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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준형, <오늘도 쾌변>

by Jaime Chung 2020.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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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준형, <오늘도 쾌변>

 

 

굉장한 사명감 또는 큰 꿈, 열정을 가지고 변호사가 된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생계형' 변호사가 되어 서초동을 떠돌고 있는 한 변호사의 에세이.

여태까지 나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점, 또는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떠나) 정의 구현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변호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봐 왔다. TV라든가 영화 등을 통해서. 때로는 실제로 그러한 목적으로 변호사가 된 실제 변호사들의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고귀한 직업 정신 또는 희생 정신을 가지고 현재의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 터이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직업을 고른 걸 수도 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이라도 먹고살기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히, 열심히 일한다면 그것 역시 존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을 만하다.

 

다만, 소위 '사' 자 직업이라 해서 특별할 것 있겠는가, 변호사도 사람인데 꼭 변호사 하고 싶어서 죽을 것만 같던 사람만 그 일을 하는 건 아니지,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 책의 저자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쩌다 보니" 변호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겉보기에는 매력적이고 멋져 보이지만 그런 변호사들 또한 어떻게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지, 상사 및 동료들에 치어 고된 직장 생활을 하는지를 솔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책 소개는 저자의 말로 직접 들어 보자.

그러다 보니 친절하게 생활 법률 상식을 알려 주는 변호사 같은 건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누덕누덕 기워놓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땅의 법률과 사법제도를 똘똘히 풀어 소개하는 대목도 없고 그 미래상을 대차게 제시하는 소장 법률가의 심오한 개똥철학 같은 것도 전혀 없다. 혹시나 그런 걸 원한다면 지식인이나 유튜브를 찾아보는 게 나을지 모른다.

또한 1년 365일 내내 아프기만 한 청춘들을 보듬어 줄 희망과 힐링의 메시지 역시 단 한마디로 담겨 있지 않다. 그럴 여유를 부리기엔 어지간한 청춘보다 내가 더 아픈 것 같다. 

(...)

그래서 이 책은 장마철 먹구름 뺨치는 비관론과 하드코어 염세주의로 똘똘 뭉친 채 오늘도 오직 생계를 위해 주야장천 삽질만 해대는, 그저 그런 변호사의 삶을 툭 던져놓는다. 어떤 면에서는 나만 구독하는 1인 방송일 수도 또 어떤 면에서는 10년 전 드라마를 삼탕, 사탕까지 하는 케이블 채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하나 마나 한 잡담을 통해 흔히들 갖는 변호사에 대한 해묵은 오해와 편견이 다소나마 해소됐으면 좋겠다. 특별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보통의 생계형 직장인 중 1인의 뻔한 일상을 뼈가 하얘지도록 우려냈지만, 소름 돋을 만큼 똑같은 일상을 견디고 사는 이 땅의 직장인들에게 '아, 나만 공들여 삽질하며 사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정도의 공감만 얻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내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브런치'에서 글을 연재하는 사람들은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정말 글을 재치 있고 재미있게 쓰는 이들이 많더라.

약간 이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문득 떠올려보니 매일 그랬듯 오늘 하루도 순탄치 않았다. 아침에는 알람이 우렁차게 열 번쯤 울린 뒤에야 오만상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일어났고 만원 지하철에서 짐짝처럼 실린 채 도를 닦는 기분으로 출근했다.

오전 내내 세상 억울한 사연을 들고 찾아오는 고객들과 입씨름을 하고 나니 턱이 욱신거려 점심은 가볍게 코로 마셨다. 밀려오는 식곤증에 잠시 꾸벅꾸벅 졸다가, 임박한 재판 시간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달려갔지만 어쩐지 상대방 편만 들어주는 판사님이 야속해 한참을 씩씩대다 법원 문을 나섰다.

늦은 오후, 흡사 내 인생길인가 싶을 만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볕 쬐는 늙은 뱀처럼 늘어져 있다 돌아오니 역시나 컴컴한 사무실에 홀로 남겨졌고 까닭 모를 서글픔에 성찰의 시간을 갖다 보니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버렸다.

나는 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영화 속 변호사 같은 정의와 인권의 수호자 코스프레는 진작 집어치웠다. 백날 공익을 수호해 봤자 철저히 사적인 생계가 넉넉해지지는 않는다.

 

아니면 이런 거?

오히려 권 여사는 '그저 처먹고 싸재끼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모질이 놈' 먹여 살리느라 부부의 재산이라고는 수저 한 벌밖에 남지 않았으니 대신 시부모의 집이라도 나눠 가져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남편 얘기를 할 때마다 분기탱천해 허공을 가르는 그의 주먹이 어쩌면 내게 향할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고, 여사님 고정하세요"를 연발하며 주저리주저리 위로도 해 보았겄만 소용없었다. 그는 기어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남편을 때려잡아서는 신혼 첫날 사다 먹인 박카스 한 병까지 게워내게 만들 기세였다.

 

저자가 들려주는 고객들 이야기들이 진짜 기가 막힌 게 많은데(물론 그거야 일부러 개중 제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만 골라서 썼으니 당연하겠지만) 그걸 이야기해 주는 저자의 표현력이 장난이 아니다. 아래는 내가 읽으면서 제일 많이 웃은 부분이다.

최 여사의 사건은 처음 받아 들었을 때는 그저 이상했고 사건이 진행될수록 점점 이상했으며 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았을 땐 확실히 이상했다. 세상에 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었고 어디 가서 풍운아랍시고 명함 좀 내밀어보려면 김 영감 정도 인상새는 돼야겠구나 싶었다.

일단 평생을 도깨비처럼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신비롭기 그지없다. 게다가 평소 김씨 성을 쓰는지 오씨 성을 쓰는지도 몰랐던 아들은 영감님이 중병으로 입원하자마자 갑자기 피눈물을 흘리며 들이닥쳤다. 김 영감은 김 영감대로 죽음이 임박해서 혼자 숨 쉬기도 버거운 처지에 돌연 벼락같은 문장력이 생겨나 사실혼 관계 해소와 재산분할을 요구했다. 이건 뭐 도대체 상식과 맞아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도탄에 빠진 세상을 홀로 구원할 정도의 경륜을 지닌 재사 중의 재사 김 영감이, 그 경륜의 100만 분의 1만 썼어도 충분히 이뤘을 취적을 유독 등한시해 평생 모은 재산도 남의 이름으로 갖다 놓았다는 대목이었다. 만약 오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강태공이나 제갈공명 뺨치는 혜안을 가진 김 영감은 일신의 부귀 따위 진작 초월한 채 그저 세월이나 낚으며 세상에 나아갈 때를 기다리다 불운하게 생을 마감한 셈이었고 이 나라는 그 큰 인재에게 주민등록번호조차 내어주지 않는 졸렬함을 보인 것이었다.

"그 참......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아무튼 좀 많이 이상하네요."

내가 기록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소감을 밝히자 최 여사는 원통함이 극에 달해 하소연을 쏟아냈는데, 이미 분노가 이성을 삼킨 지 오래라 하는 말의 태반은 그 옛날 뱃사람 못지않게 걸걸한 욕이었다. 하지만 그가 두서없이 집어 던지는 말들을 주워다 놓고 차분히 곱씹어보면 사실 최 여사야말로 장자방 못지않은 안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 알기 쉬운 생활 법률 상식 같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배울 게 있다.

왜 미드를 보면 경찰들이 용의자를 어찌어찌 서로 데려왔는데 곧바로 입을 싹 닫고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해서 변호사를 불러 줬더니 경찰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변호사가 끼어들어 '그건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하며 말을 싹 자르는 장면들이 종종 나오지 않나?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단다. 변호사가 대신 와도 본인 대신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 피의자가 애타게 부른 변호사가 와도 변호사는 경찰관이나 검사의 신문에 피의자를 대신 혹은 대리해 답변할 수 없다. 수사기관의 신문 대상은 피의자이지 변호사가 아니고, 형사사건에서 변호사는 피의자의 '대리인'이 아닌 '변호인'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드나 영화에서처럼 수사기관의 추궁에 눌려 뭔가 우물쭈물 털어놓으려는 피의자의 입을 막고 변호사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대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실제로 그랬다간 수사 방해 등의 이유로 조사실에서 쫓겨난다.

(...)

다만 변호사는 조사 중이든 조사 후이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데, 그래 봤자 수사기관은 "네. 네. 아 그러시구나"라고만 할 뿐 대체로 귀담아듣지 않는 편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조사 전 면담 시간이나 조사 중 휴식 시간 등을 이용해 피의자에게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조언'이지 이렇게 말해라, 저렇게 말해라 하는 식으로 아예 진술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

 

이렇게 웃기고 공감도 되는 에세이라니! 혹시나 변호사가 꿈이라면 오히려 더 현실을 잘 알기 위해 읽어 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변호사에 꿈이 전혀 없더라도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하는 직장인이라면 공감되는 웃음을 위해 읽어 볼 만하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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