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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마크 포사이스,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by Jaime Chung 2021.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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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마크 포사이스,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제목 그대로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인 저자가 각 단어에 관한 재미있는 어원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걸까 싶고 너무 신기하다. 나름대로 영어 공부 좀 하고 전공까지 한 나도 몰랐던 게 참 많다.

일단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저자의 덕후스러움과 재미있는 말재주를 (번역도 잘됐다) 볼 수 있다.

대략 친구에게 비스킷의 어원(프랑스어로 '두 번 구웠다'라는 뜻의 'bi-cuit'에서 왔다)을 설명해 주다가 바이섹슈얼, 마조히즘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하는 흐름으로 이어졌고, 마조히즘이 자허마조흐라는 소설가 이름을 따서 만든 걸 알았느냐고 물었다는 맥락이다.

친구는 자허마조흐라는 사람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고, 지금 자기 소원은 비스킷 좀 마음 편히 먹는 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저는 발동이 걸렸고, 물꼬가 터졌으니까요. 소설가 이름을 딴 단어는 그 밖에도 많다고 알려 줬습니다. Kafkaesque카프카적인, 부조리한도 있고 Retifism레티피즘, 신발 성애도 있고...

바로 그때 친구가 문을 향해 냅다 뛰었습니다. 하지만 순순히 보내줄 제가 아니지요. 이미 말릴 수 없는 상태였기에 단어 이야기를 끝도 없이 이어갔습니다. 단어 이야기에 원래 끝이란 없으니까요. 단어에서 단어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항상 있습니다.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단어 사이에도 숨은 고리가 있지요. 그래서 그 친구는 두어 시간 후에야 겨우 창문을 통해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제가 Philip이라는 이름과 hippotamus하마의 관계를 막 설명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틈을 타서 도망갔더군요.

이런 일이 거듭되자 어느 날 제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진지하게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수용해 치료하는 건 형편상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어쩔 수 없이 출판업계에 도움의 손길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출판업계가 사회복지의 구멍은 메워 온 역사는 꽤 길지요.

 

이 책에서 알게 된 어원 중 제일 재밌었던 것을 몇 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라틴어로 소시지를 botulus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유래한 영어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botuliform으로 '소시지 모양의'라는 뜻입니다. 이래 봬도 꽤 쓸모 있는 단어랍니다. 나머지 하나는 botulism입니다.

(...)

19세기 독일에 유스티누스 케르너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케르너는 시인이자 의사였는데, 상당히 음울한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가 남긴 의학적 업적은 지금까지 인정받고 있습니다. 케르너는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신종 질병의 원인을 밝혀냈습니다. 걸리면 전신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결국 심장이 멎고 마는 끔찍한 병이었습니다. 케르너가 이 병으로 죽은 환자들을 조사해 보니 모두 죽기 전에 싸구려 소시지를 먹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케르너는 이 병의 이름을 '소시지 병'이라는 뜻으로 botulism보툴리눔 중독증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상한 소시지에 독소가 들어 있었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그 속도를 botulinum toxin보툴리눔 독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점에서 ciao와 정반대되는 인사말로 Hey, man이 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미국에서는 노예 제도가 '자유의 땅'이라는 이상과 잘 맞지 않는다는 걸 남북전쟁을 거쳐 모두가 확실히 깨닫기 전까지는, 노예 주인이 자기 노예를 'boy'라고 불렀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로 노예는 해방되고 명연설은 역사에 남았지만, 사회경제적 대책이나 언어 개선책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노예 소유는 금지되었지만, 과거 노예 소유주들은 흑인들을 계속 못되게 대하고 예전처럼 'boy'라고 불러서 흑인들의 신경을 긁었습니다.

미국 어디에서나 거만한 백인들이 흑인 남자들을 "Hey, boy"라고 부르니 흑인들은 속을 끓일 수밖에요.

그러다가 1940년대에 들어 흑인들이 저항 방식을 바꾸어 서로 "Hey, man"이라고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man'을 붙인 것은 상대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라 무수한 세월 'boy'라고 불린 데 대한 반항이었지요.

그러자 효과가 있었습니다. 백인들은 흑인들의 이 "Hey, man"이라는 인사가 처음엔 알쏭달쏭했습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이르러서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누구나 서로 'm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man'은 일상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런 게 진보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버넌 제독의 영향을 받은 이름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제독은 바다에 풍랑이 높게 일면 grogram그로그럼이라는 거친 천으로 만든 두꺼운 외투를 항상 입었다고 합니다(grogram은 프랑스어로 '거친 결'을 뜻했던 gros graine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은 그의 별명을 Old Grog라고 붙였습니다.

영국 수병들은 럼주를 매일 일정량 지급받아 마셨습니다. 1740년, 포르토벨로 승전을 이끈 버넌 제독은 기강 해이를 막기 위해 럼주에 물을 타 희석하라고 명했습니다. 희석된 럼주는 버넌의 별명을 따서 grog그로그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그 희석 비율은 영국 해군에서 표준으로 지정되기에 이릅니다.

groggy라는 형용사는 grog를 너무 많이 마신 상태, 즉 술에 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말은 차츰 숙취(hangover)를 힘들어하는 상태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groggy의 예처럼 어떻게 단어가 생겨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변화하는지 그 과정을 알게 되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저자가 재미있게 잘 풀어내서 그런 듯. 그냥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어원을 찾아 나가는데 뭔가 추리 소설을 읽는 듯, 딱딱 맞아떨어지는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아니면 영어 공부를 위해서, 가볍게 영어를 접하면서 영어에 흥미를 붙이고 싶은 사람이 읽어도 좋겠다.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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