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마이클 이스터, <가짜 결핍>
풍족한 시대에 왜 현대인은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켜 오는 동안 뇌는 여전히 결핍에 집중하도록 프로그램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우리는 왜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지 답을 찾아낸다.
내가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몇 군데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짚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흔히 옛날을 떠올릴 때, 그러니까 산업이 덜 발전했을 시절에 인간은 적게 가진 상태로 안분지족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환상이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가능한 한 많이 가지려 했다.
물론 과거 인류가 오늘날 우리만큼 소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언젠가 소유욕이 없는 인간이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건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다. 《소비자행동Consumer Behavior》이라는 책에서는 말한다. “모든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물질주의적이다. 자연스레 인간은 자기 문화 내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물질적 자원을 더 많이 가지기를 갈망한다.” 인류 조상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필요한 만큼만 취하며 살았다는 디즈니 만화 같은 순진한 생각과 달리 실상은 정반대였다. 자연은 타란티노 감독 영화처럼 잔혹한 세계에 가까웠다. 생존하려면 인간도 종종 잔인해야 했다. 너무 적게 갖는 것보다는 너무 많이 갖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충격 받은 부분은 이거다. 영부인이 고작 17벌이요? 저게 속옷이나 양말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제외한 수라고 쳐도, 현대인 기준으로 보면 너무 적다… 자기 옷을 직접 돈을 벌어 사지 않는 아이들도 17벌보다는 옷이 더 많이 있을걸…
18세기에도 대부분의 미국인은 소유물을 많이 갖지 못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집, 식량을 구하거나 조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 몇 개, 기본적인 가구, 성경, 옷 몇 벌이었다. 남의 집에 불을 지른 경험이 많다면 못은 많이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구체적인 수치를 들자면, 당시 미국 남성과 여성은 1인당 평균 3벌의 옷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부유하다는 사람조차 대형 옷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아내 마사는 옷을 총 17벌 가지고 있었다.
(…)
만약 지금 마사 제퍼슨에게 우리 옷장을 보여 주면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미국인은 옷을 매년 평균 37벌 구입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1인당 평균적으로 보유한 옷 개수는 107벌에 이른다. 같은 연구에서는 우리가 그 옷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자세히 조사했다. 사람들은 107벌의 옷 중 21퍼센트는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57퍼센트는 너무 꽉 끼거나 헐렁하다고 생각한다. 12퍼센트는 여태까지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결국 꾸준히 입는 옷은 나머지 10퍼센트인 11벌로 마사 제퍼슨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보고에 따르면, 미국인은 매년 1인당 약 30킬로그램에 이르는 의류와 직물을 버린다. 물론 기계화는 더 많은 옷을 안겨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더 많아졌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옷 같은 물건만이 아니다. 정보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뉴스’의 개념이 고작 19세기에 신문을 만든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니… 진짜 농락당한 기분이다. “부정적인 뉴스”, “난동, 살인, 사기, 도난, 폭동, 유혈, 추문” 등을 다루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내는 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돈이 되니까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구나. 이건 약간 내가 알던 세상이 바뀐 듯한 충격이었다.
당장 중요한 정보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삶이 대략 1833년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 벤저민 데이Benjamin Day가 신문 하나를 창간했다. 데이는 자신이 팔아야 할 ‘상품’이 신문이나 뉴스가 아니라 ‘독자의 관심’임을 최초로 파악한 인물이었다. 독자를 더 많이 모을수록 광고료를 더 많이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파격적인 행보를 밟았다. 첫째로, 신문 가격을 다른 신문보다 여섯 배 낮춤으로써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신문을 사서 읽을 수 있었다. 판매 이익 자체는 마이너스였지만 광고 수익으로 손해를 충당하면 됐다. 둘째로, 데이는 결핍의 뇌가 집착할 만한 유형의 정보에 집중했다. 당시 신문들은 경영 문제 같은 지루한 화제를 다뤘다. 하지만 데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광고 수익을 더 많이 내려면 결핍의 고리가 지닌 예측 불가능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인간의 관심은 큰 보상이나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정보에 끌리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하자. 이를테면 사람들은 슬롯머신 릴이 일렬로 맞춰지는 장면이나 연쇄살인범이 도주 중이라는 소식 등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특히 부정적인 뉴스를 활용했다. 난동, 살인, 사기, 도난, 폭동, 유혈, 추문 등을 다루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데이의 신문사는 1년 만에 뉴욕시에서 가장 큰 신문사로 거듭났다. 뒤이어 데이의 전략을 모방하는 신문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대중의 관심을 자본 삼아 돌아가는 오늘날의 정보 경제가 탄생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때부터 우리 사회는 정보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용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종의 정보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도 뉴스 기사 중 약 90퍼센트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20세기 초에 라디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영국의 어느 학자 집단은 이렇게 평했다. “실시간으로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비법이 마침내 밝혀졌다.” 라디오 방송 제작자들은 미디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소유’한 채 정보를 지속적으로 주입할 수 있음을 파악했다. 뒤이어 1950년대에는 TV가 등장했다. 궁극의 정보 채널이었다. TV 없이 잘만 살던 사람들이 불과 10년 만에 TV를 하루 평균 5시간씩 시청했다.
전체적으로 괜찮게 읽었는데 한 군데가 내 안에 의심을 싹트게 만들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은 나도 읽어 봤는데, 저자가 요약한 것처럼 이렇게 우스운 내용이 아니고요, 개인에게나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해를 끼치는데도 버젓이 존재하는 직업을 가리키는 겁니다만. 예컨대 ‘잠재 고객’에게 전화로 영업하는(cold call) 아웃바운드 직원(이런 전화를 좋아하는 소비자는 없다)이라거나 담배 회사, 군수 회사 등의 로비스트. 특히나 입법이나 행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로비스트라면 더더욱. 왜 정부가 특정 사기업의 이익을 반영해야 한단 말인가? 어쨌거나 이런 게 ‘불쉿 잡’인데 이 저자는 개념을 잘못 이해한 듯하다. 그 일을 하는 개인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불쉿 잡’의 기준 중 하나일 뿐이고, 그 일의 존재 자체가 개인이나 사회에게 정신적이나 신체적 면 등등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느냐(위에서 말한 사기업의 로비스트처럼)도 기준 중 하나라고요. 로비스트도 뭐 개인적으로 직업에 만족할 수는 있지만, 그 일이 다른 직업, 예컨대 간호사나 환경 미화원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할까? 왜 ‘불쉿 잡’이라는 개념을 이상한 데다가 연결해서 “그 어떤 직업도 쓸모없지 않다" 어쩌고 하는 결론을 내지? 완전 딴소리하시는 거라니까요.
흔히 현대의 수많은 직업이 영혼을 잠식한다고들 말한다. 예를 들어, 2013년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엉터리 직업Bullshit Jobs’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2018년에 나온 동명의 베스트셀러 서적에 자세히 나온다. 책에서 그레이버는 오늘날 직업의 30~60퍼센트가 엉터리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율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레이버는 엉터리 직업이 ‘심각한 심리적 폭력’ 일으킨다고 썼다. 실제로 케임브리지대학의 연구진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뒤 “만약 자신의 직업이 쓸모없다고 믿는다면 불안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쓸모없다고 묘사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낮은 데다가 계속 감소하고 있기에 그레이버의 예측과는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오히려 그레이버가 ‘엉터리 직업’이라고 규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직업 만족도를 보고했다. 바로 그거다. 자신이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고 자신이 하는 일이 어디선가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직업도 쓸모없지 않다.
내가 이 책을 완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으며, 그래서 이 책 리뷰도 책 전체를 요약하거나 소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위에서 말했듯 내가 인상적이라고 느낀 몇 부분만 공유하려는 게 내 의도의 전부다. 위에서 말한 ‘불쉿 잡’ 언급 때문에 신뢰가 조금은 깎였고, 딱히 엄청 감동을 받거나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아니어서 추천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다만 읽어 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고, 밀리의 서재나 교보 샘 같은 플랫폼을 통해 읽는 게 낫고 생각한다. 사서 읽을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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