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남선우, <아무튼, 아침드라마>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침드라마가 폐지된 이후에 출간된, 아침드라마에 대한 에세이이다.
나는 아침드라마를 본 적이 없고, 호주에 있는 동안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 책을 유쾌하게 잘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는 참 사소해 보이는 소재에서 삶에 관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래서 난 이 시리즈가 참 마음에 든다.
저자는 아침드라마를 즐겨 보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일일 아침드라마를 즐겨 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5년 전쯤부터인 것 같다.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나와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한 동생, 동생의 이른 등교에서 해방된 엄마는 자연스럽게 함께 아침드라마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TV 앞에 앉으면 사랑과 뱃신과 거짓말과 위기와 모면과 극복과 복수가 쉴 틈 없이 일어나, 졸린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각자의 하루에도 사랑과 배신과 거짓말과 위기와 모면과 극복과 복수가 기다릴 것이기에, 우리는 마치 예방주사를 맞듯 아침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아침밥을 먹으며 머리를 말리며 눈썹을 그리며 아침드라마를 보고 나면 잠은 달아나고 전투력은 올라가 있었다. 하루를 시작한 준비가 된 것이다.
아침드라마는 모닝커피보다 강력한 전개로 잠을 깨우는 역할도 했지만, 엄마와 나와 동생, 우리 셋만 공유하는 어마무시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도 큰 재미였다. 우리 주변에서 아침드라마를 보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어딘가에 분명 샤이 아드인들이 존재하겠지만), 아침드라마는 우리 셋 외에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공유하며 함께 놀라고 낄낄댔고, 앞일을 예측하고 그것이 적중하면 서로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는 퍽 즐겁고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아침드라마의 종료는 이 모든 것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저자의 어머니 이상란 여사와 저자의 동생 남지우 씨는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데, 두 분 다 이 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여사님은 집에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으로 무엇이 있는지 약간의 사연과 함께 브리핑해주신다. 희은이 아줌마가 계 모임에서 전해준 배추전과 메밀전병이 있고, 종목이 배추전과 메밀전병인 까닭은 희은이 아줌마의 언니가 강원도에 살기 때문이며, 아니면 장 집사님이 보내준 오렌지랑 요거트를 먹을 수도 있고 토스트도 먹을 수 있되 버터는 없으며, 어제 공부방 학생이랑 사 먹고 남아서 가져온 김밥을 계란에 부쳐 먹을 수도 있고, 너는 내등 나가 먹느라 아직 먹지 않은 며칠 된 된장국에 밥도 있다고 한다. 아뿔싸, 냉장고를 열어보시더니 김밥은 사라졌다고 한다. 몇십 분 전의 남지우가 해치운 듯하다. 나는 각기 다른 슬롯에 있던 배추전에 된장국을 매치하는 창의력을 발휘한 후 씻으러 들어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도 이 가족의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
그건 그렇고, 저자가 언제나 아침드라마를 즐겼던 건 아니다. 왜냐하면, 글쎄, 삶이 충분히 살 만할 때는 아침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이야기인즉슨 이러하다.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시절에는 <동거동락>과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도 이 프로를 보러 집에 왔다 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걸 안타깝게 여기신 어머님이 이 두 프로그램을 VHS로 녹화해 주시겠다 하셨고, 실제로도 성실히 이를 수행해 주셨단다.
그래서 밤 12시에 독서실 셔틀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그 녹화 테이프를 돌려 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가 수능을 보고 나서 공부 일정에서 자유로워진 후에 상황이 바뀌었다. 여사님은 여전히 매주 정성스레 두 프로그램을 녹화해 주셨으나, 저자는 밤늦게까지 놀다가 들어온 날, 그다음 날, 그다음다음 날에도 녹화 테이프를 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쉴 때에도 아침드라마를 챙겨보지 않았다고 한다.
<동거동락>과 <프로포즈>가 수험생의 어두운 삶을 비추는 가느다란 촛불이었다면, 이제는 사방에 밝은 등이 팡팡 켜져 있기에 촛불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취업 준비를 전혀 하지 않던) 대학 생활은 마냥 즐거웠고, 마침 싸이월드의 전성시대를 지나던 나는 굳이 TV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힘들다고 꽤나 징징대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꽃길만 걸었던 첫 직장 생활과 대학원 생활 때도 목을 매고 보았던 TV 프로그램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후두두둑 정전되듯 불 꺼진 삶에 새 낙이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아침드라마였던 것이다.
수험생 시절에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일종의 낭만과 안도감을 주었던 것 같다.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이 정도는 하고 살 수 있다는 위안 같은 것 말이다. 한편 직장인이 된 나에게 아침드라마는 식전 30분에 먹으라는 알약처럼 하루를 열기 직전에 복용하는 점막보호제 같은 것이었다. 또는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내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와 사건을 견딜 수 있도록 비교우위를 갖게 해준 것 같다.
<강남스캔들>은 얼마나 재미있는 드라마였을까, 엄마와 동생에게 물어보니 '말도 안 되지만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큰 칭찬인데…. 어쩐지 아쉬워지지만 그 시절의 나에게는 그 드라마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갖은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아침드라마 정도면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다. 설마, 아침드라마는 그래서 언젠가부터 주말에는 하지 않게 된 것인가?
저자가 여러 편의 아침드라마 줄거리를 요약해서 설명해 주는데, 솔직히 읽으면서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허허 참 개족보네' 하고 이해 못해도 책을 즐기는 데는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걱정 마시라.
아, 책 표지는 다들 아실 그 밈(meme)이다.
또 이렇게 유명한 아침드라마 밈으로 김치 싸대기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이렇게 아침드라마의 결정적 장면들은 약간의 놀림이 섞인 채 오랜 시간 회자된다. 아마도 그 드라마를 실제로 본 적은 없을 사람들은 극의 장면을 더욱 과장하여 따라 하며 깔깔댄다. 이성적이고 교양 있는 우리 삶에는 절대로 없을 저열하고 신기한 행동이라는 듯한 반응애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번데기탕을 먹으며 "세상에나, 아프리카에서는 글쎄 벌레를 튀겨 먹는다는 거 있지?"라고 호들갑 떠는 듯하달까.
그러나 우리가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면 다음 상황에서 어느 누가 마시려던 주스를 폭포처럼 흘리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손에 든 김치로라도 상대방을 응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
도준은 눈을 크게 뜨고, 응당 삼키라고 있는 주스를 주르륵 뱉는다. 주스가 마치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인 양 도무지 삼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술과 턱을 타고 역행하는 주스 줄기를 느끼며 도준은 그동안 살아온 방향도 역행하기로 한다. 이제부터 윤진 옆에서 윤진의 복수를 도울 것이다.
아침드라마를 좋아하지 않거나 잘 보지 않는 사람도 이 책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늘 <아무튼> 시리즈는 리디셀렉트에 올라온 것만 봤는데, 이건 사서 봤다.
아마도 선물받은 문화 상품권이 있어서 더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히 결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책의 재미도 내 결제를 촉진시켰다고 인정한다.
정 의심이 되신다면 도서관에서 대여해 보셔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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