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케이트 쇼팽,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케이트 쇼팽은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The Story of an Hour)>은 내가 학부생 시절 영미단편소설 수업에서 배운 적이 있는 작품이다. 내가 읽은 이 번역본은 표제작을 비롯해 총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각 단편소설의 간단한 줄거리와 인상 깊은 구절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몇몇 작품은 반전이 중요하므로 반전까지는 밝히지 않겠다).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에서 맬라드 부인은 남편이 열차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폭풍 같은 슬픔이 가라앉자 자기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유, 자유, 자유다!” 공허한 눈길과 두려운 표정도 잠시, 곧 눈이 열정적으로 밝게 빛났다. 맥박이 빠르게 뛰었고 몸의 구석구석으로 피가 끓어올랐다가 서서히 안정되었다. (…) 이제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는 누군가를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 것이다. 같은 인간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해도 된다고 믿는 이의 아집으로 인해 감정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었다. 의도가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덜 범죄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하나같이 폭력이었다는 것을 부인은 그 짧은 시간에 깨달았다. 물론 부인도 간혹 남편을 사랑하기는 했다. 대체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제 자기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된 마당에 사랑이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천착할 필요는 없었다. “자유! 몸과 영혼의 자유!” 부인은 작은 소리로 계속 이 말만 되뇌었다.
케이트 쇼팽,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최면>에서 최면술사인 그레이엄은 친구 패버햄에게 본인의 약혼녀 폴린을 매력적인 여인으로 보도록 최면을 건다. 최면이 성공해 폴린을 혐오하던 패버햄은 그녀를 다정하게 대하고, 폴린도 마음이 흔들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최면이 불러온 이 결과에 놀라면서도 그들이 결혼하도록 양보해 준다. 하지만 그 최면은 정말 영구적인 것일까? 그 최면의 효과가 사라지면 패버햄이 폴린을 버리는 것은 아닐까?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열병일 거예요. 나도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이전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거든요.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게 가장 좋고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하면,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보다시피 내 기질 전체가 완전히 바뀐 것 같아요. 난… 난… 아! 그 사람이 너무 좋아요!” 고백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도 폴린은 다른 여자들처럼 얼굴을 가리거나 수줍어하지 않고 약혼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패버햄이 일전에 브라우닝의 시를 읽어주던 큰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이미 날도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폴린의 얼굴에 전에 없던 광채가 어렸다. 결코 그레이엄이 만들어줄 수 없었던 빛이었다. 그가 미처 알지 못한 폴린의 영혼 속에 그녀를 들뜨게 하는 힘의 근원이 깊이 자리잡은 듯했다. 케이트 쇼팽, <최면>
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은 이기적인 것. 그녀는 자유의 기쁨을 만끽했고 약혼자의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어떤 상투적인 문구나 말도 삼갔다. 그레이엄을 괴롭히는 것은 또 있었다. 그가 건 최면이 어떻게 유지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효력을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이엄이 브랜치로 돌아와 맨 처음 친구를 만난 순간 감지했듯 패버햄은 아직 최면에 걸린 상태였다. 최면이 그레이엄의 통제를 벗어난 것 같았다. 그것이 가져온 파장을 생각하니 무서워서 몸이 떨렸지만, 일단은 아무 일도 아닌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분간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간밤에 패버햄은 그레이엄에게 이렇게 말했다.
케이트 쇼팽, <최면>
그레이엄은 패버햄이 결혼 전에 폴린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그 혐오감이 최면으로 없어지기는 했으나 최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해도 좋은지, 세부적인 내용의 어느 정도가 자신의 능력 밖인지 그레이엄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최면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내내 그레이엄을 괴롭혔다. 만약 패버햄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옆에 누운 여인이 꼴도 보기 싫으면 어쩔 것인가! 패버햄의 사랑이 점점 옅어져 어느 사이엔가 폴린을 파괴하고 마모시켜서 생이 다할 때까지 쓰라림을 맛보게 하면 어쩌나! 그레이엄은 첫 몇 달 동안 결혼한 친구 내외를 자주 방문했다. 부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들이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들의 말이 옳았다. 무의식적인 자극이 서로에게 온화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둘은 시인의 꿈에나 존재하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였다.
케이트 쇼팽, <최면>
<아내의 편지>에서 죽음이 가까워진 여자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남편이 아닌 남자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부디 꾸러미를 열어보지 말고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며 남편에게 처분을 맡긴다. 남편은 그 편지를 열어 볼까 말까, 버릴까 말까 고민한다.
“이 물건을 남편에게 맡깁니다. 의리와 사랑이 충만한 분이시여, 부디 꾸러미를 열어보지 말고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는 물건을 꽁꽁 봉하는 대신 포장지가 들뜨지 않게 끈으로만 묶었다. 그래야 언제든 꺼내보면서 벅찬 심장 박동을 느끼던 시절의 꿈 같은 기억에 젖을 수 있을 테니까.
케이트 쇼팽, <아내의 편지>
<라일락>은 다 읽고 나서도 ‘이게 뭐지…?’ 하다가 책 맨 뒤에 있는 역자의 후기를 읽고 나서야 ‘아하!’ 했던 작품이다. 에드리언 파히발은 수녀원에서 자랐지만 현재는 파리의 인기 있는 가수 겸 연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문득 수녀원 시절이 그리워져 모든 것을 다 버려 두고 수녀원으로 향한다.
“맞아요, 아가스 수녀님.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침울했던 기분이 확 바뀌더라고요. 그 길, 그 길에서 나는 소음,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마법처럼 제 의식에서 싹 사라져버려요. 그러고는 지금처럼 푸른 풀밭에 발을 파묻고 선 듯한 기분이 들죠. 눈에는 낡은 흰 돌담 틈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만 보이고, 귀에는 지금 듣는 것과 같은 새소리와 곤충의 웅웅거리는 소리만 들려요. 빽빽한 가지에 매달린 라일락 꽃송이가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고 향기 때문에 숨쉬기도 어려워요. 아가스 수녀님, 올해는 라일락이 더 풍성한 것 같아요. 그래서 미칠 것 같았어요. 저도 저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제가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완전히 신열에 들떠 집으로 되돌아갔죠. 그러곤 외쳤어요. ‘소피! 내 트렁크, 얼른, 검은 거 빨리 가져와! 옷 몇 벌만 챙겨! 나 갈 거야. 아무것도 묻지 마. 2주 후에 돌아올게.’ 그때 이후로 매년 그래요. 라일락 향이 훅 끼치면 떠나야 해요. 아무도 못 말려요.” “나도 라일락 덤불을 보면서 에드리언을 기다려요. 에드리언이 오지 않으면 봄은 봄이 아니에요. 봄은 왔는데 해가 뜨지 않고 새가 울지 않는 것과 같아요. 근데 그거 알아요? 에드리언이 좀 전에 말한 것처럼 기운이 죽 빠지는 순간이 나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고, 사랑하고 공감해줄 준비가 된 하늘에 계신 우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마음과 이 마음이 혹시 다르지는 않을까 걱정돼요.”
케이트 쇼팽, <라일락>
<데지레의 아기>에서 데지레는 원래 발몽드 부인이 저택 앞에 놓인 고아였다. 마음씨 착한 발몽드 부인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사랑에 빠져 데지레를 자신의 자식처럼 키웠다. 어느 날, 데지레를 본 아르망 오비니라는 청년이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결혼하고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둘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자 그들의 행복도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만다.
아기가 석 달 정도 됐을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데지레는 문득 자신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처음에는 뭔가 심상찮기는 했지만, 아주 미미해서 그것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흑인들 사이에 수상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평소에 별 왕래가 없던 먼 이웃이 갑자기 집을 오갔다. 아르망의 태도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꺼림칙하게 변했다. 그러나 데지레는 차마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이제 아르망은 불가피하게 아내와 말을 할 때도 데지레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사랑 가득한 눈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르망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집에 있게 돼도 데지레와 아기를 마냥 피했다. 사탄의 그림자가 다시 내려와 덮친 듯 노예들도 험하게 다루었다. 데지레는 비참해 죽을 것 같았다. 어느 찌는 듯한 오후, 데지레는 실내 가운을 입고 방에 앉아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온 길고 매끄러운 갈색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하릴없이 훑어내리고 있었다. 아기는 새틴을 댄 덮개로 인해 호화로운 왕좌처럼 보이는 웅장한 마호가니 침대에 반쯤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콰드룬(백인과 반백인과의 혼혈아, 흑인의 피를 1/4 받은 사람―역주)인 라 블랑쉬 아이 하나가 공작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아기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데지레는 슬프고 멍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면서 그녀를 옥죄는 위협의 실체를 꿰뚫으려 안간힘을 썼다. 데지레는 아기와 아기 옆에 선 소년을 여러 번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몸속의 피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느낌이었고,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케이트 쇼팽, <데지레의 아기>
<바이유 너머>는 ‘미친 여자’ 라 폴이 사랑의 힘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라 폴은 텅 빈 들판에 도착했다. 소중한 체리를 안고 들판을 가로지르며 이쪽저쪽 불안한 듯 계속 둘러보았다. 바이유 너머 세상에 대한 무시무시한 공포가,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짓눌렀던 병적이고 이상한 두려움이 사정없이 몰려왔다. 바이유에 도착하자 라 폴은 그 방법말고는 체리를 살릴 길이 없는 것처럼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아, 나리! 주인 나리! 이보시오, 동네 분들! 살려주세요!” 어디서도 대답이 없었다. 체리의 뜨거운 눈물이 라 폴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곳에 있을 만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모두 불렀지만 헛수고였다. 라 폴은 울며불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찢어지도록 울부짖어도 처절한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체리는 계속 끙끙 앓고 울면서 엄마한테 데려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라 폴은 절망적인 얼굴로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극심한 공포가 그녀를 휘감았다. 라 폴은 아이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에 바짝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꼭 감고 바이유의 얕은 둑을 따라 달리기 시작해서 맞은편 기슭에 기어오를 때까지 한순간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케이트 쇼팽, <바이유 너머>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한데, <바이유 너머>에는 작은 오류가 있다. 라 폴이 업어 키운 거나 마찬가지라 아주 아끼는 라 폴의 주인님(참고로 본문에 “그는 예쁜 딸아이들과 어린 아들을 둔 어엿한 중년의 가장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귀여운 시절이 다 지나 털이 부숭부숭한 아저씨가 되었어도 여전히 아기 시절처럼 사랑할 수 있다니 놀랍다…)은 ‘체리’라고 불리는데 원문을 찾아보니 ‘Cheri’라고 되어 있다. ‘라 폴(La Folle)’에 “미친 여자를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역주를 달아 놓았으면 이 ‘Cheri’가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는 애칭 ‘셰리(Chéri)’라는 걸 몰랐을 리가 없지 않나? ‘도련님’이라 옮긴 부분도 원문을 찾아보니 ‘P'tit Maitre(작은 주인님, 즉 도련님)’이라고 되어 있다. 프랑스어 단어가 이렇게 나오는 걸로 봐서 ‘Cheri’도 프랑스어려니 생각하고 찾아봤다면 ‘Chéri’에서 e 위에 있어야 할 점이 실수로 빠졌나 보다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이걸 왜 ‘체리’라고 읽는지 모르겠다. 나처럼 프랑스어 알파벳조차 모르는 사람도 이건 대충 눈치로 때려 맞히겠는데.
그래도 덕분에 케이트 쇼팽의 단편을 네 편이나 더 알게 되었으니 감사해야지. 개인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제외하고 <최면>과 <데지레의 아기>가 제일 흥미진진했다. 반전이 충격적이어서 마음에 든달까. <라일락>은 그 ‘묘한’ 기류의 이유를 이해하면 약간 이렇게 (🤭) 웃게 된다. <아내의 편지>는 궁금증과 의심으로 미쳐 가는 남편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바이유 너머>는 솔직히 다 읽고 나서 ‘그래서 어쩌라고요?’ 하긴 했다.
참고로 케이트 쇼팽의 작품은 저작권이 소멸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쉽게 원문을 다 읽어 볼 수 있다. 영어 공부 또는 번역 대조를 위해 찾아보시고 싶은 분들은 땡잡은 거나 마찬가지. 각 단편소설 제목만 보면 대충 원래 제목이 뭐였을지 다 추측이 되니 부연 설명이 필요 없지만, <최면>만 ‘Hypnosis’가 아니라 ‘A Mental Suggestion’임은 알려드리고 싶다.
케이트 쇼팽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각성(The Awakening)>인데 이건 아직 안 읽어 봤다. 이것도 기억해 두었다가 읽어 봐야지. 마지막으로 케이트 쇼팽 이외에 페미니즘 소설의 맛을 더 보고 싶다면 샬롯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를 강력히 추천한다. <노란 벽지>라고도 번역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누런’이 더 뉘앙스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제목의 ‘누런 벽지’는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여성이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 당하며 지내는 육아실의 벽지를 가리킨다. 이 단편소설은 이미 국내에 번역본이 여럿 나와 있으므로 아무거나 취향에 맞는 걸로 골라 보시면 된다. 그럼 모두들 즐거운 독서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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