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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by Jaime Chung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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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서련,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난 원래 현대 한국 소설은 잘 안 읽는. 그런데 이건 두어 군데의 뉴스레터에서 추천받아서 흥미로웠고, 그래서 한번 미리 보기로 조금 보다가 재미있어서 사서 읽었다.

종이책 기준으로 208쪽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라 아마 하룻밤 시간 내서 집중할 수 있으면 바로 앉은 자리에서 끝낼 수도 있을 듯하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앞부분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나'는 다리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석 달쯤 전에 새 냉장고를 구입했는데,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그 할부금을 갚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가 죽음을 고민하는 사이, 갑자기 택시를 타고 나타난 흰 옷 차림의 여자. 그 여자는 화자에게 죽지 말라고, 당신은 '마법 소녀'가 될 운명이라고 말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화자는 다소 황당하면서도 충격적인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을 죽지 않게 붙잡아 준 그 여자를 따라간다.

 

<카드 캡터 체리>가 요술봉을 들고, <세일러 문>이 브로치로 변신하듯, 마법 소녀들에게는 마구, 즉 마법 도구가 필요하다.

주인공의 마구는 신용 카드 모양인데, 왜 이런 형태인지는 소설을 다 읽으면 이해하게 된다.

 

진짜 기가 막히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설인데 별로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더 이상 설명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평을 좀 덧붙이자면, 마법 '소녀'에 한정지어지지 않을 정도로 등장 인물의 나이대가 다양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그냥 전반적으로 여성들 이야기라는 게 너무너무 좋았다.

하긴, 제목부터가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인데 애초에 읽기 전부터 이 소설 속에선 남성이 큰 위치를 차지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겠지. 

우정이라기보다는 사랑에 가까운 게 확실한 주인공-아로아의 관계성도 좋다.

 

저번에 리뷰를 쓴 사이토 미나코의 <요술봉과 분홍 제복>에서 지적된, 전형적인 마법 소녀물의 특징과 비교하며 읽어도 재밌을 것 같다.

2022.05.09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사이토 미나코, <요술봉과 분홍 제복>

 이 작품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만한 주제 중 하나는 이것이다.

애초에 소녀 왕국에는 조직이라는 개념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팀을 이루어 활약하는 이야기로 유명한 <세일러 문>과 그 밖의 사례들을 살펴보더라도 소녀 왕국에서는, 소년 왕국에서처럼 남자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이 조직의 일원으로 있는 경우가 없다. <스케반 형사>(1985)에서 비롯된 광습인지 몰라도 소녀 왕국의 팀은 남성 출입이 금지된 여학교를 다니는 동년배 소녀들로 구성된 것 같은, 지극히 사적인 친한 친구 무리에 불과하다. 애당초 소녀 왕국에서는 '과학특수대'나 '울트라 경비대' 같은 팀명조차 짓지 않는다. <세일러 문>에서는 세일러 요정 열 명이 훌륭한 팀을 이루고 나서도 멤버를 통틀어 '세일러 요정'이라고 칭할 뿐 끝내 팀명은 짓지 않는다.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인 소녀 왕국의 조직은 작전 본부 건물은 물론 그럴듯한 명령 체계도 없다. 소녀 왕국에는 비밀 아지트 하나 없으니, 소년 왕국이 최첨단 컴퓨터가 구비된 군사기지를 소유한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세일러 문>에서 세일러 요정들이 작전 회의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잡담을 나누는 곳은, 같은 멤버가 사는 신사(神社)이거나 멤버의 집 거실, 패밀리 레스토랑 구석, 오락실 구석 등지다. 형편이 이러하니 전투가 발생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법소녀 은퇴합니다>에 그려지는 세계관은 어떤가? 마법 소녀들의 연대나 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뭐, 이런 점들을 찾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다 대답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여기에서는 생각해 볼 만한 질문만 제시하겠다).

 

이 재밌는 소설을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축하한다. 이걸 처음으로 읽는 그 신선하고 충격적인 재미를 누릴 수 있다니!

이 책은 친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다 읽고 나면 같이 이야기하자(해요)!' 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당연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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