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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이지수, <읽는 사이>

by Jaime Chung 2022.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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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구달, 이지수, <읽는 사이>

 

 

한 권의 교환 일기 같은 책.

같은 출판사에서 동기로 일하던 구달 작가와 이지수 번역가는 퇴사 후에도 우정을 이어 왔는데, 이지수 번역가가 먼저 3주씩 번갈아 가며 책을 상대에게 추천해 주고, 상대는 그 책을 읽으며, 책과 동시에 내려진 지령을 완수한 후 후기를 쓰기로 제안한다.

구달 작가도 이를 받아들여 서로 10권의 책(과 후기)을 교환한다.

두 저자들이 서로를 어찌나 끔찍하게 여기고 사랑하는지, 읽으면서 마음이 참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졌다.

여고생들이 꺄르르꺄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풍경을 멀리서 흐뭇하게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구달 작가의 신간 알림을 해 놓고 있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이지수 번역가의 글도 재미있게 읽었다.

읽을 만한 책 추천은 내가 언제나 반기는 것이기도 하고.

 

이지수 번역가는 친한 벗 구달 작가에게 쓰는 프롤로그에 이렇게 썼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매일 얼굴을 보던 때처럼 일상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어쩌면 지금도 서로의 원을 넓혀줄 순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매개로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책이지 않을까.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비슷하지만 책 취향은 꽤나 다른 우리니까 말이야. 너와 내가 서로에게 책을 권하고 그것에 대한 감상을 문장으로 옮겨보기. 이건 무엇보다 나를 위한 작업이기도 했어. 사실 난 요즘 읽고 보고 듣는 것 모두가 모래처럼 형체를 남기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거든. 남들은 친구들과, 가족들과 여행을 와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함께 감상을 나누는데 나만 혼자 아무도 없는 폭포에 대고 이것 참 멋지네, 근사하네, 생각하다가 종국에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조차 까먹고 마는 그런 느낌. 특히 유하를 재운 뒤 밤늦게 홀로 소파에 누워 읽는 책은, 아무리 나를 뒤흔들 만큼 좋았다 해도 그 감상이 내 세계 안에서만 갇혀 있다 사라지곤 했어. 언어로 옮겨두지 않은 독후감은 그렇게 흔적 없이 휘발되더라. 요컨대 서로가 권하는 책으로 원을 확장한다면, 그 확장된 원을 언어로 단단히 고정해두자는 욕심을 내본 거지.

네가 여기까지만 응해줘도 충분히 좋았겠지만, 너는 한술 더 떠 우리의 독서 교환일기에 '행동'을 추가하자고 제안했어. 가령 문신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책을 읽으면 직접 몸에 문신을 새겨보고, 천체 관련 책을 읽으면 별을 보러 떠나는 식의 행동들. 과연 단행본 기획자의 '짬바'는 회사를 그만둬도 사라지지 않더구나. 그런데 진중한 러시아문학 덕후인 너에게 "손발 오그라드는 일본 연애소설 추천해야지!"라고 헀더니 "그럼 난 <전쟁과 평화>(문학동네판 기준 전 4권, 총 2,412쪽) 읽으라고 할 거야!"라고 응수해서 우리의 교환일기는 시작도 전에 종료될 뻔했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고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넓힐 수 있다니, 너무너무 멋진 일 아닌가.

나도 내 절친이랑 이런 거 하고 싶다... 혐생 때문에 바빠서 둘 다 시간 맞추기가 어렵겠지만ㅜㅜ...

그래도 서로의 관심사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고, 그러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해 재미를 붙이면 내 세상을 더 넓히는 데 쓸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이래서 사람들이 독서 모임을 하는가 보다...

 

두 저자가 서로 추천해 주고 읽은 책들 후기를 하나씩 살펴보자.

일단 구달 작가는, 이지수 번역가가 추천해 준 <작은 아씨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느꼈단다(참고로 이지수 번역가가 내 준 미션은 이 영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 영화를 보라는 것).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교회 설교 톤의 대사가 적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지루한 대목이었다.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할 때조차 아버지를 "가장이자 집안의 양심이요, 닻이자 위안을 주는 존재"(484쪽)라며 치켜세우는 문장은 가부장제 PPL인가 싶을 정도로 어색해서 독서의 흐름을 깼다. 분명 <작은 아씨들>은 어머니, 하녀 해나, 네 명의 딸로 이루어진 여성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소설인데, 이 특별한 설정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뻗어 나온다는 점이 포인트인데, 굳이 아버지를 구심점으로 하는 가족 중심주의를 끼워 넣는다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160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불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책장을 덮고 싶어 움찔대는 손을 잘 달래서 합장하듯 모아 흔들며 태평양 방향을 향해 빌었다. 그레타 거윅 감독님, 부디 영화에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종군목사 아버지 분량을 대폭 줄여주소서. 보수적인 시선을 걷어내주소서.

(...) 그레타 거윅의 천재적인 연출에 관해서라면, <작은 아씨들>이 2020년 한 해 동안 각종 영화제에서 쓸어 담은 트로피로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으니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가장 놀라운 건 다름 아닌 나 자신, 즉 합장 기도의 효험이었다. 원작 소설을 읽으며 걷어내주십사 빌었던 장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각색되어 있는 게 아닌가. 소설 말미에 조가 대고모의 유산으로 설립한 학교를 "가르침과 보살핌과 배려가 필요한 소년들에게 집처럼 행복한 곳"(962쪽)이라고 묘사한 문장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그 한 줄을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가 한데 어울리는 장면으로 표현했다. 비혼주의자로 그려진 조가 결혼을 선택하는 결말은 그대로였지만, 조가 작가로서 출판사 편집자와 출간 협상을 하면서 판권과 인세라는 실속을 챙기는 대신 소설 속 주인공을 결혼시키는 데 동의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결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것ㅅ이다. 심지어 설치류 공포증을 이기지 못하고 '조의 반려 생쥐 스크래블만은 캐스팅하지 말아줘요' 하고 빈 소원마저 이루어졌다. 종교가 없는 자의 기도발이 이렇게 좋아도 괜찮을까요…가 아니라 감독이 각색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현대에 맞지 않는 설정이나 표현을 (내가 경망스럽게 빌었듯이) 싹 다 걷어내는 대신, 원작자가 담고자 했던 메시지에 집중하여 그것이 21세기 관객들에게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도록 장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가다듬은 듯했다.

100% 공감! 역시 내 취향 작가님다워!

 

구달 작가는 도스토옙스키를 최애 작가로 여겨서, E.H. 카(여러분이 아시는 역사학자 그분 맞다)가 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을 추천했다.

"누구와도 이 덕심을 나눌 수 없어서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뭐야"라며, 이 책 또는 그의 삶에 대한 그래픽노블 평전을 읽고 "나랑 딱 한 시간만 덕질 토크 해주라."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지수 번역가는 그 책을 읽느라 고생 좀 하신 듯하다.

E.H. 카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이 평론은 어조상으로는 도전적이지만 그러나 그 통렬함은 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아직은 우정이 무시되고 거부되고 있지만 장차 친구가 될 사람의 통렬함이었다"(108쪽)와 같은 문장의 향연으로 나를 자비 없이 괴롭혔다.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책을 도중에 집어던진 뒤, 이런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한 양 구달이 함께 빌려준 만화 전기 <도스토옙스키 — 대문호의 삶과 작품>을 꺼내 왔다. 이 만화책을 핥듯이 읽었더니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라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두 번의 결혼 생활과 그 이후의 인생은 어떠했는지 대충 파악이 됐다(실은 이 만화책에서도 그의 작품과 인생이 너무나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었던 탓에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음을 고백한다).

아무렴, 쉽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평전인데... 나도 쉽게 읽을 엄두를 못 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찌어찌 평전을 끝낸 후, 이지수 번역가는 이렇게 썼다.

글의 품격이 작가를 앞서간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위대하지 않은 인간도 위대한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걸핏하면 화를 내는 다혈질에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한 인간이 채권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1800년대에 쓴 글들이 백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확인하려면 도스토옙스키의 아무 책이나 펼쳐서 몇 쇄를 찍었는지 확인해보시라).

위대하지 않은 인간도 위대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고결하지 않은 인간의 글도 고결할 수 있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희망은 없을 것이다. 다음 번역 마감이 끝난 뒤에는 <악령>에 도전해볼까 한다. 러시아식 이름을 읽는 고통쯤이야 각오한 바다.

 

이후로도 구달 작가는 이지수 번역가의 추천으로 <김이나의 작사법>, <식물의 책>, <가장 사소한 구원>을 읽었고, 이지수 번역가는 구달 작가의 추천으로 <굶어 죽지 않으면 다행인>, <캐롤 한/영 각본집>, <나라 잃은 백성처럼 마신 다음 날에는> 등을 읽었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 중 몇 권은 나도 읽은 거라 너무 신기했다 ㅎㅎㅎ

이 두 분 덕분에 내 원도 조금은 커진 느낌. 구달 작가의 재미있는 글솜씨는 기본에, 이지수 번역가 글도 귀엽다.

읽을 만한 책이 뭐가 있을지 추천받고 싶으신 분들도 한번 보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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