라 폴,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2) | 2025.03.21 |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냅, <욕구들> (1) | 2025.03.19 |
[책 감상/책 추천] 이디스 워튼, <징구> (1) | 2025.03.17 |
[책 감상/책 추천] 문지혁, <중급 한국어> (2) | 2025.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