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정해연, <홍학의 자리>
⚠️ 아래 후기는 정해연의 소설 <홍학의 자리>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미 독서 커뮤니티에서 한 차례 불고 지나간 바람인 듯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제서야 <홍학의 자리>를 다 읽었다. 읽고 나니 이제 스포일러를 피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더 강하게 느껴진 것은 불쾌함이었다. 이제 웬만한 분들은 다 읽으셨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내 감상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쓰기 위해, 이번에는 스포일러 주의를 달고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 소설은 단연코 반전이 중요하다. 채다현이라는 학생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관된 담임 교사 김준후와 이를 수사하는 강치수 형사, 이 셋을 (일단 초반에는) 메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강치수 형사가 사건을 파헤치고 보니 사건은 무척 복잡했음이 드러나는데… 오늘 이 리뷰에서는 책 줄거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이미 독자가 다 안다는 전제 하에 솔직하게 내 감상만 쓰겠다.
솔직히 처음에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눈살이 찌푸려졌다. 소설은 대놓고 프롤로그에서부터 다현과 준후가 성관계를 가지는 사이임을 암시한다. 심지어 “다현은 준후가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미 마흔다섯이 된 그는 열여덟의 다현을 포기해야 했다.”라고 대놓고 나이까지 밝히면서도 그런다. 45세와 18세가 성관계요? 미치셨나. 게다가 준후는 별거 중인 아내와 세 살짜리 아이까지 있는 고등학교 교사다. 다현은 그 학생이고. 처음에는 다현이가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이런 놈이 어떻게 애한테 ‘교성’을 지르게 만든다는 거지,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놈이 참 파트너의 성적 만족에도 신경 써 주겠다, 하고 얼탱이가 없었는데, 나중에 다현이 사실 남자애라는 게 밝혀진 후에도 분노는 딱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피해자가 소녀든 소년이든, 미성년자가 의제 강간을 당했는데 괜찮을 리가. 반전을 알게 되기 전부터 “아니 근데 작가는 미성년자가 (성인과) 관계를 하는데 교성을 질렀다느니 어쨌느니 하는 표현을 쓴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아청법에 안 걸리는 겁니까?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미성년자를 상대로 굳이 이렇게까지 낯뜨거운 표현을 쓸 필요가 있어?
그리고 도대체가, 다현이 성별이 (많은 독자들이 믿도록 호도된 것처럼)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게 도대체 뭐가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모르겠다. 미성년자는 보호받아야 하는 거잖아. 게다가 그 반전이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주지? 무의식적으로 차별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뭘? 이 반전은 그 유명한 의사-아들 이야기보다 의미가 없다. 병원에 온 한 남자아이 환자를 본 의사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에요!”라고 외치고 아이는 “이 의사는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라고 외쳤는데 결과적으로 둘 다 옳았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의사가 여자 의사였고, 아이의 엄마였다는 반전. 이 이야기는 ‘의사처럼 권위를 가진 인물은 대개 남자다’라는 우리의 무의식적 편견을 끄집어내 보여 준다. 반면에 이 소설 속 다현의 성별의 진실이 밝혀지는 반전은? 아무것도 가리키는 게 없다. 그냥 독자들을 가지고 논 것에 불과하다. 이름이나 ‘학생’, ‘그 애(걔)’ 등등 다양한 지시 대명사를 사용해서 지시되는 인물의 성별을 가릴 수 있는 (또는 굳이 특정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어로만 가능한 ‘트릭’이다. 이걸 당장 영어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he와 she를 밝혀서 써야 하는데. 굳이 they를 쓸 수도 있지만 그러면 ‘얘가 혹시 성 소수자일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한국어로 하는 것보다 긴장감이 덜하겠지. 일본어와 태국어, 베트남어로는 조심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중국어나 (앞서 말했듯)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아랍어처럼 문법적 성이 있거나 명사/형용사가 성에 따라 굴절하는 경우에는 어려울 것이고, 헝가리어와 핀란드어처럼 성별 표지가 없는 언어는 트릭이 가능할 것 같다(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챗GPT에 성 표지가 있는 언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 트릭 가능성을 한번 살펴봐 달라고 부탁해서 얻은 결과다). 이게 먹히지 않는 언어는 그럼 도대체 어떡할 것인가. 아니, 내가 애초에 말했듯이 이 반전을 알게 되고 나서도 딱히 얻게 되는 깨달음 같은 게 없다니까? 다현이가 남자애여서 사건이 더 나빠지지도, 괜찮아지지도 않는다. 여전히 준후는 미성년자를 꾀어서 의제 강간을 한 천하의 개새끼다.
또한 ‘작가 후기’에 이 소설의 주제는 ‘인정 욕구’라고 밝혔다.
이번의 경고는 인정욕구였다.
김준후는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시선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면에는 반대의 욕구가 있다. 그것을 채다현을 통해 해소해온 이기적인 사람이다. 채다현이, 그 마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채다현은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한다.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김준후의 아내 권영주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불사한다. 그 순간 채다현은 모든 도덕관념을 잃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권영주 역시 김준후의 “날 이해해주는 건 당신뿐이야”라는 말에 안심을 해버렸다. 자신을 배신한 김준후에게 변호사를 붙인 것을 보면, 어쩌면 아직까지 그녀는 그 말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음, 근데 나는 읽으면서 그런 것은 전혀 못 느꼈다. 김준후가 다른 사람에게 비난의 시선을 받는 걸 견디지 못한다고?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특히 아내 권영주를 대하는 걸 보면. 게다가 채다현은 끊임없이 확인받으려 한다고 하는데, 여보세요 작가님, 얘는 이제 열여덟 살이에요. 청소년이 그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럼 청소년기에 이미 통달해서 뭐 심리학 박사 내지는 도사 같아야 한다는 거야, 뭐야? 권영주는 그냥 단순한 남미새일 뿐이고요. 단편적으로 갖다 붙이면 그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독자로서 그게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는 느낌은 전혀 못 받았다.
애초에, ‘작가 후기’에 이 주제에 대한 말이 나오기 전, ‘스릴러는 경고’라는 부분부터 좀 의아하긴 했다.
“스릴러는 경고입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했던 대답이다. 스릴러가 나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진심이었다. 스릴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경고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겪은 어린 시절의 행복이 그 사람을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지보다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이 사회를 파괴하는 끔찍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고 경고하는 것이 스릴러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글쎄, 불행한 어린 시절도 그 ‘불행한 어린 시절‘ 나름 아닐까? 범죄를 부모로 두었다거나, 어릴 적에 엄청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게 용납되거나 용서되는 것도 아니다. ‘악인에게 서사를 주지 말라’는 말이 딱 이걸 뜻하지 않나. 악인이 왜 이런 존재가 되었는지 굳이 우리가 궁금해해야 할까요? 어릴 적에 예컨대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있다면 이 사회가, 주위 어른들이(경찰이나 교사 등 주위의 관련된 인물들이) 지켜 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게 맞는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범죄를 저질렀을 때, ‘알고 보니 이러이러한 끔찍한 과거가 있었네요! 아이 불쌍해라!’ 이러면서 감형이라도 해 줄 건가? 범죄를 저지른 시점에서 이미 과거가 어쩌고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는데? 애초에 ‘스릴러’ 작가에게 어떤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스티븐 킹도 그런 말은 안 할 것 같은데… 그냥 뭉뚱그려 ‘작가’라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보여 주는 게 그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스릴러 작가라고 딱히 그 장르만 콕 집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소재를 잘 가려서 쓰는 데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서 담임 교사와 불륜을 하는 미성년자를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근데 이건 스릴러 작가뿐 아니라 작가들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이다.
나는 이게 너무 신경 쓰여서 민음사TV에서 찰스엔터가 언급한 그 반전, 그러니까 다현의 사인은 익사였다는 반전 정도는 사실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사실 그냥 처음부터 내내 ‘나는 작가가 미성년자 등장인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글을 쓴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던 것 같아’ 상태였다. 도파민 뿜뿜 하는 소설인 것도 맞고, 거의 모든 장면이 영화를 보듯 장면이 쫙 그려질 정도로 술술 읽히는 책인 것도 맞는다. 하지만 이 재능을 너무 낭비했다는 느낌. ‘스릴러’ 작가로서 어떤 양심이랄지, 기본적인 선을 지키지 못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다현이 남자애였다는 반전은 정말 의미없는 ‘트릭’에 불과하다. 아무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 말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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