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by Jaime Chung 2022. 12. 29.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출간되었을 때부터 관심이 가서 읽을 책 목록에 넣어 두었는데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바로 읽어 보았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지식인보다 더욱더 통찰력 있게 이 의문을 잘 해소해 주었다.

책의 모든 내용을 공유할 수는 없으니 일단 제일 핵심이 되는 부분, 즉 ‘왜 사람들은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볼까?’에 대한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 번째, 요즘은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첫 번째로,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

유행을 따라가려면 봐야 할 작품도,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할 SNS도 넘쳐나는데 시간이 부족하니 빨리 감기라는 기능이 인기를 끈다. 10~20대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빨리 감기가 당연시되었다. ‘바쁘기도 하고,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녹화해서 빨리 감기로 본다’, ‘내용만 대충 보고 세세한 부분은 블로그나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한다’ 등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있었다.

 

두 번째, 이들은 시간에서도 ‘가성비’를 따진다.

두 번째 배경으로, 가성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빨리 감기, 10초 건너뛰기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시간 가성비’다.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타임 퍼포먼스’라고 불린다.

(…)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 빨리 감기를 속독처럼 받아들인다. 속독처럼 훈련을 통해 영상 작품을 효율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가벼운 자기계발서라면 몰라도 왜 영상 작품에서까지 가성비를 추구할까? ‘인기 있는 작품을 보고 싶어서’라는 말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될까?

(…)

그들은 “봐야 할 중요한 작품의 목록을 알려 달라”고 한다. 지름길을 찾는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낭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 가성비가 나쁜 것을 두려워하며, 이를 ‘타임 퍼포먼스가 나쁘다’라고 형용한다.

 

세 번째,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이 늘어났다.

세 번째 배경은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난 데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 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낙하하고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한다.

굳이 이런 대사가 필요할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애니메이션 연출과 성우의 숨결이 느껴지는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원작을 그대로 살린 대사이기는 하지만 흑백 만화와 컬러로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은 정보량이 완전히 다르다. 만화에서는 한 장의 그림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정보를 독백으로 보충할 수 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도 그 보충 정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귀멸의 칼날》뿐 아니라 실사 영화나 드라마 중에도 그런 작품이 늘어났다. 그런 작품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사가 없는 장면은 건너뛰어도 문제없다”, “자막만 따라가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제작자 측의 과잉 친절로 설명이 과도한 작품이 세상에 넘쳐나서 시청자의 이해력이 하향 평준화된 것은 아닐까?

 

이건 좀 후반에 나오는 부분이지만, 연결되는 내용이라 바로 이 뒤에 이어서 보는 게 적절할 듯하다. ‘대사가 필요 없는 시나리오의 기술’은 요즘 들어 외면당하는 것도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원인 중 하나다.

라이트 노벨 원작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 대해 고바야시 씨와 각본가 지망생들은 ‘그림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을 대사로 일일이 설명해주는’ 점에 거부감이 든다고 입을 모았다.

“만약 제가 관여하는 작품에서 저런 각본이 올라온다면 설명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꼭 말할 거예요. 저렇게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원작의 장점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고바야시 씨)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떨어진 탄지로가 눈 덕분에 목숨을 건진 부분을 그대로 살린다고 하면 적어도 떨어지는 순간은 주위 상황을 보여주지 않는 거죠. 발이 미끄러진 탄지로에게 ‘떨어졌어, 이제 난 끝이구나’ 싶은 표정을 짓게 한 후, 훅 떨어뜨리고는 ‘어? 살았잖아. 왜지?’라고 생각한 시점에 비로소 주위의 눈을 보여주는 겁니다. 시청자들도 그때야 눈 덕분에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렇게 완급 조절을 하는 겁니다. ‘눈 덕분에 살았군’ 같은 대사로 모두 설명하고 싶겠지만 대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게 각본가의 일이니까요.”

 

위에서 말한 세 번째 이유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꽤 설득력이 있어서 납득했다. 원래 한 편의 기사였던 것을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저자는 더 많은 조사를 하고 대학생들과 인터뷰도 했는데, 아주 흥미롭게도 일반 ‘관객’과 ‘창작자’의 사이에 위치한다 할 수 있는 각본가 지망생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더 뜻깊은 표본이 되었다. 이게 제일 잘한 점인 듯.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분석 내용이 몇 군데 있는데, 첫 번째는 이것이다.

낭비는 악이다. 가성비야말로 정의다.

자기계발 온라인 커뮤니티는 ‘성공’을 열망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한방에 인생 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공하려면 00가지만 기억하라”, “잘나가는 사람들의 00가지 비밀”과 같은 ‘치트(cheat,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부정하게 바꾸어 캐릭터의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아이템 또는 돈을 늘리는 것)’를 찾는다. 라이프 핵Life Hack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치트의 원래 의미는 ‘부정행위’, ‘속임수’, ‘사기’다.

꾸준하게 노력해봐야 보상이 따라올 보장도 없는 시대이다 보니 이해는 된다. 다만 그것을 영상 작품에서까지 추구해야 하느냐다. 아니,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영상 ‘작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대신 ‘콘텐츠’라는 말을 사용한다.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미디어 오락을 ‘콘텐츠’라고 총칭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작품을 감상한다”보다 “콘텐츠를 소비한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익숙하다.

정의를 분명히 해두자. ‘감상’의 목적은 행위 자체이다. 모티브나 테마가 숭고한지, 예술성이 높은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을 접하고, 음미하고, 몰두하는 것만으로 독립적인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면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는 다른 실리적인 목적이 수반된다. ‘화제를 따라가기 위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작품을 보는 행위가 이에 속한다.

식사에 비유하면 ‘감상’은 식사 자체를 즐기는 것이고, ‘소비’는 영양을 계획적으로 섭취하기 위해 혹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 먹는 것을 말한다. ‘감상’으로 이어지는 ‘작품’과 ‘소비’로 이어지는 ‘콘텐츠’는 ‘양’이라는 잣대로도 구별할 수 있다.

콘텐츠는 본래 ‘내용물’이나 ‘용량’을 의미하며, 전자매체상의 정보나 제작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위로 보건대 ‘콘텐츠’라는 호칭에는 처음부터 수치화할 수 있는 양(데이터 크기나 시청에 필요한 시간)으로 환산하여 정보를 파악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단시간’에 ‘대량’으로 소비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이 만족 요소에 들어간다.

하지만 ‘작품’은 ‘양’을 초월한다. 작품은 ‘양’의 잣대를 거부한다. 감상에 필요한 시간(비용)과 감상으로 얻는 체험(효과)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작품을 감상하고 몇 년이 흐른 후에야 영감이나 계시가 폭발하기도 한다. ‘실리’, ‘유용성’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어떤 ‘작품’이 좋고 나쁜지 가르는 기준을 굳이 설정한다면 ‘감상자의 인생에 끼친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치화할 수 없으며 한 작품이 다른 감상자에게 같은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재현성도 전무하다.

영상 작품은 시청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따라 ‘콘텐츠’로 불리기도 하고,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청자는 영상 작품을 ‘소비’할 수도 있고 ‘감상’할 수도 있다.

‘감상’할 ‘작품’이 아니라 ‘소비’해야 하는 ‘콘텐츠’가 되어 버린 시대. 여기에 정말 깊이 공감한다. 나도 이 비슷한 생각을 황효진의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서평에 표현한 적 있다.

https://blog.naver.com/eatsleepandread/222885841042

 

황효진,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기자 출신으로 독립 출판, 잡지, 팟캐스트, 뉴스레터까지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만들어 온 저자가 자기만...

blog.naver.com

 

그리고 또 내가 진짜 ‘아!’ 하고 감탄하며 읽은 통찰은 이거다. 왜 라이트노벨 소설들은 다 제목이 그따위일까 생각했는데, 물론 처음에 몇몇 책이 그런 제목을 시작했을 때야 그냥 웃기거나 재미있다, 또는 독특하다는 이유로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모든 걸 빨리 파악하고 싶다’라는 대중들의 욕망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쭉 지속된 게 아닐까.

요즘에는 출판사에서도 공식적으로 자사 도서의 요약본을 제공한다. 바쁜 서점 MD에게 책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요약만으로는 작품의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이상론은 출판 현장에서 거의 무의미하다. 매일 대량으로 간행되는 책의 홍수 속에서 어느 한 권을 골라 좋은 위치에 진열하게 하려면 이목을 끌 만한 내용이 필요하다. 일반 독자뿐 아니라 책 전문가인 서점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설명식 대사’와 ‘짧고 간결하게’라는 지시가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복잡한 사건을 오해 없이, 단일한 의미로 단순화한다는 의미에서 이 둘은 동일하다.

좋은 예가 라이트 노벨light novel의 제목이다. 라이트 노벨의 정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장르와 경향에 따라서는 ‘판타지 소설’, ‘라이트 문예’, ‘신문예’ 등의 호칭도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의 삽화와 표지를 사용하고, 순수문학에 비해 가독성과 오락성이 강조된 소설’ 정도로 해두자(‘젊은 층 대상 작품’이라고 정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 라이트 노벨 독자를 보면 젊은 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라이트 노벨을 살펴보면 제목이 대체로 길다. 제목이 내용을 설명하여 줄거리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모두 최근 10년 내 인기작들이다.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소꿉친구가 절대로 지지 않는 러브 코미디』

『여성향 게임의 파멸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 영애로 환생해버렸다』

『마왕학원의 부적합자~사상 최강의 마왕인 시조, 전생해서 자손들의 학교에 다니다~』

『예를 들어 라스트 던전 앞 마을의 소년이 초반 마을에서 사는 듯한 이야기』

오해할 여지가 없다. ‘상품 설명’으로는 이보다 더 친절할 수가 없다. 본문을 전부 읽어야만 비로소 제목에 담긴 깊은 뜻이 이해되는 작품은 상품으로서 가치가 떨어져버렸다.

 

요즘 웹툰이나 웹소설에 자기 입맛대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진행해 달라 또는 이건 이래서 재미가 없다, 저건 저래서 잘못됐다 하고 품평하는 이들이 늘어난 걸 실감하시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래서 아예 웹툰이나 웹소설에 달린 댓글을 안 보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조아라’ 같은 소설 투고 사이트가 생기다 보니 그걸 읽고 싶어 하는 독자와 거기에 나름대로 ‘비평’을 하고 싶은 정도가 지나쳐 작가들을 괴롭히는 수준의 인간들까지 몰려 버렸다. 이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인 듯(갑자기 궁금해졌는데, 팬픽이든 뭐든 써서 올리는 텀블러 같은 사이트에도 이런 정병 유발자들이 있을까? 아시는 분 제보 바랍니다).

설명이 과도한 애니메이션이 늘어난 배경에는 소설 투고 사이트가 있다. 소설 투고 사이트란 누구든 자기가 쓴 소설을 공개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말한다. 독자의 감상이나 평점이 실시간으로 보이는 데다 작품 순위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출판사가 신인 발굴을 목적으로 운영하는 경우도 있으며, 2010년대 이후로 특히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 투고 사이트에 투고된 작품은 대개 앞에서 이야기한 라이트 노벨로 출간된다. 그리고 그 작품을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라이트 노벨 독자와 청소년 대상 애니메이션의 시청자가 속성이나 기호 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쿠호도 DY미디어 파트너즈 환경연구소의 모리나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는 소설가가 독자로부터 감상평을 받는 수단이 편지뿐이었죠. 그러니 작가의 창작을 흔들 만한 의견은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그만이었어요. 그런데 소설 투고 사이트 작가는 독자의 감상을 직접 전달받아요. 그 수도 편지와 비교가 안 되고요.”

당연히 “잘 이해가 안되었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부정적인 내용도 많이 받는다.

“인기 작가일수록 설명이 부족하다는 둥 개연성이 없다는 둥 날카로운 지적을 받거나 두들겨 맞는 일이 많아요. 그러면 다음 작품에서는 점점 설명을 추가합니다. 그게 영상이 되면 당연히 설명식 대사도 많아지죠.”(모리나가 씨)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이건 나도 빠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향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어떤 작품을 단지 ‘원작’에 충실한지만 가지고 판단하는 경향.

원작 만화의 대사를 최대한 살려 충실하게 영상화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즘은 영상화하면서 대사를 바꾸면 그것이 적절한 각색의 범위 내여도 원작 팬이 ‘원작 파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처음부터 ‘원작 그대로’ 가는 것이 무난하다.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지 마사유키 씨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원작 충실주의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옛날처럼 원작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지 않고, 장르만 바꾼다. 틀에 끼워 맞추거나 겉보기만 정리해주는 식이다”, “감독에게는 독자적인 원작 해석이나 사상성思想性이 요구되지 않고, 연출적인 변화도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원작을 가급적 그대로 옮기도록 요구받는다.”

분명히 각색을 하면서 각색하는 미디어(예컨새 웹툰이었던 것을 TV 드라마화한다면 그 미디어는 TV가 되겠다)에 맞게 에피소드나 인물 구성, 또는 연출 등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는데 요즘은 너무 ‘원작’을 절대화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원작의 매력을 좋아한 팬들이 그것이 망쳐지지 않았으면 바라는 마음은 충분히 나도 이해하지만, 같은 원작을 가지고도 나름대로 다르게, 신선하게 만드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원작에서 조금 부족했던 점이 있으면 채워 넣는다든가, 원작과는 접근 방식을 아예 다르게 간다든가. 원작이 있는 작품을 봄으로써 원작을 보는 데 드는 품을 덜거나 아예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며 각색 작품이 원작과 똑같기를 바라는 건 조금 잘못된 마음가짐 아닐까. 예컨대 아무리 영화가 2시간 남짓한 시간 내에 모든 걸 다 보여 주는 것 같아도 영화의 원작이 되는 소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데. ‘원작을 보고 싶지 않아서’ 또는 ‘원작을 보는 수고를 줄일 수 있으니까’라는 마음으로 각색 작품을 접한 적은 맹세코 없지만, ‘원작과 같은 결로 가야지!’ 하고 생각한 적은 분명히 있기에 이건 나도 반성한다(하지만 그래도 구린 각색은 구린 거라고요…).

‘도대체 왜 요즘 사람들은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를 빨리 감기로 볼까?’ 하고 의아했던 적이 있다면 한번 꼭 읽어 보시라. 정말 분석도 잘되어 있고 요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강력 추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