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오드 메르미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by Jaime Chung 2021. 3. 24.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오드 메르미오,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

 

 

프랑스의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오드 메르미오가 젊을 적 받았던 임신중지 시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장르는 그래픽 노블이라고 되어 있는데, '소설'은 아니고 그냥 만화로 그린 회고록이나 에세이에 가깝다.

어쨌거나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또는 앞부분은 메르미오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또는 뒷부분은 그녀가 만난 의사 겸 작가 마르탱 뱅클레르(필명. 본명은 마크 자프란)가 보고 느낀 관점을 다룬다.

전자는 실질적으로 임신중지 경험을 한 여성의 시점이라서 좋고, 후자는 그런 여성들을 돕고자 애쓰는 (남성) 의사의 관점이라서 서로 보충, 보완해 준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자, 그러니까 메르미오가 애초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일주일의 '숙려 기간'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참고로 그녀는 임신 당시 피임기구인 루프를 삽입한 상태였다. 가능성이 낮은데 정말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아무래도 자신의 몸 안에 있던 것을 흡인기로 빨아들여 몸 밖으로 벌이는 시술을 했으니 그 고통도 상당할 것이고, (내가 감히 상상해 보자면) 그 시술이 끝난 후에는 허무감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기쁨 또는 절망을 주는 이 태아라는 존재가 이렇게 없앨 수 있는 거구나, 하는 허무함? (오해는 마시라, 나는 여성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과하게 감상주의에 젖지 않는다는 게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 자기 뱃속에 있던 것이니 어느 정도 미안함이나 어떤 부드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것도 분명 본인의 자유다만, 나는 애초에 아이란 걸 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자연 속에서 알몸으로 사진을 찍으며,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는 것으로 조용히 애도하는 그녀의 방식이 참 깔끔하고 담백하다고 느꼈다.

 

딱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건 이거다. 저자가 임신중지를 결정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신중지한 여자들 많이 봤잖아! 그렇게 심각한 문제 아니야. 그냥 세포일 뿐이야…."

"알지, 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언니 루프는 괜찮던데."

"호르몬 때문에 슬픈 거야."

"호두 크기 정도밖에 안 된대!"

"그건 진짜 사람이 아니야."

"그래, 슬프지, 하지만 '진짜 애도'랑은 다른 일이야."

"사랑니 빼는 것 정도밖에 안 될 거야. 내가 장담해!"

그리고 그녀는 그런 말들에 "닥쳐!"라고 외치고 싶었단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온통 여자들이었다. 그들이 내게 하는 말은 사실 이런 뜻이었다.
"내가 임신을 해도 별일 아니겠지?"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주변에 남자들과 내 친구 비르지니만 두기로 결정했다.

글쎄,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고 해서 모든 여자들이 다 그녀의 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잖아.

주변에 남자들과 친구 한 명만 두기로 한 건, 뭐랄까, 성차별적인 행위가 아닌지. 남자들이 그런 말을 안 했다면, 그건 그냥 분위기를 봐서 입을 다문 거지, 딱히 그녀의 사정을 (남자들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다.

그래도 그거 하나 때문에 이 책을 안 본다고 하나면, 로또에 당첨되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돈 달라고 할까 봐 로또를 사는 일조차 못하겠다고 말하는 거나 같다고 본다.

 

왜냐하면 두 번째 부분, 즉 마르탱(마크)의 이야기에서도 좋은 관점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 일반의인데, 집안에 임신중지를 한 여성도 있고, 또 대학 시절부터 여성 인권을 위한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에도 참여한 사람이다.

임신중지 시술도 여성들을 돕기 위해서 배운 것이고, 그 와중에 지혜로운 간호사 이본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다소 '나는 다 안다', '내가 너를 판단할 수 있다'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아 반성하고 여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렇게 한 남성이 여성의 권익을 위해 싸우며 여성이 판단을 직접 내릴 수 있도록 피임 정보를 제공하는 훌륭한 의사로 거듭나게 되는 이야기가 후반 그의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여성 개인의 이야기만 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보기 어려울 수 있는데,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임신중지 시술을 받은 다른 많은 여성들을 통해 이 부분도 보완이 된다. 

 

아무래도 만화이다 보니까 리디북스로 보면 하이라이트나 북마크를 설정할 수 없는 게 아쉽다. PDF 파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마음에 와 닿거나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많은 책일수록 이런 손쉬운 기능이 없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이 책이 그랬다. 

한번쯤 읽어 보기를 권한다. 굿!!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