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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류희주, <병명은 가족>

by Jaime Chung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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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류희주, <병명은 가족>

 

 

주로 가족과의 관계에서 유래한 정신병, 즉 알코올 의존, 거식증, 망상장애와 치매, 지적장애, 조현병, 공황장애, 사회공포와 우울, 신체증상장애를 다루고 있기에 제목이 잘 어울린다.

이 중에 마지막 신체증상장애는 저자의 이야기인데 딱히 가족과는 큰 관계가 없어서 이건 조금 제목에서 벗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흥미를 유발하게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 서적은 언제나 잘 팔리고 정신과 의사가 직접 쓴, 각종 정신병에 대한 논픽션도 인기가 있는 듯하다.

나도 정신과 의사가 자기 환자의 정체가 다 드러나게 실제 사례를 갖다 쓰는 게 아니라면야, 정신과적 지식을 나누기 위해 자신이 본 사례를 소개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드러난 저자의 태도가 약간 우려스럽다. 왜냐하면, 저자가 기자 출신 정신과 의사라 그런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딘가 센세이셔널한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알코올 의존에 등장하는, 박 씨 성을 가진 환자의 이야기를 그의 입장에서 (물론 상상해서) 쓴 부분을 보면 무슨 말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이 환자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원래 지방에서 잘 살던 집의 아들인데,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중국집을 하면서 돈도 꽤 만졌다는 사람이다. 

근처에 있는 술집 여사장과 가까워져 결혼까지 했는데, 그 여사장 김 여사에게는 영지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영지가 초등학생 때부터 영지의 엄마, 즉 김 여사와 박 씨는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 씨가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나서 술에 의존하는 일이 다시 잦아졌고, 어느 날 김 여사가 사라졌다. 박 씨는 김 여사를 찾아다니다가 술에 취했다는 얘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영지처럼 보였다. 여학생에게 주스를 사준다고 하자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수중에 돈은 당연히 없었다.

집에 들어와 자고 있는 영지의 옆얼굴을 보니 김 여사와 똑같아 보였다. 박이 영지를 만지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영지가 소리를 질렀다. 남들처럼 살고 싶었던 박의 인생 2막이 끝나고, 경찰서에서 3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죄목은 다섯 가지였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꾀죄죄하고 초라했다.

그는 그날 사기, 폭행, 공무집행방해, 음주운전, 미성년자 성추행 미수, 이렇게 총 다섯 개의 죄목을 달았단다.

범죄자에게 '애 엄마가 생각나서' 운운하는 사연은 도대체 왜 부여하는 것인가?

아무렴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애 엄마가 생각나서 그리운 마음에 애 얼굴 한번 쓸어 보려고 했는데 애가 과민반응을 해서 미성년자 성추행 미수라는 타이틀을 달게 됐을까?

도대체 왜 이런 범죄자에게 관대한 태도로 그의 인생이 얼마나 기구한지를 보여 주는지를 모르겠다. 범죄자가 아닌 일반 환자들이야 아무래도 괜찮지만, 이건 좀 도를 넘었다고 본다.

 

쓸데없이 너무 감상적이고 범죄자를 불쌍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난 불만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죄목으로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한 뒤 박은 술에 빠져 살았고, 공사장 인부 일을 하다가 쓰러져 정신과 병원에서 깨어난다.

생각이 복잡해질 무렵 간호사가 불렀다.

"면담실로 오세요. 보호자 오셨어요."

그사이 영지는 아가씨가 다 되어 있었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는 화장을 받아 더 예뻐 보였다. 박은 김 여사의 안부부터 물었다.

"정말 몰랐구나, 아저씨는."

영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다시 아저씨였다. 영지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엄마 죽었어. 아저씨한테 부담 주기 싫다고 이혼할 거라고 하더니 진짜가 돼버렸어. 집 나갈 때 이미 얼마 안 남은 상태였어. 집 나간 것도 자기 치료 때문에 아저씨랑 나한테 부담될까 봐 그런 거였고. 평생 술만 마신 여자 간이 멀쩡하겠어? 중국 가서 간이식 받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사기당하고. 감옥에 있는 아저씨 마음 정리하라고 이혼한 거야."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구나. 박은 그날 김 여사의 얼굴이 유난히 하얬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놈이 생겨서 그런 줄 알고 얼마나 질투를 했었던지. 난 이렇게 끝까지 못난 사람이구나. 자괴감에 박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바로 술 생각이 났다.

 

물론 이게 있는 그대로의 실제 사례가 아니라는 건 안다. 환자의 신원 보호를 위해 가명을 쓰고 사연을 각색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건, 사연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위험하다는 거다. 이건 마치 성폭행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소설처럼 (상상해서) 낱낱이 써제끼는 기사 같다.

저자는 정신과 의사니까, 한 정신적 질환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조로 증세가 악화되거나 발전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상담할 때는 편견 없는 태도로 환자를 대하는 것도 맞는다.

하지만 대중 보고 읽으라고 내놓은 책에 이렇게 싸구려 인터넷 기사 같은 글, 범죄자의 입장에서 범죄자를 불쌍하고 연민하는 태도로 범죄자를 옹호하는 글을 싣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왜 내 돈 주고 산 책에서 범죄자도 다 불행한 과거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리 따위나 읽고 있어야 하나?

범죄자의 사례인 만큼, 더욱더 주의를 기울여서 최대한 드라이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이 사실만을(각색한 사연에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쓰는 게 지혜로운 행동이라 본다.

 

요약하자면, 책에서 소개하는 사례 자체는 흥미롭고 다소 어색한 대화체("아무도 실제로 저렇게 말 안 할 텐데" 싶은, 문어체에 가까운 말투)도 그냥 넘길 수 있지만, 클릭 유발을 위한 센세이셔널한 인터넷 기사 같은 태도로 (범죄자) 환자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묘사한 건 불쾌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책에서 소개되는 사례가 전부 범죄자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총 여덟 개 사례 중 두 개만이 범죄자 이야기이다.

이 점 참고하시고 괜찮다, 적당히 흐린 눈을 하면서 볼 수 있겠다 하시면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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