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Hope Gap(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2019)

원제의 ‘Hope Gap(호프 갭)’은 영국 이스트 서섹스 주에 있는 지역이다(참고). 극 중 엄마와 아들이 어릴 적에 자주 산책하던 곳이라서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그레이스(아네트 배닝 분)와 에드워드(빌 나이 분)는 아들 제이미(조쉬 오코너 분)를 두고 29년간 함께 살아왔다. 성인이 된 제이미는 어느 날 부모님 댁에 주말을 보내러 갔는데, 그날 밤에 두 분이 싸우더니(정확히는 그레이스가 에드워드의 뺨을 때리고 식탁을 엎었다), 다음 날 에드워드는 그레이스를 떠날 예정이라고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제이미는 어머니 곁에 남아 위로해 드리기로 한다.
방금 말했듯 ‘호프 갭’은 진짜 존재하는 지명인데, 심지어 이 영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감독인 윌리엄 니콜슨의 부모님이 33년의 결혼 생활 후 이혼을 하셨던 일에 기반한다고. 감독 부모님의 정확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영화 속 그레이스와 에드워드의 사연은 꽤나 답답하다. 그레이스는 에드워드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데 에드워드는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입장이다. 1년 전에 에드워드가 학교에서(그는 교사다) 한 학생의 어머니를 만나 상담을 했는데, 그때 그 학생의 어머니인 앤젤라(샐리 로저스 분)와 눈이 맞은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조잘조잘 수다를 떨면서 에드워드에게 좋다든지 싫다든지 반응을 얻어 내려고 하면 그렇게 귀찮다는 눈치를 줬나 보다.
애초에 나는 이게 마음에 안 든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보고, 뭐 사랑이 식을 수도 있지(애초에 나는 결혼이란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사람과 함께 가겠다’라는 의지, 노력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보지만, 그건 차치하고). 이해한다 이거야. 근데 마음이 식었으면 다시 마음을 데우려고 노력을 하든지,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끝내야지, 왜 사랑도 없는 관계를 그냥 습관처럼 붙잡고 있다가 다른 사람이 생기고 나서야 원래 배우자를 버리려고 하는 거지? 애초에 마음이 식었을 때 그냥 헤어졌으면 됐잖아. 상대방도 배우자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충격을 받지 않아도 될 거고, 이성적으로, 대화로 좋게 끝을 맺을 수도 있지 않나. 근데 왜 꼭 굳이 갈아탈 다른 사람이 생기고 나서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 없어도, 배우자가 있으면 일단 내가 대외적으로 정상처럼 보이고 또 배우자의 돌봄 노동을 받음으로서 내가 이득 보는 게 있으니까? 하, 진짜 이기적이다.
에드워드가 하는 게 진짜 딱 이거다. 그레이스와 자기가 그렇게 안 맞았으면 앤젤라를 만나기 전에 헤어지면 안 됐나? 그레이스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데 에드워드는 대화에 참여할 생각도 안 하면서 ‘내가 하는 건 다 당신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하잖아. 나는 당신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야’ 같은 말이나 하고 있는데, 이제 새 여자가 생기니까 기존 배우자가 있는 게 문제가 되어서 굳이 갈라서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그레이스는 아직 사랑한다는데? 29년이나 되는 세월을 같이 살아왔으면 끝낼 때 끝내더라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데 에드워드는 무슨 ‘앤젤라 말이 나랑 그레이스가 좀 더 일찍 헤어졌어야 한데’ 웅앵인지, 정말. 극 중 캐릭터 나이가 얼마라는 설정이 없어서 모르곘는데 배우들 본체 나이를 따져보자면 아네트 배닝은 58년생(올해 68세), 빌 나이는 49년생(올해 77세)이다. 이 나이에 세컨드? 이 나이에 불륜이요? 얼탱이가 없다.
어쨌든 에드워드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그레이스는 (당연히) 슬퍼한다. 제이미가 틈이 날 때마다 어머니 상태를 살펴보고 위로해 드리려 하지만, 그레이스는 나아지기 위해 일단 ‘죽음의 5단계’를 착실히 밟아 나가야 한다. 딱 이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 서서히 나아진다는 뜻이다. 그레이스는 개도 키우고, ‘프렌드라인’이라는 자살 예방 상담 핫라인에서 자원 봉사도 하며, 오랫동안 작업해 왔던 ‘시 모으기’도 계속한다. 그녀만의 속도로 상실과 슬픔에서 벗어난다. 결국 나름대로 좋은 결말을 맞긴 하지만, 이게 인생이라 생각하면 좀 서글프긴 하다. 29년간 함께해 온 배우자와 이혼하는 것…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제이미가 낭독하는 그레이스의 ‘최애’ 시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Sudden Light(갑작스러운 빛)’라는 시다. 극 중에서 그레이스는 이 시를 ‘I have been here before’라는 제목으로 알고 있는데 찾아보니 시의 제목은 ‘Sudden Light’가 맞고, ‘I have been here before’로 시작하긴 한다. 내가 겪는 일이 남들도 이미 겪어 보았고, 또 지금 겪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좀 견딜 만하다는 그레이스의 말처럼, 우리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슬프지만 빛나는 이야기. 잔잔하지만 감정적으로 강력한 힘이 있는 영화를 선호한다면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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