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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메르베 엠레, <성격을 팝니다>

by Jaime Chung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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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메르베 엠레, <성격을 팝니다>

 

부제가 말해 주듯, "MBTI의 탄생과 이상한 역사"에 관한 책이다.

MBTI는 'Myer-Briggs Type Indicator'(마이어-브리그스 성격 유형 지표)의 준말인데 여기에서 'Myers'는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l Briggs Myers)를 가리키고 'Briggs'는 '캐서린 쿡 브릭스(Katherine Cook Briggs)'의 성에서 따왔다.

캐서린이 후에 MBTI로 불리는 성격 유형 검사를 처음 고안해 냈고, 그 딸인 이사벨이 어머니의 업을 이어서 발전시켰다.

이 두 모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개발자인 두 사람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렇게 간단하지만, 이 책은 종이책으로도 500쪽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 말인즉, 이에 관해 엄청나게 방대한 역사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의 분량에 압도되기도 했지만 어쩐지 사건의 흐름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 이 책을 끝내는 데 오래 걸렸다.

사건의 흐름이 내 생각과 달랐던 것이 무슨 의미냐면, 음, 나는 이 책에서 MBTI로 대표되는 성격 유형 검사에 대한 비판을 기대했는데 그게 내 생각만큼은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말 정직하게 MBTI의 역사를 더 다루었달까. 그래도 저자가 이 MBTI를 찬양하는 광팬이 아니라는 점은 무척 다행스럽고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그렇지 않나, 성격 검사라는 게 그냥 개인이 '아, 나는 이러이러한 경향이 있구나' 하고 자신을 더 알고 더 좋은 방향(예컨대 '나는 너무 이성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정 없게 비칠 수 있으니 조금 더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고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해야지.' 같은 것)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게 최고로 좋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MBTI에 사회가 너무 과몰입해 버려서 특정 유형만을 원하는 기업의 공고문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건 정말 너무하다. 게다가 나는 애초에 사람의 (타고난)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100%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살다 보면 큰일로 인해 성격이 변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전엔 좀 더 강하게, 거칠게 표현하던 것을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부드럽고, 원만하게 표현하게 될 수도 있는 건데 정말 사람의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는 건가?

어쨌거나 그 진술의 참/거짓은 둘째치고서라도, MBTI 검사 결과는 바뀌는 일이 다반사고 또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검사에 적당히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런 검사를 내가 믿어도 되나 싶은 거다.

 

게다가 이 책의 서문에서부터 묘사되는 CAPT, 그러니까 심리 유형 응용센터(the Center for the Application of Psychological Type, 저자 말마따나, 이사벨 마이어스의 사망 이후 "MBTI의 비밀을 지키고 이를 만든 사람의 유산을 보호하는 기관")의 태도가 묘하게 구린 것이 아주 의심스러웠다. 이런 집단에 의해 탄생하고 이어져 온 검사라니, 뭔가 컬트 같잖아. 무서워.

 

(...) 나는 CAPT 측에 이들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친절한 대학교 사서는 미안한 얼굴로 내가 승인을 얻지 못하리라고 거듭 거듭 일렀다.

"저쪽 직원들은 이사벨의 이미지를 보호하는 일에 매우 헌신적이거든요."

이사벨의 삶을 밀착 취재하려는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센터 측은 지금까지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그녀의 이미지를 보호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자는 이사벨이 작성한 논문들을 보기 위해 자료 신청서를 내고 9개월이 지나서야 "관련 자료에 접근하려면 먼저 '재교육'을 받고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공인 교육 과정은 수강료만 2천 달러가 드는 4일짜리 과정인데, 교육 진행자인 패트리샤(Patricia)라는 50대 여성은 (저자의 서문에서 드러난 모습을 평가하자면) MBTI에 상당히 열정적이다. 광신도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아래 인용문을 읽고 내가 느꼈을, MBTI 단체에 대한 불쾌감을 간단히 서술하시오(20점).

성격 유형을 유창하게 말하는 법, 그 마지막 규칙은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불안한 요소인데) 파란 눈동자가 왼손잡이처럼 자신만의 성격 유형을 타고나고 이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성격 유형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패트리샤는 우리에게 큰소리로 따라 하라며 이렇게 외쳤다.

"성격 유형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성격 유형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녀는 단호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뇌 속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는 이론상 우리 인간이 선호 지표 4개로 표현되는 유형을 타고난다는 사실을 지지합니다. '내 성격 유형이 변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틀렸습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감정과 불가사의한 신비를 지닌 자아가 4개의 알파벳 글자 조합으로 나타나고, 이 자아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다는 그녀의 주장은 내가 날마다 접하는 자기변혁의 메시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퇴행적으로 들렸다. 오늘날 우리는 다이어트, 운동, 여행, 치료, 명상을 통해 자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매일 듣고 있다. 패트리샤가 말하는 MBTI가 설령 허구일지라도 그 매력을 외면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자기애를 충족시키는 가상함이 있었다. 성격 유형을 배우면 골치 아프고 복잡한 삶의 추이를 간단하게 압축해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그동안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16가지 성격 유형은 개인의 정체성을 그 어떤 도구보다도 투명하고 선명하게 우리 앞에 제시했다. (...)

MBTI 교육 프로그램을 마치고 주말이 오기 전에 심리 유형 응용센터(CAPT) 측에 연락했다. 종전에 냈던 신청서 결과를 물었떠니 내 교육 성취도를 평가한 결과 내 요청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담당 직원이 대답했다. 그들의 결정에 대해 보충 설명을 요구했지만 직원은 그 이상은 어떤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 질문만큼은 피하고 싶었겠지만 그가 질문을 회피할수록 물음표는 선명해졌다. 당신들은 무엇을 숨겼습니까?

아니, 창시자의 논문들 좀 보게 해 주는 게 뭐 그렇게 '이미지' 관리에 어려운 일이라고 이런 교육까지 시키는지.

게다가 더 웃긴 것은 저자가 이런 교육 과정을 끝냈는데도 자료에 대한 접근 승인을 거절했다는 것. 도대체 얼마나 뒤가 구린 조직이길래 이렇게 맹렬하게 회피를 하지?

이쯤 하면 내가 이사벨과 캐서린에 대해 얼마나 의구심과 불편함을 느꼈을지는 다들 이해할 수 있으실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 다음 문단이 정말 기가 막히다. 위 인용문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질문("당신들은 무엇을 숨겼습니까?")을 상기하면서 읽어 주시길 바란다.

 

알고 보니 그들은 감춘 게 꽤 많았고 특히 MBTI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법한 흥미로운 비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MBTI가 과학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점, MBTI의 근거가 되는 이론이 임상 심리학적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한 글로벌 기업이 산업 심리학과 자기 관리(self-care)를 결합한 뒷골목에서 MBTI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워 꽤나 짭짤한 수익을 챙기고 있다는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바다. 개인의 성격을 유형으로 분류해 평가하는 행위 자체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이들 역시 사회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표현을 빌려 성격 유형 검사를 '개인의 소멸'로 간주한 지 오래다. 아도르노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보기에 성격 유형 검사는 우리를 서서히 좀먹는 음흉한 술책이다. 성격 검사를 통해 전 인격을 갖춘 고유한 정체성을 찾았다고 믿게 만들지만 사실은 각자의 개성을 뭉개 버리고 사전에 결정된 몇몇 유형으로 인간의 행동을 수평화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봉쇄해 버린다. 게다가 성격 유형 검사는 권력을 쥔 조직의 이해를 대변하는 도구로 쓰이기 일쑤다. 이들 조직은 그들의 경영니아 업무를 합리화하는 데 성격 유형 검사를 이용했다.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과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을 비롯해 20세기 후반까지 적지 않은 기업들이 직원들을 채용하고, 해고하고, 승진시킬 때 성격 유형 검사를 이용했다. 스와스모어(Swarthmore)라든지 브린 모어(Bryn Mawr) 같은 명문 대학들도 입학 심사 과정에서 성격 유형 검사를 이용했고, 교회 역시 목회자를 임명할 떄 성격 유형 검사를 이용했다. 정부 기관들도 공무원을 임명할 때 성격 유형 검사를 이용했다. 성격 유형이 중요한 척도로 부상한 후로 살아 있는 인간에게 특정한 성격 유형으로 꼬리표를 붙이게 되었고 이는 개성을 말살하는 수단이 되었다. 인간은 무자비한 사회의 부품으로 같은 유형이라면 언제든 교체가 가능했고 용도가 다하면 폐기처분당했다. 요컨대 성격 유형 검사는 근대화를 달성한 도구 가운데 가장 모질면서도 그 정체를 완벽하게 위장한 도구 중의 하나다. 한마디로 양의 탈을 쓴 늑대인 것이다.

이러니 내가 MBTI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5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MBTI를 만든 이들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이만한 책이 없을 듯하다.

또한 이 책과는 상관이 없지만 MBTI를 비판하는 아래의 칼럼도 읽을 만하여 덧붙여 본다.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21010440002886

 

MBTI와 나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이란 언제일까? 어떤 선택이 그 이후의 삶의 방향을 결정했으리라 여겨지는 바로 그때 말이다. 여러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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