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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홍주현, <환장할 우리 가족>

by Jaime Chung 2019.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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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홍주현, <환장할 우리 가족>

 

 

책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 책은 바로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의 가족은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집단'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라는!

딱히 저자가 사회학이나 가정학을 전공한 학자인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경험이 책의 주제와 잘 맞닿아 있어서 설득력 있게 글을 잘 썼다.

저자는 딱 2달 만난 당시 남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한 지 2년만에 남편이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5년간 남편의 투병을 도우며 가족의 의미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위치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서양보다 한국에서 유독 많이 일어나는 범죄가 있는데, 부모(특히 가장인 남성)가 배우자와 자식을 살해하고 스스로 자살하는 '가족 살인'이다.

대개 경제적인 이유로 신변을 비관해 '내가 없으면 이 아이들은 누가 돌보아 주겠나' 하는 사고에서 그 아이들을 살해하는데, 참 웃기게도 자녀와 배우자는 죽여 놓고 자살에는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타인의 삶의 권리를 자기 멋대로 빼앗는 것도 웃긴데, 자기 목숨을 스스로 거두기에는 용기가 모자랐는지 자살조차 못하는 것들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런 놈들은 자신이 저지른 게 얼마나 큰 폭력인지 알까?

자녀와 배우자를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꼭 '가족'이 아니라 '타인'이어도 믿고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런 끔찍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한국의 가족 살인 비율은 매우 높은 편으로, 특히 서구권에서 이런 사건은 드물다고 한다. 이는 물론 복지 제도 같은 제도적 미비 탓이지만, 우리 가족이라는 한국인의 무의식적 가족관에서 기인한 태도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우리 가족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의미가 아니라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경계의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는 내부인에게는 폐쇄성과 배타성으로, 외부인에게는 무관심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남'이 '우리' 가족에게 무관심한 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 가족 안에서 일어난 문제는 당연히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

가정 폭력이나 부부 간의 성폭력 문제에 경찰 같은 공권력이 개입하기를 꺼리는 경향에도 이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이런 것만 아니었다면 길을 가다가 보이는 데이트 폭력 같은 것에도 사람들이 더 잘 개입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우리나라는 '가족'을 중시하면서도 참 신기하게 그 '가족'조차 '정상'과 '비정상'으로 무척 엄격하게 구분한다.

한국에서 가족이 정상 대우를 받으려면 일단 가족 구성원이 모두 순수 한민족이고, 비장애인이어야 하며, 부부는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결혼한 뒤 아이를 낳아야 하며, 아이 역시 그런 공식 제도를 거친 사람에게서 태어나야 정상적인 존재를 인정받는다.

이 정도 조건은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고, 세분화하자면 정말 끝도 없다.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가족을 서열화한다.

저자는 자신의 친구를 예로 든다. 그 친구는 어릴 적에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만큼 부모님이 경제력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본인도, 본인 남편도 한국 사회의 '주류'에 속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이 완벽한 주류 인생이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남편과 이혼을 하자, 곧바로 '비정상' 가족, 즉 비주류가 됐다. 

주류에서 비주류로 떨어지기는 정말 너무나 쉽다. 조금만 삐끗했다간 바로 '비정상'이 되어 버린다.

아니, 이렇게 관용 정신이 없어서야 어떻게 사람들이 '가족'을 만들려고 도전이라도 해 보겠느냐는 말이다.

애를 낳으라고 그렇게 외쳐 대면서 정작 미혼모/부, 편부모 가정, 또는 난임 가정들에게는 가차 없이 '비정상' 딱지를 붙이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롭고 또 새로 알게 되었던 것은, '경제'와 '가족'의 개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전쟁으로 폐허였던 이 땅에 부랴부랴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가 도입한 이후, 경제 발전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복지 같은 건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고, 그래서 일단 '선경제 후복지'가 기치가 되었다. 

(...) 국가가 제공해야 할 복지를 급한 대로 민간(개인, 가족)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전략을 택했다. 월급을 주는 사용자, 즉 기업은 국가 역할을 일부 부담하는 대신 특혜를 받았다. 국가과 기업이 주고받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래 일할수록 급여가 올라간다. 일을 잘하건 못하건, 생산성과 급여는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 왜 그럴까. 나이를 먹을수록 부양 가족이 생기고, 자녀 양육비가 들며, 노부모의 의료비를 부담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은 선진국이 될수록 사회가 부담하는 부분이 커진다.

이 부분에서 사회학자 송호근의 말도 인용되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서구의 연봉 개념은 성과에 기초해 단순한 반면, 한국의 급여 명세서에는 주택이나 학자금, 가족수당 같은 항목이 많이 붙어 있어 복잡하다.

대기업 중에는 '계열사' 또는 '그룹사'라는 큰 틀 안에서 백화이나 콘도 이용 시 할인, 또는 자동차 구매 시 할인 등의 혜택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것들 모두 일종의 복지 성격인데, "명절 상여금, 휴가비, 학자금, 전세나 월세 자금 대여 등 현금 보상을 위시해 병원, 사원 주택, 휴양 시설, 체육관, 소비조합 등 시설 복지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이런 복지 방식에는 물론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그런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조직의 직원과 그런 조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나 위화감에 견줄 만한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런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방심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만 자기와 자기 가족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몸이 힘들고 정신이 괴롭더라도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선경제 후복지' 정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시 국가가 복지를 적극적으로 가져가는 형태로 수정되어야 하는데, 이 일을 미루다 보니 국가의 복지 서비스 제공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각자도생만 심화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조성되면 개인이 가족을 부양하는 데 느끼는 부담도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가족'이라는 굴레의 구속력도 조금은 약해지지 않을까?

'가족'이라는 다소 개인적인 개념과 경제라는 큰 개념을 연결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이 책에서 이런 점을 지적하는 걸 읽고 나니 정말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구나!

 

많은 이들이 자주 고민해 보았을 법한 주제(있어도 환장, 없어도 환장하는 게 가족이니까)를 다룬 책인데다가, <라디오 스타>에 나온 '샤이니' 태민의 이야기라든지 영화 <쿵푸 팬더> 등 쉬운 소재로도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서 전반적으로 읽기 쉽다.

고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읽고 공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가족끼리 다 같이 읽고 토론하기에도 좋을 듯하다.

나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제시하는 결론이 참 마음에 든다.

가족의 해체를 말할 때 걱정스러운 시선을 가득 담는다. 그러나 나는 가족의 해체가 반갑다. 그 가족은 전근대의 '집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족이 해체돼야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할 수 있다. 새로운 가족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구성원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애처로운 가족이 아니라. 각자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함께하는 밝고 건설적인 가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도덕도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포용적이고 따뜻한 가족의 개념이 널리 퍼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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