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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장아이링, <색, 계>

by Jaime Chung 2025.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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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장아이링, <색, 계>

 

 

그 유명한, 탕웨이와 양조위 주연의 영화 <색, 계>(2007)의 원작이 되는 장애령의 단편소설 <색, 계>가 실린 작품집. 솔직히 나는 중국 문학은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어릴 적에 읽은 <삼국지>나 <수호기> 같은 중국 고전(이젠 내용이 기억도 안 난다)을 제외하면 이게 내가 처음으로 접한 중국 문학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여성 작가인 것도 마음에 든다.

내가 워낙에 한자엔 까막눈이라 <색, 계>의 원제가 <色, 戒>인 것을 보고도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랬다. 영화가 개봉했을 때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탕웨이는 아름답고 양조위는 잘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학은 나에게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서 한참 나중에 민음사TV를 통해 이 작품을 소개받고 나서야 ‘아, 그게 ‘Lust, Caution’이라는 뜻이구나’ 하고 알았다. 그리고 이제 여기부터는 나의 (밑도 끝도 없고, 근본도 없는) 개인적 감상이다.

 

솔직히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정처 없는 발길> 작품을 제외하고 나머지 작품들을 통해 내가 느낀 바는 이거다. ‘한중일을 불문하고 동아시아 여자들은 한심한 남자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구나.’ <색, 계> 줄거리는 이미 다들 웬만큼 알고 계실 테니 그냥 자유롭게 말해도 될 것 같아 대놓고 말하자면, 나는 이 사장을 보고 ‘남자는 여자를 사랑 안 해요’ 같은 네이트 판 글들이 떠올랐다. 장아이링의 문학성을 폄훼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에서 보이는 남자 주인공 이 사장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아즈는 이 위험한 관계에서도 어떻게든 이 사장을 착즙해서 (영화 속 멋진 양조위와 달리 소설에서는 이 사장이 ‘쥐’ 상이라는 묘사가 있다) 사랑에 빠졌는데, 이 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아즈를 죽게 만든다. 그렇다고 이 사장이 지아즈에게 끌림을 느끼지 않았느냐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이 사장은 지아즈에게 분명히 깊은 끌림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할 일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틀림없이 그를 원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독한 남자가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그를 사랑했을 리 없었다.

물론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일본 헌병대는 차치하고 역시 비밀 요원인 저우포하이가 내무부를 군더더기 기관으로 여기며 그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의 집 손님이 자객 집단의 끄나풀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는 대체 뭐가 되겠는가. 정보기관의 수뇌로서 그렇게 어리석었다고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저우포하이에게 꼬투리를 잡힐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왜 그냥 죽였냐고 비난을 받아도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학생에 불과해 비밀 요원들처럼 살려 두고 천천히 압박하면서 정보를 캐낼 필요가 없었다고, 질질 끌었다가 외부에 알려지면 애국 대학생들이 매국노를 암살하려 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는 전세를 낙관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도 지기를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영원히 곁에 머물며 위로해 줄 것 같았다. 설령 그녀가 그를 증오했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을 만큼 그에게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감정이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들은 원초적인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 호랑이와 창귀의 관계였고 결국 그는 그녀를 차지했다. 살아 있을 때 그의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죽어서 그의 귀신이 되었다.

자기를 사랑했던 여자를, 비록 스파이라 하더라도, 죽게 만들었는데 “결국 그는 그녀를 차지했다”라느니, “그녀는 이제 죽어서 그의 귀신이 되었다”라느니... 저자 장아이링에게 뭐라 하는 게 아니고, 이런 이 사장 같은 남자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소름이 끼친다. 결국 여자를 얼마나 ‘사랑’했든 간에 그것은 ‘남자’로서 그가 할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거 아니야. 데이비드 헨리 황의 희곡 <M. 나비>에서 갈리마르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의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여자가. 그가 가진 사랑이 전혀 가치 없는 그런 남자라 하더라도(Women willing to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love of a man. Even a man whose love is completely without worth.)” 오리엔탈리즘과 지배, 피지배, 남성성과 여성성을 뒤섞은 이 작품은 <색, 계>와는 많이 다르지만, 이 사장 따위의 남자에게 자신을 바치는 여자들에 대한 내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했다는 데에서 이 대사를 언급하고 싶었다. 지아즈의 사랑, 자신이 위험해진다 하더라도 그는 살 수 있도록 도망가라는 신호를 준 지아즈의 사랑,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 고작 죽음이냐? 그러니까 왜 사랑해 줄, 사랑받을 가치도 없는 남자를 위해 희생하냐고! 아이고 답답해.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인 지아즈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이 사장이 제일 나쁜 놈이지만.

 

내가 할 말이 많은 작품은 또 있다. <붉은 장미 흰 장미>. 본문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흰 장미는 “순결한 아내”이고 붉은 장미는 “열정적인 정부”를 가리킨다. 전바오(振保)라는 (이제는 판다 외에 다른 것을 연상시키지 못하게 된 이름을 가진) 남자는 유학파라 나름대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중국인이라 하나, 여자를 성녀 아니면 창녀로만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 놈이다. 그래서 영국에서 살 때 로즈라는 (중국계) 여자를 사귀었는데, 그녀와 자유롭게 연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즈는 조신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와 헤어진다. 그래 놓고 자신이 그녀와 헤어지기 직전 깊은 관계를 맺을 수도 (다시 말해, 성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이 통제력이 상당한 남자라고 믿는다. 상하이로 돌아온 전바오는 왕스훙이라는 친구네 아파트에 남는 방에 세를 얻는다. 그리고 그의 아내 자오루이의 애인이 된다. 이 둘이 플러팅하는 거 아주 못 봐줄 꼴인데 작가가 아주 실감 나게 묘사를 잘했다. 어쨌거나, 자오루이는 전바오와 아예 남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와 헤어지겠다고 하지만, 전바오는 또 그렇다고 이 여자와 부부의 연을 땅땅 맺기에는 겁이 나 그녀와 헤어진다. 이 못난 놈. 그래 놓고 또 엄마가 소개해 준 여자 멍옌리와 결혼한다. 이 여자의 인상은 하얗다는 게 전부인데, 전바오와 시어머니에게 구박을 들으면서 산다. 이놈이 아주 나쁜 놈인 이유는, 아내를 두고도 매춘부를 삼 주에 한 번씩 찾아가고, 심지어 하인들 앞에서 아내의 실수를 질책하는 등, 사랑도 없이 아내를 아랫사람 대하듯 하기 때문이다. 박범신 작가를 두고 “아아 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하셨던 박경리 선생님 말씀은 여러 모로 이 중남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놀랍게도 이제 중국에서는 자국 남성을 ‘국남(國男)’이라고만 불러도 ‘비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올해 초 설날 연휴를 맞아 사회 정화 차원에서 인터넷을 단속했는데, ‘국남’이라는 표현도 단속됐다. 기사를 보시라. 한국 남성을 ‘한남’이라고만 불러도 발작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어머니란 자도 어쩜 자기 아들을 그 모양 그 꼴로 키워 놓고는 며느리를 잡으려 하는지.

새로 온 하인 앞에서는 그래도 며칠 동안 아씨 행세를 할 수 있어 옌리는 툭하면 사람을 바꾸려고 했다. 전바오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쓸모없다고 사방에 떠들고 다녔다. “불쌍한 전바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는데 돌아와서도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신경 써야 하니. 한순간도 평화롭지 못하다니까.” 그런 말들이 옌리의 귀에 들려와 차곡차곡 분노로 쌓였다. 그해에 아이까지 가져 힘겹게 출산하고 나자 옌리는 울분을 좀 풀어도 되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고작 딸을 낳았다며 받아 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다투기 시작했다. 다행히 전바오가 잘 중재해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씩씩거리며 장완으로 돌아갔다. 전바오는 아내에게 매우 실망했다.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온순해서였으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멋대로 나가 버린 데다 남들한테 좋은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 화가 났다. 여전히 기꺼이 일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피곤해졌다. 심지어 웃는 듯했던 양복 주름마저 피곤해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놈은 아내를 그렇게 막대하면서도 옛 연인 자오루이와 마주치자 그녀와 헤어진 것을 후회한다. 계륵이냐?

이 소설은 특히 결말이 나름대로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마지막 한 문장이 아주 충격적이다. 이걸 글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꼬는 의미인 건지 잘 모르겠다. 해설해 주실 분이 계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봉쇄>는 전차가 가던 길이 봉쇄된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인데, 여기에서도 유부남은 (자기 아내에나, 애인에게나)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마지막 작품 <증오의 굴레>는 이 작품집에 실린 것 중 가장 멜로드라마스러운 단편인데, 한 부잣집의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와 그 아이의 아빠 사이의… 플라토닉한 불륜? 말이 좀 이상한데, 육체적 관계 없이 정신적인 교류만 하는, 수상한 우정 정도로 해 두자. 뭐 그런 관계 사이에서 이 가정교사의 아버지(딸을 사장이라는 자의 첩으로 보내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고 하는 늙은이)가 끼어들고, (아파서 시골에서 요양했던) 아내가 돌아와서 남편과 헤어질 수 없다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평일 늦은 오후 시간대 일일 드라마를 만들어도 될 법한 소재다. 여기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 주인공에게 감겨드는 걸 보면 좀 웃기다. 여자 주인공이 불쌍한 건 맞는데, 아내랑 사랑 없이 결혼했고, 늘 이혼하고 싶었으면 빨리 하지, 여태까지 뭐 하다가 이제 와서 나불대고 있어? 반박 안 받음.

 

중국 문학에 전혀 조예가 없는 나의 감상은 이 정도다. 역시, 동아시아 여자들은 한국, 중국, 일본 어딜 가든 행복할 수 없구나… 이런 못난 놈들이 득시글한 동아시아라니… 동아시아 여자들이 불꽃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 보통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이 되는 작품을 접하고 나면 영상화된 작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이건 뭐, 글쎄… 원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여자가 못난 남자를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를 또 영상으로까지 보고 싶진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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