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수정,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쇼츠 영상을 유튜브에서 봤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이어터들에게 잘 알려진 필라테스 강사이자 유튜브 인플루언서인 캐시 호(Cassey Ho)가 디자인한 곱창 밴드(scrunch) 영상이었다.
보통 곱창 밴드처럼 보이는 이 머리끈에는 지퍼가 달려 있어서, 지퍼를 여닫고 그 안에 립밤이라든지 동전 같은 작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간단하지만 기발해 보이는 이 곱창을 소개하는 쇼츠에 달린 몇몇 댓글들이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것들.
여성의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게 하루이틀도 아니어서, 이제 여자들은 '직접' 이렇게 주머니를 만들어 쓴다.
애초에 옷에 주머니가 많이 잘 달려 있었으면 귀찮게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도대체 왜 여자 옷에는 주머니가 없을까?
새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몸통 쪽으로 손을 쭉 내렸는데 주머니가 가짜 주머니라 속에 손을 넣을 수 없어 자연스럽게 손이 허리를 따라 그냥 주욱 내려갈 때, 나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 옷은 안 사고 말지! 특히 재킷처럼 겉옷에 주머니가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불편함을 많이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의 바지를 우연히 입게 됐는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안 입은 것처럼 편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여성복과 남성복 샘플을 모아 비교해 본 결과, 둘의 결정적 차이를 찾아냈다.
남성복은 착용자가 '활동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여유분이 항상 많다. 반면에 여성복은 활동성보다는 보이는 '라인'에 초점을 두고 제작된다.
그래서 여성복에는 주머니도 별로 없고, 있어도 가짜 주머니가 많은 것이다(타도하자, 가짜 주머니!!).
기존의 '라인'에 초점을 둔 여성복을 파는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던 저자는, 이 일로 '남성복의 장점은 그대로 가져가고 여성의 몸에 맞게 줄여서 제작'하는 여성복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해 남성복의 패턴을 수정한 뒤, 남성복 공장에 가져가 제작을 요청했다. 며칠 후 샘플로 제작된 바지를 입어 보고 감탄한다. 다섯 걸음에 한 번씩 '내가 바지 입은 거 맞지?' 하고 확인할 정도로, 마치 안 입은 듯 편해서.
이렇게 획기적인 바지를 자신의 기존 쇼핑몰에서 팔려고 하니, 앞에서 말했듯 '라인'에 초점을 둔 여성복을 파는 쇼핑몰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소위 '코르셋' 같은 옷으로 가득한 쇼핑몰에서, 여성의 활동성과 편리함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만든 바지를 파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아예 새로운 쇼핑몰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여성들이 '코르셋'이 아닌, 질도 좋고 편안한 옷을 입을 수 있게 하자!
"여성복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은, 여성복이 얼마나 불편하고 비실용적이며, 무엇보다 착용자인 여성들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지는지를 나타낸다.
여성복은 아직도 뒷여밈(등 쪽에 지퍼가 달려 있는 식으로)이 많고, 실루엣을 강조하며, 실용성이 낮다.
면접이나 직장에서 입을 법한 정장 재킷도, 여성복이라면 안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안주머니만 없으면 다행인가, 옆구리에 달려 있는 주머니도 그나마 구색만 갖추고 실질적으로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 수 없게 꿰매진 '가짜 주머니'인 경우도 있다(진짜 개싫다 미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여성복 주머니는 남성복 주머니보다 깊이가 훨씬 얕거나 립스틱이 겨우 들어갈 만한 실용성 없는 사이즈다. 이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나는 남성복 주머니 깊이부터 따져봤다. 조사 결과, 캐주얼 바지에 들어가는 주머니는 평균 길이가 15cm 이상이었다. 바지통이 여유 있는 바지는 주머니가 더 깊어서 생수까지 쑥 들어갈 정도였는데, 생수가 들어가는 사이즈를 장점으로 광고하는 15만 원짜리 핸드백과 너무나 비교가 됐다. 남성복은 상하의 모두 가격대 상관없이 주머니가 매우 깊었고, 개수 역시 많았다. 남성용 핸드백이 왜 발달이 안 됐는지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리고 또 여성복은 전반적으로 남성복보다 질이 낮다. 비싼 브랜드 옷이라도, 같은 브랜드의, 또는 비슷한 가격대의 남성복보다 원단이 좋지 않거나, 견뢰도(굳고 튼튼한 정도)가 낮거나, 세탁 및 보관이 불리한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하나가 '워싱'이다.
(...) 나는 그때까지 워싱이 데님 제품에만 들어가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거래처 말로는 남성복 대부분에 '워싱'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여성복을 팔 때 데님을 제외하고 워싱이 들어간 옷을 본 적이 있었는지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에 없었다.
워싱이란, 세탁 시 축률(섬유나 실이 물에 젖었을 때 오그라들거나 줄어드는 비율. 수축률)과 이염(염색약이 빠지면서 다른 곳으로 번지거나 배어드는 현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단에 입히는 후가공이다. 워싱의 종류는 용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주로 옷에 사용되는 워싱 종류는 텐타(원단을 고정한 뒤 고온으로 건조하여 원단의 형태를 단단하게 잡아주는 작업. 텐타 가공을 할 경우 세탁 후 허리선이 돌아가거나 옷이 뒤틀리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 바이오(원단 표면의 보풀이나 잔털을 제거하여 표면을 깔끔하게 하고 부드러운 터치감을 주는 가공법), 덤블(세탁기에 돌리는 것과 비슷한 가공법. 덤블 워싱을 할 경우 원단이 미리 열과 수분에 내성을 갖기 때문에 완성된 의류를 세탁기로 빨아도 수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 등이 있다.
특히 워싱 가공은 천연 소재인 코튼과 리넨에 많이 사용하는데, 이 소재는 워싱을 하지 않으면 세탁 시 원단이 줄거나 이염되기 때문에 반드시 워싱 가공을 해야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 사실을 남성복을 판매하면서 알게 됐다. 남성복 거래처에 워싱이 된 옷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전부 워싱 가공이 된 옷들이었고, 워싱 처리가 안 된 것들은 줄어드는 성질이 없어서 워싱이 불필요한 소재로 만들어진 옷들뿐이었다.
처음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급히 남성복 상하의 50여 벌을 구해 세탁기에 넣고 돌린 후 건조된 옷들의 세탁 전후 축률을 측정해 봤다. 실험에 사용된 남성복 가격대는 5,000원부터 3만 원까지 다양했는데, 생지(가공을 하지 않은 원형의 원단) 원단을 사용한 제품군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축과 이염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5,000원짜리 저렴한 옷에는 워싱이 안 들어갔을 거라고 애써 위안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여성복에서 워싱이 들어간 옷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남성복에서는 워싱이 안 들어간 옷을 찾기가 힘들었다.
코튼보다 수축이 심하고 관리하기 까다로운 원단이 레이온인데, 촉감이 부드러워 여성복에선 셔츠나 로브처럼 찰랑거리는 의류에 많이 사용된다. 여성복을 판매했던 경험으론, 레이온은 '소재 특성상' 드라이클리닝이 필수였다. 그런데 남성복엣는 워싱 가공을 해 수축 걱정 없이 물세탁을 할 수 있는 레이온이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뭐랄까? 마치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남성복 시장에서는 보편화딘 워싱이 여성복 시장에서는 잘 알려지지조차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여성들이 이렇게 사소하디 사소한 옷들로도 차별을 받고 있구나(왜냐하면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여성복에는 실용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하면서 억울하고 화가 났는데, 더 화가 나는 건 이거다.
여성복에 워싱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워싱 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것도 아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티셔츠 기준으로 워싱 비용은 벌당 평균 500원(2020년 기준) 정도밖에 들지 않는다."
고작 500원이 아까워서 워싱을 생략한다고? 얼척이 없지만 저자는 이것이 여성복 보세 시장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대문 도매 시장의 임대료가 비싸서, 이들이 이익을 내려면 옷에서 마진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바로 띄는 판매가를 높이느니 차라리 저렴한 원단을 쓰고, 워싱 같은 후가공을 빼고, 봉제를 간소화하고, 안감을 빼는 등 (안감을 넣으면 공임이 두 배로 올라가니까) 옷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옷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면서 같은 가격을 받는다면 마진은 높아질 것이고, (이것은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그렇게 부실한 과정을 통해 대충 만들어진 옷은 또 금세 못 입게 될 테니 또 다시 새옷을 사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미래의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
패션 업계는 언제나 늘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려 하고 또 그 유행에 사람들을 동조시키려 안달이니까, 옷의 수명이 길지 않아도 어차피 그네들이야 알 게 뭔가 싶을 거다.
이제 내가 패션 업계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여성복을 대충 만든다는 것!
위에서 인용한 '워싱' 용법 사용 여부 이외에도, 원단과 봉제 면에서도 여성복은 남성복보다 '저렴'하고 '대충' 만들어진다.
이것까지 또 이야기하자면 한 세월이 걸릴 테니 이 리뷰에서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어차피 책 내용을 여가에서 다 소개할 수도 없는 거니까.
읽다 보면 저자가 운영하는 '젠더리스' 브랜드 옷을 한번 입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한국에 없어서 이렇게 안타까운 적이 또 있었던가.
그냥 디자인만 남자 옷이랑 비슷한 거 말고, 진짜로 제대로, 질 좋게 잘 만든 '젠더리스' 옷을 나도 입어 보고 싶다. 나중에 한국 가면 한번 구경이라도 해야지(오프라인 매장을 열 계획도 있다고 하길래).
여성은 사회적인 차별뿐 아니라 의류적으로도 차별을 받는구나, 사회적 제도와 문화가 옷에도 영향을 끼치는구나 알게 해 주는 등, 정말 내 눈을 뜨게해 준 책이다.
나는 리디북스에서 90일 대여로 봤는데, 둘 다 이북 형태가 PDF인 건 알라딘도 마찬가지더라.
중간중간 사진이 좀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내가 밑줄 치고 싶은 부분을 밑줄 칠 수도 없고, 페이지에 북마킹도 못 하니 불편해서 아쉬웠다.
사진 몇 쪽 들어갔다고 책 전체를 PDF로 해야 하나? 표가 들어간 다른 이북은 그냥 이펍 파일로 다운되는 경우도 많이 봤는데.
어쨌거나 이건 저자의 잘못이나 책임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냥 종이책으로 본다면 문제는 되지 않을 거다.
이북 형태가 어떻든 간에, 진짜 많은 이들이 읽고 공감하며 담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책이다. 정말 굿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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