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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by Jaime Chung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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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나는 좋아하는 배우가 생기면 그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다 훑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 작가의 책을 다 섭렵(하려고 노력)한다. 정지음 작가는 내가 <언러키 스타트업>을 읽었을 때부터 하도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해서 아마 내 블로그 독자님들도 아실 거라 믿는다. 어쩌다 보니 책이 나온 순서대로가 아니라 뒤죽박죽으로 읽게 되었는데 그래도 책들은 여전히 좋고 재밌다.

이 책은 특히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안 그래도 요즘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정말 딱 맞춤인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제일 공감했던 부분 몇 군데만 공유해 보자면 이렇다(보시면 알겠지만 작가님의 미친 비유가 적재적소에 쓰여 빛을 낸다).

아래 인용문에서 작가님은 ‘(상대와) 같은 수준으로 곤두박질친 나의 바닥까지 견뎌내야’ 해서 누구를 미워하는 일이 고되다고 했지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화를 내도 그 부정적인 에너지를 내가 다 안고 있어야 하기에 힘들다고 느낀다. 넬슨 만델라는 증오란 자신이 독을 마셔 놓고 자신의 적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 했던가. 결국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미움을 내려놓고 나를 편하게 해 주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게 내 경험에서 나온 나의 답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애가 당장 나자빠져 불행해지기만을 바랐다. 흑마술적 염원이라기보다 몹시 화가 나 품위부터 벗어제낀 나의 알몸 포효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고약함과 심약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애의 비참한 말로를 소망했다. 혹시나 이뤄질까 취소했다가도 때론 취소를 취소하고 싶어 찔찔 울었다. 그 애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는데, 그 애를 사랑하던 시절은 언제고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우리의 그때 말고 나의 그때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한 사람의 악행에 어째서 두 사람의 순수를 해하는 힘이 실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지독한 억울은 거의 통증에 가깝다는 사실을 배웠다. 실제로도 가슴속이 아렸고, 그 부분에 얹힌 울분을 빼려고 팡팡 두드리다 보면 겉도 아파졌다.

시달리는 와중에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격언이 떠오르기도 했다. 원수가 생겨보기 전에는 깊이를 알 수 없던 말이었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남을 미워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의 백 곱절로 고되었다. 마치 흉곽으로 하는 강제 노역 같았다. 사랑에도 많은 품이 들지만 증오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기약 없이 싫어하다 보면 내 심장이 아직 빛깔 좋고 통통한 자이언트 자두였을 때가 그리워졌다. 사랑하면서 더 나은 사랑을 전제로 벌이는 다툼에는 힘든 만큼 빛나는 가치가 있었다. 그것은 싸우는 동안 내 것이 아니게 된 사람에게 내 품으로 복귀하라고 뻐꾸기를 보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움을 지속하기 위해, 오로지 미움으로 끝장을 내자고 싸우는 일에는 남는 것이 없었다. 타인을 너무 미워하다 보면 제일 싫어지는 것은 나였다. 나는 상대방의 바닥을 목도하는 과정에서 같은 수준으로 곤두박질친 나의 바닥까지 견뎌내야 했다. 그 와중에도 두 바닥 중 어느 것이 더 깨끗한지, 누가 더 고차원의 인간인지 저울질해야만 속 시원해지는 나를 참기 힘들었다. 나는 점차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나에 대한 비판을 구분할 수 없어졌다. 그런 식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은, 원수를 응징하려던 밧줄로 네 목을 조르는 일을 멈추라는 말 같기도 했다.

이건 비유가 너무 웃겨서. 꽃게-칫솔 이 흐름이 진짜 너무 웃겨서 눈물 날 뻔ㅋㅋㅋㅋ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너 같은 사람 만나 봐라’ 이건 칭찬일…까? 🤔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두 명의 사랑 싸움이기에 나는 늘 변종이 되고 싶은 의지를 참아냈다. 차라리 비행기 속 프로페셔널한 승무원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비상구를 안내하듯이, 우리에겐 헤어지는 방법이 있으며, 사실 그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밀물 시간인지 모르다 파도에 철썩 얻어터진 꽃게처럼 거품을 물었다. 나는 그 입에 칫솔만 꽂으면 양치질 같겠거니 상상하면서, 대충 화해하거나 진짜로 헤어지거나 때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는 그가 떠난다는 사실보다 마지막에 던지고 간 저주가 더 마음에 걸렸다. 가짜 제우스는 내가 상대방을 약 올리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이상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라며 울부짖었다. 꼭 너 같은 사람 만나보라고 핏대를 세우기도 했는데, 내겐 그 말이 모순된 축복처럼 느껴졌다. 나 같은 사람이면 괜찮은 인간일 것 같았고 그렇다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으리란 그의 말은 그의 목소리로 뒤집히는 셈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가 빈약한 자라고 흉보며 그의 뒷모습에 대고 쯧쯧거렸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삶에서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날 거라는 부분에 공감. 내가 있는 곳이 바뀌어도 내가 나인 한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이기에 어떻게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굴의 ADHD 용사는 절망을 오래 갖고 놀 수 없는 법이다. 당시엔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큰 위로를 받았다.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타인의 악의에 악의로만 맞서고 싶은 격정을 타이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 내가 매일 하는 생각의 중심은 ‘저 사람’, 즉 남이었다. 하지만 ‘삶이 내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저 사람을 보냈을까?’라고 생각하면 다시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 내 인생의 조연들이 오로지 장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삶이 하는 말들을 빨리 알아듣고 싶어졌다.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될까 두려웠다. 삶은 지루하고 압도적인 호랑이 선생님이니까, 내가 훌륭해질 때까지 불행으로 가장한 가르침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부분은 도티끌의 <이 나이에 이럴 줄은>에도 인용했지만 너무 좋아서 또 한 번 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후 인생의 최고 암흑기가 닥쳤을 때 나는 지인들의 덕질에서 큰 힌트를 얻게 된다. 나는 하필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못나고 재능 없고 마이너해서,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멋쩍은 사람을 좋아하기로 정해버렸는데, 그건 바로 ‘나’였다.

어차피 내 주변 덕후들의 사랑도 항상 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다. 팬심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아티스트들은 언제고 사고를 쳐 누적된 사랑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곤 했다. 맹목적인 팬심은 이럴 때 빛을 발했다.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 때도 사랑하고, 모두의 사랑이 떠나갈 때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나는 일반인이기에 남들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누가 주지 않으면? 초라하게나마 자급자족을 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망한 짓이었다. 나를 들여다볼수록 내가 딱히 사랑스럽지 않다는 사실만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살면서 한 번도 연예인 권유를 받아본 적 없는 내가, 오로지 남들보다 뒤떨어질 때만 특별해본 내가 나 자신의 사랑일지언정 무조건적으로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고민되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점에 지친 것이기도 했다. 계속하여 나라는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고, 대가로서의 사랑을 벌어내는 일이 힘겨웠다. 노력해도 자꾸 외로웠기 때문에, 이제는 보상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코뿔소의 뿔처럼 그냥 힘센 사랑만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려면 사랑스러워지려는 노력보단 나 자신을 자꾸 검열하려는 습관을 치우는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의 나는 어떤 예술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내 안의 1인 팬클럽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추켜세웠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관찰 예능이었다. 회사에 가는 것, 청년 드라마였고 연애는 (흥행 성적이 처참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치환되었다. 내가 아름답지 않을 때마다 모든 것이 휴먼 다큐의 일면이라 생각했다. 억지로나마 반복하다 보니 어찌저찌 조각보 같은 자기애가 완성되었다. 게다가 이 방법은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나를 복구할 수 있다는 면에서 경제적이었다.

자신이 너무 싫을 때면 덕후계의 유명한 격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라는 문장이었다. 내가 계속 나를 사랑하리란 사실만이 절대적이고, 나에게서 ‘탈덕’할 수는 없다고 정해놓으니 지금의 끔찍함도 일시성을 띠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질문도 ‘콱 죽어버릴까, 말까’에서 ‘언제쯤 지금의 휴덕 상태를 거두고 덕질로 복귀할 수 있을까’로 옮겨 갔다. 그럼에도 용기가 나지 않으면 포털의 연예 뉴스를 보았다. 심각한 사고를 치고도 아직 누군가의 우상인 사람들이 한 트럭이었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팬들에 나를 대입하면 내 팬심도 특별한 것은 없어 보였다.

분명 저자는 나보다 조금 어린데 그래서인지 저자가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해 넘치는 사랑을 숨기지 않고 표현할 때마다 함박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이런 관계를 좋아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그냥 작가님 팬인 걸까.

언젠가 밥을 먹던 동생이 무심코 ‘존맛탱’이라는 표현을 썼다. 엄마는 들고 있던 스뎅볼로 걔를 다섯 대나 갈겼다. ‘존맛탱’의 ‘존’은 당연히 ‘존나’일 테니, 어른들 계시는 자리에서 비속어를 쓴 죄였다.

댕! 댕! 댕! 댕! 대앵⋯⋯.

“아아악! 악!”

스뎅볼이 남의 두개골에 부딪치는 소리는 참 경쾌하다. 그 소리는 보기에도 재미있어서 산사의 맑은 종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엄마의 기분은 탁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진실로 불쾌해 보여서 교양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자매는 교양을 박차고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의 귀가 없으면 우리는 장난스럽고 규칙 없는 말투로 대화한다. 35세인 언니나 31세인 내가 동생보다 어려지는 것 같고, 그건 27세인 동생이 우리 나이로 승격되는 것보다 웃겼다.

욕을 진짜 줄여야지 생각하면서도 욕을 줄일 수 없는 난… 세상에 욕할 일이 많아서가 아닐까?

가끔은 내가 욕을 많이 하는 건지 세상에 욕할 일이 많은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삶이 고난을 줄 때 스스로 구제할 수 없으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좆 됐다’는 패배 선언이기도 했다. 숨긴 대사는 명확하다. “인생아, 내가 졌고 네가 이겼다.” 느낀 대로만 수긍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좆 됐다’라는 발음으로 한 번 더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욕하는 습관은 글 쓸 때 제일 곤란했다. 공백의 화면 앞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참으로 고를 만한 단어가 없었다. 이건 슬프거나 뛸 듯이 기쁘거나 민망하거나 화가 나거나, 아프거나 아프지 않을 때를 전부 ‘좆 됐다’로 얼버무리던 인간의 최후였다. 노트북 앞에서 곤궁한 어휘들을 배열하다 보면 엄마가 동생에게 느낀 불쾌감을 알 것도 같았다.

삼십대를 기점으로 욕을 줄이고 욕을 부르는 정서와 화합하려 애쓰고 있다. 언제쯤 수많은 욕들을 내 안의 사어(死語)로 만들 수 있을까? 산 만큼 더 살아 환갑이 되면 늠름한 아나운서처럼, 아니 엄마처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 인생의 신이 되어 욕설 옆에 정렬되기 상서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인간 선에서 가능한 건 오늘의 욕을 줄여 내일과의 연관성을 해제하는 것뿐이다. 단단해지려는 노력은 결국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고, 욕설이 섞이지 않은 언어로 생각해본다.

정지음 작가님을 알게 된 이후 이제 내 소원은 “유통기한 지난 비인기 삼각김밥처럼 폐기”되었다거나 “침대 속에 파묻혀 솜이불이 날 핥는다고 느낄 때만 행복하다” 같은 비유를 툭툭 던지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카페에서의 충격을 에너지 삼아 완벽한 시간표를 짰다. 새벽 6시 기상, 샤워, 뉴스 읽기, 홈 트레이닝, 청소, 점심, 작문, 독서, 복싱, 저녁, 미얀마어 공부, 일기 작성, 명상, 스트레칭, 취침⋯⋯. 시간 단위도 아니고 분 단위로 하루를 오려낸 나는 득의양양했다. 월스트리트의 탑 티어 자산관리사도 이 정도로 계산적이진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글쓰기나 책 읽기는 차치하고 제시간에 밥 먹는 것조차 잘되지 않았다. 자야 할 시간이 와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는 와중에 당황스러움과 배덕감이 커져갔다. 잘 살아보려는 노력으로 기분이 더러워진다면? 그 현상이야말로 못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내 시간표는 곧 유통기한 지난 비인기 삼각김밥처럼 폐기되었다.

(…)

시간표에 항복한 후, 내 칩거 생활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흐름을 원상 복구했다. 나는 침대 속에 파묻혀 솜이불이 날 핥는다고 느낄 때만 행복하다. 잠자느라 아침밥은 생략. 점심과 저녁이 자정 이후로 밀리는 일도 허다하다. 한 시간 후에 내가 뭐 하고 있을지는 59분이 지나봐야 안다. 그런데 이런 삶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월스트리트의 탑 티어 자산관리사가 나를 본다면, 어디에 저런 것이 있었나 진저리 치겠지만, 꼭꼭 숨어 있는 한 나도 내 통장도 그와 마주칠 일 없으니 괜찮다.

<언러키 스타트업>의 주연 3인방은 저자와 저자가 악덕 기업에서 만난 두 친구들을 기반으로 한 게 분명해 보인다. 회사에서 업무상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또 퇴사 후에도 그 만남을 이어갈 수 있다니 나는 그저 존경스럽다. 또한 <언러키 스타트업>의 그 ‘싱크홀’ 같은 대표 박국제도 실제 저자의 경험에 기반한 듯. 아니, 세상에 이런 똥통이 존재한다고요?

회사에서 만난 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지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겐 수지와 보나가 그 증명이었다.

그들을 만난 곳은 내가 얼마간 몸담았던 시궁창 같은 스타트업에서였다. 거의 창립 멤버 수준이었던 수지와 나는 내가 입사한 후 필연처럼 친구가 되었다. 우린 동갑이었고 바로 옆자리를 썼고 둘 다 웃음이 많았으므로 나머지 특징도 어차피 비슷할 거였다. 결정적일 때면 나는 독기를 내뿜고 수지는 더 착해지는 쪽으로 갈렸지만 어쨌든 우린 잘 맞았다. 사실 수지는 우리가 그리 꼭 맞는 관계가 아니라고 느꼈을 수 있다. 그래도 수지가 나를 좋아하고 나도 수지를 좋아해서 업무에서든 사생활에서든 양보가 원활히 발생한다면 대강 잘 맞는 거였다.

보나는 우리보다 세 살 언니였고 시궁창 컴퍼니에도 가장 늦게 들어왔다. 지각쟁이인 내가 웬일로 1등 출근을 한 비현실적인 겨울날, 사무실 비밀번호를 알 리 없는 보나가 손을 호호 불며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누구세요?” 내가 먼저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별다른 재롱을 부리지 않으니까, 아마도 평이한 어조였을 것이다. 보나는 차분하고 밝게 인사하더니 자기가 오늘 첫 출근을 하게 된 에디터라고 말했다. 그를 안으로 들이고 따뜻한 음료를 내가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사장에게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

수지까지 모르는 걸 보니 공지된 적이 없는 사안 같았다. 당시 우리의 사장 S씨는 완전히 맛이 간 띨띨이 아저씨였다. 그는 리더십과 옹고집을 구별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짓거리를 자주 벌였다. 자기가 독단적이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 실제로도 무리한 독단을 자주 저지르는 식이었다. 특히 채용이나 해고에서는 혹여라도 미천한 평사원들이 말을 보탤까 봐 미리 노여워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태도는 늘 우리를 민망하게 했다. 겁주려는 의도가 확연하지만 겁을 먹게 되지는 않아서, 겁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 정말 재미있고 유쾌하고 좋은 부분이 많은데 다 공유할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정지음 작가님을 내가 이렇게 홍보해 드렸으니 혹시나 나중에 작가님을 만날 일이 있다면 나도 작가님을 위해 한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뿌듯. 여러분들도 정지음 작가님 한 번만 읽어 주세요! 이렇게나 재치 있고 톡톡 튀고 신선한 글이에요!

 

➕ 정지음 작가의 다른 두 책에 대해 쓴 내 서평은 요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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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지음, <언러키 스타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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