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사이토 미나코, <요술봉과 분홍 제복>
<세일러 문>부터 헬렌 켈러 위인전까지, 다양한 일본 매체에 등장하는 '홍일점' 캐릭터들의 분석을 통해 왜곡된 성역할을 지적하는 책이다.
신기하게도 이 책은 1998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지금 봐도 무리 없을 정도로 거의 다 들어맞는다. 그만큼 매체 속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현재 20-40대인 독자라면 '그래그래, 맞아, 이 캐릭터는 이렇게 그려졌지' 하며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시작하며'에서 이 책의 목표를 이렇게 정리했다.
(...)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수의 남성과 소수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핑크레인저와 나이팅게일은 동급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홍일점을 중심으로 전후 아동매체가 여성 주인공들을 통해 시사하는 여성상을 고찰해 보았다. 조사 및 분석 대상은 앞서 이야기한 특촬 드라마﹒애니메이션과 아동용 위인전집이다.
저자의 통찰은 지금 봐도 너무너무 놀라운데, 그중에 내가 제일 감탄했던 몇 부분만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소년 왕국과 소녀 왕국(각각 소년들을, 또는 소녀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에서 그려지는 세계관을 가리킨다)의 특징은 이러하다.
초능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소년 왕국에서는 초능력을 오로지 과학기술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물론 실상은 허무맹랑한 공상과 유사과학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소년 왕국에서 초능력 스펙을 설명할 때는 기계와 관련된 명칭과 과학용어, 그리고 그럴싸한 수학 공식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
소년 왕국은 첨단기술을 이용해 주로 전투용 로봇과 이동 수단과 무기를 만든다. 아니, 소년 왕국에서 과학기술은 대부분 군수산업에만 이용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게다가 소년 왕국은 장난감업계와 동맹을 맺기라도 한 건지 이상하리만큼 군장비 확장을 지향한다. 작품 후반에 들어서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군장비 강화 계획이 세워지고, 이전에 사용하던 무기의 성능을 뛰어넘는 최신형 기계 혹은 거대 로봇이 만들어진다. 무기를 개발하는 사람들은 '◯◯ 박사', 'XX 연구소 🔺🔺 소장' 등으로 명성 높은 천재 과학자들이다. 개중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도 있지만, 군사대국답게 산학협동 체제가 발달한 소년 왕국에서는 대부분이 조직에 고용된 어용학자다. 이들은 대부분 천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기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대개 혼자서, 그것도 상당히 짧은 기간 안에 소화해내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과학자다.
소녀 왕국 사람들이 갖춘 초능력, 즉 소년 왕국의 과학기술에 해당하는 능력은 마법이다. 두 능력 모두 공상의 산물이고 허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소녀 왕국이 열 올려 전투를 치르고 나서도 과학기술은 끝내 발달하지 않는다.
물론 소녀 왕국도 소년 왕국과 마찬가지로 장난감업계와 동맹을 맺은 관계이니 소녀 왕국에서 주문만 외워서 마법을 부린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마법은 반드시 마법도구와 짝을 이룬다. 다만 소녀 왕국에서는 소년 왕국의 천재 과학자처럼 마법도구를 만드는 사람이 없다. 마법도구는 자국에서 직접 개발한 것이 아니라 '거울의 정령', '꽃의 요정', '달의 여신' 등이 전해준 것이다. 소년 왕국에서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시하지만 소녀 왕국 주인공들은 걸핏하면 남의 힘을 빌리곤 한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소년들은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과학이라든지 기술, 수학 같은 이공계적 개념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데 그에 반해 소녀들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이러니 나중에 이 아이들이 자라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 다니게 될 때 이공계에 남-녀 학생 성비가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나더라도 그게 놀라운 일인가?
적어도 모든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받는 의무 교육에서의 과학이라든지 수학 등은 이과적인 머리가 있고 없고, 또는 재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나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소녀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그런 것에 노출되지 않는다.
게다가 소년 왕국에서 이용되는 과학이 사실 허구고 망상이라 하더라도 겉으로는 '이성'과 '논리'의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마법은 그런 것들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믿음', '신념', 좀 더 나아가 '종교'와 더 맥락을 같이 하지 않나. 이건 '남자들은 이성적 존재, 여자들은 비이성적 존재'라는 터무니없는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게 아닌가.
이런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하는 건 대여섯 살때쯤일 텐데, 그때부터 이런 고정관념을 무의식적에 주입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이상하다.
여성들이 기본적으로 근력이라든지 체력 면에서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기에 그런 소녀들이 무언가와 싸우고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면, 그 부족한 피지컬을 보충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야 하는 건 오히려 소녀들 쪽이 아닌가?
남자들은 뭐, 그냥 격투 기술을 통해 적(외계인이 됐든 그냥 사악한 인간 악당이 됐든 간에)과 싸울 수 있지 않나? 과학을 소녀들에게 돌려줘라! 우우! (물론 농담이다.)
두 번째로 내가 크게 공감하고 생각하게 된 포인트는 이런 왕국들에서 주인공 아버지의 존재이다.
아래 인용한 문단에서 언급되는 '붉은 전사'는 소녀 왕국 속 마법 소녀들, 마법의 힘을 이용해 싸우는 (여성) 전사들을 가리킨다. 저자가 고안해 낸 용어이다.
소년 왕국에서는 남주인공이 로봇 발명가의 아들인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진작에 사망했거나 행방불명 됐다. 그래서 이런 설정은 단지 혈연에서 끝나지 않고 남주인공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 이어받기', '행방이 묘연한 아버지 찾기' 따위의 사명이나 의지(혹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는 유형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동기 부여가 될 만큼 특별한 사연이 붉은 전사에게는 없다.
조직의 일원이 어용학자나 높으신 분의 딸(손녀)이라면 고용자에게 신원이 확실한 아가씨임을 증명할 수 있으며, 박사인 아버지는 집밖에서도 딸을 자기 눈길이 미치는 범위 안에 둘 수 있다. 그런 딸이기에 붉은 전사는 남자들이 다니는 직장에 예외적으로 출입이 허가된 것이다. 딸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아버지의 권력이 미치는 곳에서 근무하니 제법 마음 편하게 직장을 다니는 셈이다. 요컨대 이 딸들 또한 공주님들이다. 붉은 전사가 이유도 없이 예쁨 받는 데 비해 제대로 된 일을 맡지 못하는 것은, 소년 왕국이 금수저 딸만 고집하기에 겪는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금수저 딸만 고집하기에' 붉은 전사들이 제대로 된 일을 맡지 못한다고 유머러스하게 썼지만, 사실 이런 설정은 여성혐오이자 그릇된 성 고정관념이 깃든 것이다.
자,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마징가 Z>에 나오는 유미 사야카는 로봇 발명가이자 태양열에너지연구소 소장인 유미 겐노스케 교수의 딸이고, <파워 레인저 썬발칸>의 아라시야마 미사는 지구평화수비대 장관인 아라시야마 다이사부로의 딸이다. 이런 예는 더 들 수 있을 정도로 많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면,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분야(예컨대 과학, 기술, 스포츠 등)는 온전히 남성의 것이며, 만약 여성이 이 분야 세계에 진입하려고 하려면 혈연 같은 강력한 연줄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왜냐? 여성들이 이런 분야에 제 힘으로, 스스로 관심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
만약에, 예를 들어, 과학을 좋아하는 소녀가 있다고 치면 이는 자연스럽지 않다. 아마도 아버지가 하다못해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 정도 되었기 때문에 이 소녀도 자연스럽게 (여성스럽지 않고 남성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 나, 여자애가 그냥 타고나기를 과학이나 기술이나 뭐 그런 것들을 좋아할 수도 있지! 여성들이 소위 '남성적'인 것을 좋아하려면 오로지 주별 남성들의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금수저' 설정을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건 진짜 내가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라서 머리 위에 전구가 켜지는 듯했다.
붉은 전사는 공식적으로 통신(전화) 업무를 담당한다
소년 왕국 사람들은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하지만 그들도 평상시에는 다양한 일을 분담한다.
붉은 전사의 공식 임무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통신이다. 그들은 작전 본부나 기지에서 레이더를 관측하면서 적의 이동 경로를 전달하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며 정보를 수집한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에 그럴싸해도 붉은 전사는 사실상 사무직 여성과 큰 차이가 없다. 모스부호로 통신하던 시대라면 또 모를까, 첨단기술이 발달한 소년 왕국에서 통신 업무는 생각보다 편한 일이다. 레이더망 혹은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니 말이다. 예쁜 여자가 머리에 헤드셋을 끼고 모니터에 바짝 달라붙어서 "적함 접근! 타깃은 동쪽 방향으로 이동 중" 따위의 말을 하면 흡사 일하는 듯이 보이지만,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무직 여성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어차피 중요한 순간이 오면 대장이 직접 모니터를 살피며 지시를 내리기에 통신 담당은 허울좋은 전화 담당이거나 끽해야 중역 비서다. 덧붙여 말하자면, 옛날에는 사회에서 일하는 여성을 주로 사무실에서 전화 거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걸 읽고 정말 모든 게 완전하게 이해되는 느낌을 받았다. 1999년작 영화 <갤럭시 퀘스트(Galaxy Quest)>에서 시고니 위버(Sigourney Weaver)가 연기하는 캐릭터 그웬 디마르코(Gwen DiMarco)도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얘기를 하는데!!
우주선 안에서 (홍일점인) 자신의 일은 그냥 컴퓨터가 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고, 자기 유니폼은 자기 몸매를 강조할 뿐이며, 자기 연기력은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이다.
저 단락을 읽자마자 그웬 디마르코뿐 아니라 유구한 역사의 SF 시리즈 <스타 트렉(Star Trek)>에 등장하는 우후라(Uhura)도 떠올랐다.
우후라라는 캐릭터가 당시로서는 센세이셔널하게, 정말 급진적일 정도로 1. 교육받은 2. 흑인 3. 여성 캐릭터를 TV에 등장시켰다는 점은 의미가 있고, 또한 그게 많은 흑인(특히 흑인 여성)의 자랑인 걸 안다.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도 어릴 적에 TV에 나오는 우후라를 보고 '흑인 여자가 TV에 나오는데 메이드 따위의 역할이 아니에요!'라고 감탄했고 그때부터 나는 원하는 뭐든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우후라도 결국엔 통신 담당 장교였다. 당시 기업에서(흑인) 여성들을 비서로 고용하던 거랑 사실 크게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배경만 우주를 유랑하는 우주선으로 바뀌었다 뿐이지, 여성의 기여분, 여성의 역할은 코딱지만하다는 점에서 똑같다.
세상에, 여기에까지 이 '붉은 전사'의 법칙이 통하다니!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이 일본 대중 매체나 미국 영화나 별다른 바가 없는 것 같아 씁쓸하긴 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통찰을 다 여기에 옮길 수 없어서 아쉽지만 정말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좀 더 균형 잡힌 시선으로 그런 매체들을 즐기고 또 필요하다면 비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고 이 리뷰를 쓰면서도 즐거웠고 또 생각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최고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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