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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by Jaime Chung 2022.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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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문유석 전(前) 판사/현 작가가 생각하는 '법' 또는 '법치주의'를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저자는 '법'을 "사람들 사이의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선()'인 동시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의 선(善)'이기도 하다"라고 해석한다.

 

살면서 일상에서 법에 대해 깊이 생각할 일은 ('이건 불공평해!'라고 생각할 때 이외에) 별로 없을 텐데, 이 책은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의외로, 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감동적이고 찡한 순간들도 있다. 예컨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현실에 대한 회의를 잠시 접어두고 우선 헌법에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보자. 헌법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은 거의 비슷하다. '인격성 내지 인격 주체성' '인격의 내용을 이루는 윤리적 가치' '인간의 인격과 평가' '독자적 인격체로서 그의 인격을 근거로 지니는 고유한 가치' 등이다. 무슨 소리인지 와닿는 것이 있나? 짜증이 나더라도 인격자답게 참기 바란다. 교과서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다. 좀더 풀어 설명하면, 인간은 이성에 바탕을 준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얘기다. 이성﹒자율성﹒윤리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이해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들기는 한다. 무슨 성인군자만 존엄한 인간이라는 소리야? 도덕 교과서 같은 고리타분한 얘기인 것 같은데? 

(...)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이성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랏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

 

그리고 나는 저자가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에서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지적하는 것도 속 시원하고 좋았다.

원래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타자에 의한 간섭, 구속만 없으면 자기가 알아서 이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간섭의 부재'를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입장의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물적 조건의 분배'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유의 개념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강조되어야 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은 특별할 것이 없다.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 개념으로 충분하다. '모두가 자유를 누리려면 간섭의 배제만으로는 부족하고 국가의 개입도 필요하며 생존권(사회권)과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라고 정리하면 족하지 않을까.

(...)

원래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물건치고 변질되지 않는 것은 없기 마련이다. '자유'같이 보편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오리지널 브랜드가 있는데, 여기에 불만이 있고 다른 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들이 흔히 취하는 전략이 네이밍이다. 기존의 인기 있는 개념을 끌어다 쓰고 그 앞에 '진정한' 또는 '새로운'을 붙이는 것이다. '자유'에는 수식어가 필요 없다. 자유는 때로 편협하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이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평등, 존엄성, 공존 등 다른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보완해야지 자유를 재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자유란 백지 같아서 다른 것을 덧칠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역시 재미있다는 것이다. 문유석 작가의 글을 읽어 보았다면 이미 알겠지만, 어려운 주제도 쉽게, 재미있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는 분이니까.

예컨대, 이 책 첫머리에 저자는 책 제목으로 생각해 본 후보들의 목록을 공개한다.

다음은 책의 제목으로 생각해봤던 후보들의 긴 리스트다.

나를 지키는 법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법블레스유
법은 도대체 왜?
공정하기라도 했으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각자도생 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을 위한 공존

…심지어 '알쓸신법'도 생각해봤고,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교도소 구내 음악으로 늘 나오던 노래에 영감을 받은 '법은 어렵지 않아요'도 있었으며, 이왕 이리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맘으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법을 공부할 용기를 낼 권리의 온도'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법을 공부할 용기를 낼 권리의 온도'라니, 잘나간 책들 제목은 다 짬뽕하시려 했군요! 여기에서 난 무장해제가 되었고, 당장 이 책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머 감각을 좋아하고 법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시간을 갖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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