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전지현,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

by Jaime Chung 2020. 5. 25.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전지현,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

 

 

흥미로우면서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저자가 8년간 만난 7명의 정신과 의사들에 대한 일종의 후기이기 때문이다.

아주 얇은데(종이책 기준 176쪽) 글도 어려운 어휘나 내용이 없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

 

저자는 첫 아이를 낳고 나서 자기는 힘든데 세상은 괜찮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부터 우울증이 시작됐다고 한다.

두 아이를 키우며 집안까지 관리하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니, 일이 너무 벅차서 정신적 탈진이 왔다 해도 이해할 법하다.

저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때로는 의사가 이사를 갔거나 때로는 본인이 이사를 가서) 정신과 의사를 여럿 바꿨다.

저자는 자신이 만난 의사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당시 자신의 상황에 대한 기록을 시간순으로 썼고, 그게 바로 이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제일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팠던 건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저자 본인의 상황도 참 힘들지만 어떤 의사들은 '정말 저래도 의사라고 부를 자격이 있나?' 싶다는 점과 둘째, 정신과 또는 정신병에 대한 사회적, 대중적 인식이 아직 미비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처음으로 만난 의사는 약을 먹으면 머릿속도, 가슴도 답답하고 낫는다는 느낌이 안 든다고 말하니 저자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환자가 의사인가요?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본인이 어떻게 알죠?"

공격적으로 퍼붓던 의사가 느닷없이 손가락으로 내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가리키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지금 얘는 그나마 약 먹으면서 치료를 받고 있는 엄마한테 자라는 게 더 행복할걸요?"

느닷없이 자기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놀란 아이가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내가 그렇게 엉망이었어? 애들이 지금 이 꼴을 한 엄마와 지내는 게 더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정말이지, 의사란 자가 어떻게 환자들을 이렇게 막 대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고로 의사란 전공을 불문하고 인간에 대한 존경심과 공감 능력, 애정을 가져야 하지 않나?

의사와의 상담 없이 섣불리 약을 끊거나 양을 조절하는 행위가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을 마음대로 조절해서 드시면 안 됩니다'라고 좋게 말할 수도 있는데 저건 너무 인격 모독이다.

 

그리고 저자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친구에게 밝혔더니, "친구야, 그거 절대 먹지 마, 큰일 난대!" 또는 "아휴, 니가 애들 키운다고 집에만 있어서 그럤나 보다. 안 되겠다. 나랑 같이 교회 가자. 가서 목사님 말씀 듣고 봉사도 하고 그러면 우울증 같은 건 바로 싹 낫는다."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이게 아쉽지만 정신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같다. 요즘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정신 건강도 신체 건강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긴 하지만, '대중'의 범위를 전 연령대로 넓히면 이런 반응을 받기 일쑤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짧은 책이라 많은 부분을 미리 말할 수가 없어서 감상도 길게는 못 쓰겠다.

그래도 이건 말해 두면 좋겠다. 저자가 만난 의사들이 다 형편없었던 건 아니라고.

네 번째 의사는 30대 후반의 여자였다. 같은 아이 엄마로서 많은 부분에서 쉽게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부모 모임이 시작되었다. 난 학부모 모임의 첫 단체 카톡을 받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 왈.

"파일을 옮깁니다."
"네? 어디로요?"
"응급으로요. 이제 대기 없이 바로 진료 보실 수 있어요."

의사와 나는 마주보고 웃었다.

 

구체적인 지역이나, 병원명, 의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아니기에 조심스럽게 시도해 볼 만한 정신과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울증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진료를 보기 위해 정신과에 들를 때 어떤 것을 염두에 두면 좋은지 등에는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증은 겪는 다른 이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우울증으로 힘든 게 나만은 아니라는 작은 위안과 공감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