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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재윤, <재윤의 삶>

 

 

2016년부터 저자가 소셜 미디어에서 '#재윤의삶'으로 그린 만화를 모은 책. 

나는 읽자마자 홀딱 반했다. 이렇게나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책이라니!

 

유머 감각도 적당히 내 취향이고, 말투도 재미있는데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굳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분위기 잡고 목소리 높여 말하지 않아도 그냥 만화에서 저절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저자의 철학이라 할까, 태도라고 할까, 그런 거였다.

여러 가지 느낌이 섞인 태도인데, 굳이 하나로 묶어서 말하자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투쟁의 역사'라는 꼭지에서 저자는 "어렸을 때,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현관 밖으로 쫓겨나는 벌을 받"을 때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시작한 지 세 컷만에 "현관 밖으로 내쫓는 건 아동 학대예욧!"이라며 태클을 거는 예민한 독자 옆에 바로 양손으로 브이(V) 자를 하고 저자가 웃으며 "네네, 그렇습니다. 저는 학대받고 자란 불쌍한 아동입니다."라고 대꾸한다.

이런 것에서 '와, 정말 과하게 예민하게 굴어 불편하다 드립 치는 사람들을 이렇게 쉽게 무시하고 넘어가는 쿨함이라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저자는 어릴 적부터 한 '투쟁' 했기에, 이렇게 현관 밖으로 쫓겨나는 벌을 받았을 때도 "태생적으로 가련한 소녀는 아니었기에 차라리 도발하는 방법을 택한다." 즉, "문 닫히는 순간부터 계속 벨 누르기". 딩동딩동딩동….

단호한 얼굴의 작은 '재윤'이 한쪽 눈으론 눈물을 흘리며 '딩동딩동딩동' 계속 벨을 누른다. "무자비한 권위에 의해 내 영역을 잃었으나 최후까지 저항하리라"라고 다짐하며. 

그리고 바로 다음 컷, 부모님은 "어휴, 들어와 그냥"이라며 문을 열어 주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 9칸 만에 저자의 '투쟁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쿨함' 외에도 그냥 저자에게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페미니즘 바이브(vibe)도 너무 좋았다. 굳이 '저는 페미니스트이고, 이런 게 페미니즘의 이슈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냥 만화에서 그런 게 읽힌다.

예를 들어, 어린 재윤이 남자애에게 머리를 잡아당기는 '장난'을 당하자 (여자) 선생님은 이를 "정훈이가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말하고 친구 여자애들도 "야 박정훈이 니 조아하는 거 아니가~?"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작은 재윤은 "그것이 감정 표현 방식이라면야 저도 한번 해 보겠습니다요?"라며, 그 남자애를 따라다니며 "니 꽁지머리 진짜 이상함. 니랑 1도 안 어울린다", "으 땀냄새 으-", "시금치 못 먹나? 유딩이가? 왜 남기는데?? 농부 아저씨 생각해라. 피땀 흘려 기른 건데 편식하지 마라!"라고 코멘트를 한다.

결국 그 남자애는 "아 왜 계속 따라오는데! 그만 좀 해라!"라며 짜증을 내고 그 애의 친구 남자애들도 "그래 니 자꾸 괴롭히지 마라!"라며 거든다.

그다음 컷, 어린 재윤은 "오…그래도 알긴 아네. 다행!"이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렇지. 그런 '장난'이 좋아한다는 마음의 표현, 친하게 지내는 마음의 표현이라면 왜 재윤이 똑같은 방식을 남자애에게 적용했을 때는 '괴롭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단 말인가?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의 짓궃은 장난, 괴롭힘을 애정 또는 관심의 표현이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인내해야 하는 건가? 이런 비슷한 내용을 예전에 한 페미니즘 책에서 읽었는데 그건 분명 좋은 글이었고 생각해 볼 점도 많았지만, 이 만화는 같은 내용을 단 8컷 만에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정말 놀랍다.

이 외에도 '롤 모델은 어디에 있는가'와 '최악의 인터뷰 모음집' 이야기가 정말 너무나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적이라서 감탄했다.

이 꼭지 저 꼭지에 조금씩 나오는 가상의 자식 이야기는 약간 안타까우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리디 셀렉트에서 발견해 읽었는데, 거기에선 만화책은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거나 마음에 드는 구절에 하이라이트를 할 수가 없게 돼 있다(아마 파일 자체를 PDF나 그림 파일로 받아 와서 대사나 페이지 자체를 개별적으로 선택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따로 핸드폰 메모장에 특히 마음에 드는 만화의 페이지 수를 적어 가며 읽을 정도였는데, 이 좋은 책을 다 하나하나 다 이야기해 드릴 수는 없으니 하나만 더 소개해야겠다.

'RAMO'라는 제목의, 몇 페이지가 쭉 이어지는 긴 이야기인데, 좀 씁쓸하다. 대략 요약하자면, 저자가 어릴 적에 영어 학원에 다녔을 때 만난 원어민 강사(긴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라모(RAMO)'라고 불렸던)의 이야기이다.

그 강사가 어린 재윤을 유난히 예뻐해서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도 오직 재윤에게만 자기가 캐나다로 돌아갈 거라고 귀띔도 해 주고, 서로 이메일도 주고 받았단다.

그 강사는 재윤에게 택배로 원어 서적이며 엽서, 테디 베어 인형도 보내 줬다는데, 원래 연락이란 게 그렇듯이 어느 때부터인지 흐지부지되어 연락이 끊겼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강사에게서 편지가 와서 읽어 보니, 그 강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네가 너무 보고 싶으니 시간이 된다면 뫄뫄 시로 놀러 오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RAMO가 보고 싶었다! 만나게 되면 할 말이 정말 많을 텐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름 방학에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너는 내게 특별한 학생이고'
'…많이 컸는지도 궁금하단다'
'정말 보고 싶구나.'
'널 만난 건 행운이고…'
이런 말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나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 짜증났다.

(어린 재윤): 엄마 RAMO쌤 기억나지?그 쌤 다시 한국 왔다고 시간 되면 방학 때 (엄마랑)놀러 오라는디.
(엄마):음 글쎄다….출근도 해야 되고 가까운 데도 아니고 그래도 오랜만에 연락 주셨네~한국은 왜 또 다시 오셨대니?
질문도 흐릿하고 대답도 역시 흐릿하였다.


그때 내가 RAMO의 집에 놀러갔었다면? 굳이 말로 옮길 필요조차 없는 최악의 경우부터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캐나다 할아버지 친구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집에 가지 않았고,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SARAH는 별일 없이 토익 고득점 목표반에 들어갔다.

씁쓸하고 안타까운데 그래도 어린 재윤이 똑똑해서 자신을 지킬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다. 나는 이걸 읽으며 씁쓸함, 안타까움, 안도감, 두려움 등등 너무나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이 책에 반해 버렸고, 책을 한 절반밖에 안 읽었는데도 벌써 친구에게 이 책을 추천했다.

 

이제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정말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내 인간관계는 그렇게 넓지 않으므로, 내 블로그에서 이 '책 추천, 책 감상' 자리를 빌려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보았다.

내가 이 책의 매력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지만, 어차피 어떤 책이든 읽지 않고는 그 감동을 100% 느낄 수는 없는 법이니 꼭 한번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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