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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위근우, <뾰족한 마음>

by Jaime Chung 2022.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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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위근우, <뾰족한 마음>

 

얼마 전, MBC의 ‘교양’ 프로그램 <결혼 지옥>은 아동 성추행 장면을 편집 없이 내보내고 상담을 맡은 전문가 오은영 박사도 이 행위 또는 방송 자체를 강하게 저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위근우 기자는 본인의 인스타그램(링크)에서 ‘이 프로그램에 대해 반년 전에 문제를 지적했는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라는 요지로 비판했다(’위근우의 리플레이’ 본문 링크). 모두 맞는 말이었다.

‘프로 맞말러’라고 불러 주고 싶은 위근우 기자는 그간 쓴 칼럼을 모아 <뾰족한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각 꼭지에 기존의 칼럼이 먼저 보여 주고 그 후일담과 그 외에 논의할 점을 덧붙였다. 책 제목이 특이한데 날카로운 눈으로 비판하자는 의미인가 했더니, 그런 건 아니고 두리뭉술하고 뭉툭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뾰족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개인적으로 세 번째 칼럼집인(벌써 세 번째 칼럼집을 낸다고 하니 다시 한번 위의 생각들이 얼마나 건방진 것인지 새삼 느낀다) 이번 책의 제목을 《뾰족한 마음》으로 지은 건 그래서다. 내가 생각하는 뾰족한 마음이란 세상에 뭔가 삐딱한 시선을 유지하며 전투적인 태세를 취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종종 그런 태도로 글을 쓰지만 그것과는 상관없다. 내가 뭘 해도 세상은 그대로라는 회의와 냉소에 빠질 꽤 많은 이유들에 무기력하게 타협하지 않기 위해 뾰족한 마음이 필요하며, 어차피 다들 자기 편한 대로 받아들이리라는 핑계로 사유와 언어를 벼리지 않고 뭉툭한 정념의 덩어리나 내뱉지 않기 위해서도 뾰족한 마음이 필요하다. 대단한 사람이라 뾰족한 게 아니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대단하지 않음이 모여 만들어낼 새로운 전망을 믿기 위해 뾰족해지려는 것이다. 이것이 자의식 과잉에 빠지지 않으면서 세상에 말 걸기 위한 내 나름의 방식이다. 아마 나만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칼럼은 대체로 TV 프로그램이나 웹툰처럼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그래서 더 강력한 매체들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공감했던 내용은 창작자와 ‘PC함’에 대한 꼭지였다. 창작자들은 ‘정치적 올바름(PC함)’이 창의성과 작품을 옥죈다며 ‘창작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바쁘다. 이를 다룬 기존의 <허지웅과 주호민의 데칼코마니 같은 PC주의 비판> 칼럼에 덧댄 논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과거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정치적 올바름과 살균된 문화’라는 글로 PC적 강박의 문제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비슷하게 무균실의 심상으로 일종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한 셈이다. 나는 이것을 창작의 자율성이 침해되는 것에 대한 작가들의 실존적 두려움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반박할 수밖에 없는데, 먼저 고기 먹는 모습이 현재로선 우리의 생활세계 안에서 크게 윤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장면일지 몰라도 기후위기와 공장식 축산의 상관관계가 우리 세대 혹은 다음 세대의 실존적 문제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과거에 아무 문제없던 장면과 대사가 새로운 경험적 맥락 안에서 새로운 윤리적 부담을 질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창작의 자율성과 상상력은 정말 새로운 세계의 전망을 남기는 예술적 동력이 되기는커녕 그냥 과거의 통념을 반복하기 위한 핑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당장의 창작물이 그 잘난 자율성으로 재현한 세계를 봐도 PC에 대한 우려는 과도한 면이 있다. 꼬마비 작가는 고기 먹는 모습을 그리지 못할 어떤 미래를 걱정하지만, 정작 조경규 작가의 2012년작 〈돼지고기 동동〉에선 주인공의 장인이 고기를 먹으며 굳이 채식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무엇을 먹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거지만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 지구의 생태계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라는 대사와 함께 누가 봐도 채식을 선언한 이효리를 연상케 하는 소주 광고 모델을 교차하는 연출은 저열한 수준이다. 육식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의 삶 안에서 조금이나마 지구의 생태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실천하겠다는 이들을 비웃고 비난하는 작품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고기 먹는 장면을 못 그릴 어느 미래를 걱정하는 게 과연 온당한 것일까. 오히려 창작의 뾰족함이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지만 새롭게 제기되는 윤리적 질문들을 진지하게 통과하며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통념 너머의 전망을 구체화하는 것 아닐까. 나는 그런 시도를 보고 싶다.

그걸 보니 생각나는 게 있는데, 코미디도 개인의 ‘창의성’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또한 ‘무엇이 웃긴지’도 사회 규범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이 예시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 여기에서 같이 나누고 싶다. 약 1년 전인 2021년 11월 말에 ‘개승자(개그로 승부하는 자)’에서 이수근, 윤형빈, 김준호, 이승윤, 김원효, 변기수 등의 코미디언들은 왜 개그 콘서트가 망했는지에 대해 토론했다(링크). 그들이 생각하는 이유는 대략 이랬다(캡처 링크). 김원효는 ‘엄격한 심의 규정’ 때문에 개그 소재가 제한적이 됐다고 주장했으며, 김준호는 이에 동의했고 변기수는 ‘불편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동료 코미디언인) 오나미에게 1차원적인 개그를 하면 ‘난리가 난다’며 ‘여성분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싸우지 좀 말아요’라고 했다. 엥, 아무리 봐도 대중들에게 뭐라고 하는 거 맞는 것 같은데요. 대중이 원하는 건 1차원적으로 외모 비하 같은 개그를 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남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은 무례일 뿐 웃기지 않다는 대중적인 공감이 형성되었는데 그 와중에 여전히 단순하게 ‘얘 봐요. 못생겼죠? (또는 뚱뚱하죠?) 하하하’ 하면서 웃기려고 하니 대중들이 불쾌함을 느끼고 돌아선 게 잘못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좀 더 조심하는 시대가 된 게 나는 왜 뭐가 나쁘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없으니 나쁘다’는 건가? 시대가 바뀌었으면 그걸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전체적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드라마 속 흥신소 클리셰는 사라져야 한다>라는 꼭지에서 위근우 기자는 아무리 개그맨이라고 해도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강조 표시는 인용자).

KBS 코미디 서바이벌 프로그램 〈개승자〉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개그맨 김준호는 공개 코미디가 몰락한 이유에 대해 “개그는 개그일 뿐인데, 다 비하로 본다. 우리는 비하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유별나게 까다로운 기준이 제시되는 게 아니다. 창작자라고 해서 화용론적 맥락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도만으로 평가받는 특혜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한국 드라마 속 흥신소든, 한국 코미디의 외모 비하 개그든, 박태준 만화에서의 일진 놀음이든,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의 타임슬립이나 환생이든, 수많은 장르적 문법이 각각의 세계 안에서 자체적으로 완결된 놀이 규칙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장르적 세계가 현실과 온전히 분리된 허구여서가 아니라, 그래도 된다는 합의가 현실 세계에 암묵적으로 이뤄졌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 창의성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도 모르겠다. ‘PC’를 지키라는 게 (예컨대 상대가 웹툰 작가라고 한다면) 자기 작품에 날씬한 캐릭터를 넣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뚱뚱하다’라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는 뜻도 아닌데 말이다. 어떤 인물이 지나가는 여자의 다리를 보고 “엄청 굵네. 완전 무 같다.” 뭐 이런 대사를 하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웃긴’ 장면으로 의도된 게 아니라 이 인물의 됨됨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면 말이다(그리고 이런 의도라면 이런 인물이 긍정적으로 그려질 리는 없겠지만). 그러면 독자는 “아, 이 인물은 꼰대 같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으며 심술궃은 인물이군.” 하고 알아챌 것이다. 문제는 창작자라는 사람들이 이걸 ‘웃긴’ 장면이라고 의도하고 넣으려고 들기 때문에 “엥, 왜 그러면 안 돼?” 하고 반발한다는 거다. 남의 몸매를 품평하는 게 어디가 재밌다는 거지? 이게 왜 불쾌한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웹툰이든 웹소설이든, TV 프로그램이든, 하여간 남들이 볼 수 있는 창작물을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 보는 사람 속만 터질 테니까.

읽으면서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는 이 칼럼집에서 ‘옥의 티’를 찾자면 단연코 편집자의 무능 또는 직무 유기다. 실사 영화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가 부른 노래 제목 ‘Speechless’가 ‘Speachless’로 잘못 쓰여 있는데 이게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실렸다니 편집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 것’(’아무것’은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처럼 틀린 맞춤법도 허다하다. 나는 작가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고, 맞춤법까지 완벽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건 편집자의 일이다. 그런데 이 모양이라니? 개중에 자존심이 센 작가들은 ‘내가 쓴 글 중 단 한 글자도 고치지 마시오!’ 하고 고압적으로 굴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위근우 기자가 그럴지도 의문이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오류나 오탈자는 고치게 해 주십사 빌어서라도 교정﹒교열을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맞춤법만큼은 완벽하게 지키려고 눈이 빠지도록 모니터를 쳐다봤는데 왜 너희는 안 하세요… 🥲 내가 이러려고 교정﹒교열 봤나. 자괴감이 든다.

프롤로그에 쓰인 위근우 기자 말대로, ‘이렇게 말해 봐야 뭐하나’ 싶은 때도 분명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지적하기를 멈출 수는 없고, 완전히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아니 낫게 만들기 위해 계속 논의하자는 의미에서 이 책을 권한다.

(…) 다시 한번 고백하지만 여기 실린 글들은 처음 공개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진 못했다. 책으로 묶인 지금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패배주의도 겸양도 아니다. 대단하지 않지만 무의미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범위에 글의 정직한 권위가 존재한다. 그 정직함 위에서 나와 당신, 우리들 각각의 뾰족한 마음은 섣부른 낙관과 건방진 냉소에 침식되지 않은 채 가능한 삶의 전망을 위한 논의의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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