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스테이션 일레븐>

[책 감상/책 추천]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스테이션 일레븐>

 

 

⚠️ 아래 서평은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문학보다 비문학 작품을 더 많이 읽는다. 이건 내가 문학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학부 때도 언어학 수업보다는 문학 수업을 더 좋아했다. 그런 지금 내가 문학, 특히 소설을 잘 안 읽는 건, 그냥 ‘좋은’ 작품을 고르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게는 ‘제대로’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이게 내 전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살면서 실패하기 싫은 성향에서 비롯된 걸지도?) 웬만해서는 고전 작품, 그러니까 이미 ‘좋다’라는 합의가 끝난 작품들을 읽는다. 굳이 현대 작품을 읽어야 한다면 역시나 같은 기준에 따라 누가 봐도 잘 쓰였다고 인정하는 것,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토니 모리슨처럼 인정받는 작가들 작품 위주로 찾아서 본다.

그래서 이렇게 나름대로 평이 좋다는 현대 작품을 읽었는데 내 취향이 아닐 땐 정말 그 작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파심에 밝혀 두자면, 나는 이 작품이 쓰레기라고 말하자는 게 아니다. 이 소설이 그냥 내가 기대하던 것, 평소에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는 얘기다.

일단 이 작품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은 인류의 종말을 다루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토론토의 한 극장에서 시작하는데, 아서 리앤더라는 배우가 <리어 왕>을 연기하다가 중간에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마침 앞줄에 있던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던 한 남자(이름은 지반)가 바로 무대로 뛰어올라와 응급 처치를 한다. 하지만 그 응급 처치가 무색하게도 아서는 사망하고, 지반은 극장을 떠나 집으로 가던 길에 의사 친구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는다. 이것은 후에 ‘조지아 독감’이라 불리게 되는 전염병인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감염자는 하루이틀 내에 사망한다. 조지아 독감은 인류를 거의 전멸시킨다. 이 소설은 이 ‘문명 붕괴’ 후에 살아남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린다.

살아남은 이들 중 몇몇은 ‘유랑 악단’에 속해 이곳저곳 떠돌면서 셰익스피어의 극을 올리거나 음악을 연주한다. 이 이야기의 여러 주인공들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키어스틴도 그중 한 명인데, 키어스틴은 사실 아서 리앤더가 연기한 <리어 왕> 프로덕션에서 아역으로 활동했고, 그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닥터 일레븐> 만화책 두 권은 아서 리앤더의 첫 번째 아내였던 미란다 캐럴이 쓰고 그린 것이다. 아서 리앤더의 아내와 자식에 관전해 더 큰 반전이 있지만 이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이런 식으로 주요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아서 리앤더와 연관이 있는데, 나는 이 점이 제일 큰 의문 중 하나였다. ‘왜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이 그와 연결돼 있어야 하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역들이 다 그와 접점이 있는 건 좀 너무 억지스럽지 않나? 저자가 결국 이 아서 리앤더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조지아 독감이라는 소재를 끌어다 쓴 느낌이었다. 문명이 붕괴한 세계의 이야기가 주가 될 줄 알았는데 아서 리앤더라는 영화배우 이야기가 메인인 거 같아 실망스러웠다.

내가 ‘문명이 붕괴한 세계’ 이야기와 유랑 악단이라는 소재에서 기대한 건 이런 거였다. 글자 그대로 먹고살기가 목적이자 미덕인 시대에 예술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관한 고뇌,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그게 굳이 예술이 아니더라도 예의라든가 친절이라든가 등등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겠다), 그리고 문명이 붕괴한 후에 자라난 세대들은 같은 셰익스피어의 극이라도 우리와 다르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 이렇게 문명 붕괴 후 세상에 대해 상상해 볼 여지가 참 많은데 이 책으로는 그게 채워지지가 않아서 너무 아쉬웠다. ‘조지아 독감’으로 인류의 99.99%가 죽고 난 후 20년쯤 흐른 시간적 배경에서, 여전히 유랑 악단을 유지하는 이유가 뭘까? 문명이 붕괴했는데도 예술을 추구할 이유가 도대체 뭐지? 난 그걸 작가가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책 내에서 유랑 악단이 공연 비슷한 걸 하는 건 딱 한 번, <한여름 밤의 꿈>을 리허설하는 게 전부다. 후에 일이 생겨서 연극은 올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에 따르면 <햄릿>, <리어 왕>, <겨울 이야기>와 <로미오와 줄리엣>도 과거에 올렸다는데 우리가 그 모습을 보게 되지는 않으니 이 유랑 악단의 존재 의의가 정말 무엇인가 싶다. 문명 붕괴 상태에서도 예술은 소중하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에 유랑 악단을 설정한 게 아닌가? 유랑 악단의 선두 마차에는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쓰여 있는데, 그래서 이 유랑 악단이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해 주는 일이 소설 내에서 일어난다고 나는 느끼지 못했다. 키어스틴과 유랑 악단 멤버들이 의문의 사고를 당하는 와중에 중간중간 아서 리앤더와 과거에 연결된 인물들(미란다나 지반, 클라크 등)의 시간대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나온다. 예술에 대한 사유가 등장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면 예술에 대한 사유가 부재하는 건, 역시 인간은 배 부르고 등이 따수워야 예술을 즐길 수 있다고 저자가 믿기 때문인 걸까? 그래서 유랑 악단들이 몇몇 인물을 제외하고는 이름 대신 ‘비올라’, ‘클라리넷’이나 ‘제1첼로’, ‘제3첼로'처럼 처럼 각각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 이름으로 불리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걸까? 아무렴요, 일단 생존이 보장되고 배가 불러야 예술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

답답한 부분은 하나 더 있다. 책 마지막에 키어스틴 일행은 어찌저찌 해서 잃었던 유랑 악단 멤버들을 다시 합류하게 된 곳에서 클라크(아서 리앤더의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기를 쓰는 도시’가 저 너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유랑 악단이 그곳을 향해 가기로 하는 것으로 책은 끝이 난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요? 나는 오히려 차라리 문명 붕괴 이후 유일하게 전기를 쓰는 도시를 배경으로 해서 그들이 어떻게 그 도시를 다시 일구어 나갔는지, 어떻게 다시 전기를 발전시켜 문명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했는지, 주민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듣고 싶다. 뜬금 없이 막판 되니까 갑자기 희망적이 되는 게 너무 어색했다. 뭐, 문명 붕괴 후에도 예술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극 중 유랑 악단을 통해 보여 준 것도 아니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전기 쓰는 도시’가 문명의 상징처럼 제시되니까 너무 황당하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든 부분은 딱 이 두 부분이다.

사라진 것들의 목록:

바닥에서 초록색 불빛이 올라오는 수영장의 염소 처리된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일. 야간 조명등 아래에서 하는 야구 경기. 여름밤 나방이 몰려들던 현관 등.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며 도시 아래를 달리던 지하철. 도시. 영화. 다만 아주 드물게, 발전기를 돌리느라 대사가 절반 이상 안 들리는 영화를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연료가 완전히 소진되기 전까지였다. 자동차 연료는 이삼 년 지나면 오래되어 못 쓰게 되었고, 비행기 연료는 좀 더 오래가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다.

콘서트 무대를 찍기 위해 사람들이 머리 위로 휴대전화를 들어 올릴 때 어스름 속에 빛을 내뿜던 액정화면. 다채로운 할로겐 조명이 밝혀주던 화려한 무대, 전자음악, 펑크록, 전기 기타.

의약품. 손을 살짝 긁히거나 저녁을 차리려고 야채를 썰다가 손가락을 살짝 베이거나 개한테 물렸을 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

비행. 하늘에서 여객기 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불빛이 수놓인 도시들을 내려다보는 일. 10킬로미터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시각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 비행기. 좌석 테이블을 접어서 잠가달라는 요청. 아니, 사실 비행기는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활주로와 격납고에, 잠든 채로. 날개에는 눈이 쌓여갔다. 겨울에 비행기는 식품저장고로 안성맞춤이었다. 여름이면 과수원 근처에 있는 비행기는 더위에 말라버린 과일을 담은 쟁반들로 가득 찼다. 10대들은 그 안에 숨어들어가 섹스를 했다. 녹이 꽃처럼 활짝 피고 줄줄 흘러내렸다.

국가. 국경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방서와 경찰. 도로 보수 작업과 쓰레기 수거 작업. 케네디 우주센터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와 반덴버그 공군기지, 플레세츠크 우주기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솟아오르던 우주선. 그 우주선이 대기층을 통과하며 만들어내던 불꽃.

인터넷. 소셜 미디어. 화면을 스크롤하며 지루하고 장황한 꿈 이야기와 불안한 희망과 음식 사진과 자살 예고와 자기 자랑과 하트 아이콘으로 된 연애 상태 업데이트와 곧 보자는 말과 각종 청원과 불평과 욕망과 할로윈에 곰이나 피망 모양의 옷을 입힌 아기들 사진을 보는 일. 다른 사람의 삶을 읽고 댓글을 다는 일. 그럼으로써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던 일. 아바타.

고요한 오후 시간 동안 지반은 도시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모든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생각했다.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비인간성을 개탄했지만 그에게는 그게 다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현대사회는 결코 비인간적이지 않다. 거대하고 정교한 사회기반시설이 존재하고, 거기서 사람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일했다.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를 멈추자 사회 전체가 서서히 작동을 멈췄다. 주유소나 공항으로 연료를 배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자동차가 오도가도 못 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날 수 없다. 트럭들이 원산지에 멈춰 있어 식량이 도시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래서 식료품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상점들은 약탈당한다. 발전소나 변전소로 출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전선 위로 쓰러진 나무를 치우는 사람도 없다. 지반이 창가에 서 있을 때 전기가 나갔다.

아쉽다. 인류가 왜 예술을 하는지에 대해 깊이 살펴볼 기회가 낭비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뭐, 이 책을 재밌게 읽은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는 거다.

 

(HBO 미니 시리즈 버전 <스테이션 일레븐>의 트레일러)

 

(’<스테이션 일레븐> 비기너스 가이드’란 제목의 짧은 프로모 영상)

이 책은 동명의 TV 미니 시리즈로도 제작되었는데, 당연히 원작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예컨대 등장인물들이 책과는 다른 지점에서 만난다든가, 배경 이야기가 바뀐다든가, 플롯이 추가되거나 삭제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어차피 원작 소설에 크게 실망해서 이 미니 시리즈를 시도해 볼 마음은 안 난다. 누군가는 이 TV 미니 시리즈를, 또는 이 소설을 좋아하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다. 그저 종이책 기준 456쪽의 장편 소설을 한 권 읽어 냈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