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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다정소감>

by Jaime Chung 2022.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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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다정소감>

 

 

병아리처럼 샛노란 책 표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책 제목인 '다정소감'은 '다정다감'이라는 표현을 살짝 비튼 것이다. 저자가 살면서 만난 수많은 '다정(함)'의 패턴에 대한 소감을 엮은 책이라는 뜻이다.

 

우리 김혼비 작가님은 표현력도 남다르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친구와 공유했던 표현 세 가지만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너무 화가 나서) 손이 진동 딜도처럼 떨"린다,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련회에서 으레 하는 촛불 의식에 대해) '자기반성과 부모님의 은혜'를 주제로 아이들을 울리고 말겠다고 작정한 가차 없는 신파언어차력쇼"까지.

역시 축구를 하시는 분이라 혀 드리블도 기가 막히시다.

 

첫 번째로 나오는 꼭지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는 오만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가 프랑스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러 갔을 때 한 (한국인) 중년 관광객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못마땅하게 본 어떤 '개탄맨'이 후에 블로그에 그들을 싸잡아 '예술을 이해할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치들'로 매도해 버렸다.

그런데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저자가 보기에 그 중년 관광객들은 다른 관광객들보다 딱히 더 시끄러운 것도 아니고, 자신들 나름대로 에술에 관심을 보이고 이해했다.

결국, 그 '개탄맨' 눈에 보기에 그들이 "'예술에 조예가 있고 즐길 줄 아는 나'의 쾌적한 관람에 그렇지 못한(그냥 그럴 거라 그가 멋대로 에상하는) 사람들이 혼잡을 빚어 못마땅했던" 것뿐이다.

중년, 단체, 패키지여행,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빚어내는 어떤 편견. '여행부심'과 '예술부심'이 이중으로 빚어내는 어떤 오만. 거기에는 후세대에 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생활 밀착적으로 관람하는 문화를 경험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예술에 관심을 갖고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가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며, 지금처럼 여행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여행을 가기까지 거쳐야 하는 복잡한 절차들이 쌓은 심리적 장벽을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넘어보려는 세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중년 안에서도 경험치와 감수성이 천차만별일 거라는 고려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미술관에 가는 건 '경험'을 쌓는 걸로 봐주지만, 그래서 당장은 지루해하고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해도 그런 경험들 끝에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려주지만 5, 60대 중년이, 이제 와서, 떼를 지어,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는 건, 단지 패키지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으니 별 생각 없이, 유명하다고 하니까, 그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싶어서, 라고 쉽게 단정 지었다. 그들에게는 쌓을 '경험'도 미래의 '무언가'도 없을 거라는 듯이.

사실 요즘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인내심 가지고 '경험'을 쌓을 수 있게 기다려 주는 것 같진 않지만, 여튼 이 '개탄맨'이 이 중년의 여행객들은 여행도, 예술도 모르는 무식자일 거라고 단정 짓는 오만함을 부리고 있었던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묶음 속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벼르고 별렀던 해외여행이라는 커다란 감격이 있었고, 그 유명하다는 <모나리자>를 직접 눈으로 본 흥분이 있었고, <모나리자>에서 누구네 딸내미를 떠올리며 터뜨린 공유된 폭소도 있었다. <모나리자>가 별로였다는, 어떤 시작이 될는지도 모를 작은 취향이 비로소 만들어진 근사한 순간도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에 관해 미리 공부해 와서 친구들에게 조용조용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이름도 종류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예쁜 꽃' 앞에서 찍은 내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꽃의 이름을 설명해주는 '꽃박사'도 있었고, 그 꽃박사는 "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예쁘다고 사진이나 한 장 박고 가는 게 전부"라며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의 매 순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들도 나도.

 

또 내가 너무너무 좋았던 꼭지 하나만 더 소개해 보자면, 단연코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꼽고 싶다.

저자는 한때 승무원으로 일했는데, 승무원으로서 첫 비행이 무척 걱정되었다고 한다.

첫 비행은 신입에게 특히 엄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특히 손톱 색깔, 화장과 머리(저자 말마따나 '그냥 말끔하게 올려 묶기만 해서는 안 되'고 '가르마를 타서 그놈의 '볼륨'을 주'고 '흐트러짐 없을 정도로 단단히 고정해야' 하는 그 승무원 머리) 등 매무새도 지적한다고 했다.

그런데 저자는 화장도 화장이지만 올림 머리를 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단다. 안전 교육, 실기시험 등은 늘 잘해내던 '에이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승무원'의 모습으로 출근'해야 하는 서비스 교육이 시작되자 기수 최고의 문제아로 전락'해 버릴 정도로.

그래서 저자는 첫 비행 때 완벽한 승무원의 모습으로 출근하기 위해 준비를 하려 일찍 일어나려 했는데, 전날 무척 긴장한 채로 공부를 하느라 늦게 잠이 들었고, 원래 일어나야 할 새벽 3시를 넘겨 새벽 4시에 일어나 버렸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는데 잘되지 않았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그때 동기 네 명이 집에 찾아왔다고!

그리고 요정 대모처럼 각자 빗, 브러시, 핀과 스프레이, 헤어드라이어 등으로 저자를 '변신'시켜 주었다. 기수 최고 문제아가 걱정되어 알람을 맞추고 일찍 일어나 그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덕분에 저자는 완벽한 모습으로 무사히 첫 비행을 했고,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 없었다고 한다. 혼나지도 않고, 지적받지도 않고. 동기들의 도움과 따뜻한 마음이 일으킨 기적 아닐까.

세상에... 이렇게 글로 읽는 나도 너무 감동받았는데 본인은 얼마나 고마웠을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망했다는 생각에 손마저 얼어붙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어디선가갑자기 나타나는 손들 같은 것. 그 손들이 누군가를 필요한 형태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 등 뒤로 따뜻한 눈빛들을 가득 품고 살짝 펴보는 어깨 같은 것. 누군가 박살 날까 봐 걱정될 때 가만있지 못하는 것. 첫 비행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시험 비행이었던 날을 이렇게 넘긴 며칠 후, 두 번째 비행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첫 비행이었던 날에도 옆집에 살았고 훗날 나의 베프이자 룸메이트가 된 J가 새벽부터 찾아와 머리를 정성껏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무사히 넘기지 못했을 날들. 내 생애 가장 '여초' 회사였던 비행기 안에서 여자들끼리 익히고 배우고 나눴던 감각.

요즘은 비행기를 볼 때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다른 여자들의 손을 빌리고 또 손이 되어주면서 우리가 계속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에 대해. 떠나간 여자들 뒤에 남은 이들은 어쨌거나 어디로든 계속 날아가야 하고, 서로의 비행을 응원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힘에 부쳐 주저앉아버린 순간에 문득 펼쳐볼 수 있는 다정한 기억들을 서로의 마음에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비행기를 보면서 다정을 다짐했다.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집이어서 다행이다.

정말 너무너무 따뜻하고 다정하고 고맙고 인류애(특히 자매애)가 충전되는 이야기다. 단연코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꼭지.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찡해서 일전에 <내가 너의 첫 문장이었을 때> 리뷰에서도 언급했던 그 똑똑이 친구 M(여기에서는 D라는 가명으로 불리지만) 이야기도 이 책에 실렸다.

2022.01.12 - [분류 전체보기] - [책 감상/책 추천]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내가 너의 첫 문장이었을 때>

이 꼭지 말고도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비 오는 날 데리러 오는 어른이 없는 아이들 이야기),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시련'(저자가 신혼여행 때 썼던 캐리어 이야기), '뿌팟뽕커리의 기쁨과 슬픔'(태국인 친구와 일본에서 썸을 탔던 남자 이야기), '커피와 술, 코로나 시대의 운동'(커피 이야기) 등은 분명 그 책에서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차피 저자가 쓴 글이니 여기에 또 싣는다 해도 저작권적으로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글만을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그런데 나는 별로 상관없었다. 똑똑이 친구 이야기('문 앞에서 이제는')는 솔직히 반가웠다. M (또는 D)가 마치 내 친구인 것처럼. 내적 친밀감 쩌네 ㅋㅋㅋㅋㅋ

 

다정함을 주제로 한 글을 읽고 싶다면, 또는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줄 이야기를 읽으며 잠시 스스로를 충전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냥 유쾌한 글을 읽으며 웃고 싶은 때에도 좋다. 작가님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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