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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君の膵臓をたべたい(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

by Jaime Chung 202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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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君の膵臓をたべたい(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

 

 

감독: 우시지마 신이치로

⚠️ 아래 영화 후기는 <君の膵臓をたべたい(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8)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이건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고, 남친이 같이 영화 보자고 해서 본 거다. <목소리의 형태>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중 하나를 고르라길래 조금 검색을 해 보니 전자는 가해자 주제에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서 기분 나쁘다는 평이 여럿 보였고 그래서 나는 결과적으로 후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해서는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제목이 너무나 큰 장벽이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살아 있는 남친 소원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금요일 밤, 나는 이걸 보았던 것이다.

내 소감을 한마디, 아니 한 장으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 책 좀 읽으신 분들은 이게 민음사 판 <햄릿>의 표지 그림이라는 걸 알아차리실 것이다. 제목 그대로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죽은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영화와 이 그림은 ‘가냘픈 로맨티시즘’을 담고 있다는 점이 닮았다. 박경리 선생이 일찍이 <일본산고(日本散考)>(인용문 보기)에서 일본의 감상주의를 ‘가냘픈 로맨티시즘’이라고 표현했는데 딱 그짝이다. 반드시 이 애니메이션 영화가 일본 작품이라서가 아니고, 그냥 딱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감상을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일단 간략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사쿠라는 췌장의 기능에 장애가 생긴 병(극 중 정확한 병명은 언급되지 않는 걸로 기억하지만 꺼라위키에 따르면 췌장암)을 앓고 있다. 그녀가 써내려간 ‘공병문고(共病文庫)’를 우연히 보게 된 남자 주인공 하루키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아싸이지만 딱히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사쿠라는 하루키가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점에 내심 기뻐하며 그에게 무척 치댄다. 사람을 귀찮아하는 하루키가 점차 그녀에게 감겨들 정도로. 하루키는 죽음이 두려우면서도 언제나 밝고 명랑한 그녀를 통해 ‘나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지만, 사쿠라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그날, 공교롭게도 괴한에게 ‘묻지 마’ 살인을 당해 숨을 거두고 만다. 사쿠라의 죽음 후 사쿠라가 자신을 위해 남겨 둔 ‘공병문고’를 읽고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겠다 다짐한 하루키는 사쿠라의 절친인 쿄코에게 자신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용기를 내어 부탁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내 감상은 이렇다. 첫째, 나는 ‘아픈(또는 죽어 가는) 미소녀’ 캐릭터는 너무 많이 봐 왔기에 이제 감흥도 없다. 이걸 <Me and Earl and the Dying Girl(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2015)에서 이름을 따와 ‘pretty dying girl’ 신드롬이라 부르고 싶다. 여자들은 왜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죽는 순간까지 예뻐야 하나? 나는 <타이타닉(Titanic)>(1998)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 외에 극 중에서 남자 주인공이 죽는 영화를 좀처럼 떠올릴 수가 없는데 마이다. 소녀들은 심지어 죽어가는 모습까지 대중의 유흥을 위해 소비되는 셈이다. 사실 사쿠라를 ‘죽어 가는’ 소녀라 하는 건 맞는 말이지만, ‘아픈’ 소녀라고 하기엔 좀 뭐한 느낌이 드는데, 러닝 타임 내내 사쿠라가 자신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침하는 (췌장이 아픈데 왜 기침을 하겠느냐마는) 장면조차 없다. 고통으로 찡그리지도 않는다. 몸매도 바싹 마르거나 부은 게 아니라 그냥 ‘날씬하게 마른’ 정도인 것 같다. 췌장암을 검색해 보니 초기 증세는 (10% 이상의) 체중 감소나 황달이라고 한다. 황달은 당연히 캐릭터 디자인에 고려되지 않았고 체중 감소도 모르겠다. 워낙에 많은 여성 캐릭터가 ‘날씬’하게 그려지니 정말 심각할 정도로, 환자 수준으로 말랐다면 “요즘 너 살 많이 빠진 거 같아” 같은 대사로라도 표현되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걸 보니, 음, 이 사쿠라라는 캐릭터는 그냥 아프지도 않은 평범한 소녀와 다름없이 보이는데 그냥 ‘아픈 소녀’라는 속성을 덧붙인 거 아닌가 싶다. 뭐야, 그게 도대체?

게다가 사쿠라는 무척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남들 앞에서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 준다(실제로 아프지 않기에 이 정도로 명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원작 작가가 심각한 병을 가진 인물을 잘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게 너에게는 무슨 의미냐는 하루키의 질문에 사쿠라는 자신의 매력이란 남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무척 중요시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에 하루키가 감화되어 혼자 있으려 하는 성향과 남들이 자신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버리고 타인에게 다가가는 법을 연습하게 되는데, 솔직히 이걸 보면서 ‘매닉 픽시 드림 걸(Manic Pixie Dream Girl; ‘다른 여자애들과 다르고’ ‘독특한’, 남자 주인공에게 삶의 신비와 모험을 가르쳐 주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 더 자세한 설명은 위키피디아를 참고)’ 유행은 이제 지나지 않았나 생각했다. 언제적 ‘매닉 픽시 드림 걸’이야? 게다가 하루키야, 고등학생 정도 되었으면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스스로 좀 해라… 언제까지 여성들이 남자들의 ‘각성’을 돕기 위해, 스토리 진행을 위해 강간당하거나 죽어야 (때로는 둘 다) 하니? 아주 지겨워 죽는 줄. 타인과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고 타인과 잘 지내야 한다는 건 유치원에서도 배우는 거잖아! 그런 단순한 사실을 하루키가 깨닫게 만들기 위해 사쿠라가 웬 미친놈에게 찔려 죽어야 했다니… 애니메이션이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픽션’, 즉 허구는 일종의 현실 도피로 기능하기도 하는데 현실 속 여자들이랑 사쿠라랑 다를 바가 뭐지? 이럴 거면 도대체 뭐하러 픽션을 봅니까, 그냥 뉴스를 보지. 하이고… 여자로 살기 어렵다.

그리고 내가 또 이해할 수 없는 것. 쿄코는 사쿠라를 과잉 보호하는데, 원작 소설 작자는 ‘걔가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사실 속은 여리고 약한 애야’ 같은 대사를 (쿄코에게 하라고)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사쿠라는 끊임없이 남들 앞에서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 주지만 하루키에게만은 살짝, 아주 조금씩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건… 정말 나르시시즘의 극치가 아닐까? 원작 소설의 작가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캐릭터들이 나르시시스트 같다는 뜻이다. 누가 저한테 강한 모습 보이라고, 밝고 행복한 모습만 보이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자기가 먼저 나서서 그런 가면을 써 놓고는 ‘사실 나 힘들어. 내가 얼마나 여리고 약한 사람인지 알아 줘. 소중히 대해 줘!’라고 바라는 듯한 그런 느낌은, 으으, 이렇게 타자를 치기만 해도 내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다.

나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도 그걸 굳이 친한 이들 앞에서 숨기지 않는 편이라(물론 직장처럼 내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게 바람직한 곳에서는 적당히 감추지만), 이런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상대에게 무슨 해결책을 바라지 않고 그냥 내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지금 너무 걱정돼/스트레스 받아/화가 나/슬퍼” 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를 꺼리지 않는 편이다. 이런 성향에 대해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말하지 않는 걸 알아차려 줘’라고 요구하는 타입은 아니기에 그 점은 당당하다. 사쿠라의 경우, 자신은 죽을병을 앓고 있다는 점을 하루키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기로 한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그래 놓고 남들이 자신에게서 행복하고 명랑한, 밝은 소녀의 모습만을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 듯이 열심히 그런 모습을 연기한다. 여성들은 감성 지수가 높아서 남들이 불편해하는 상황을 꺼리고 애초에 그런 일이 없도록 마음을 쓰는 경향이있는데 사쿠라는 그게 너무 과하다. 죽을병에 걸렸으면 눈물콧물 흘리면서 꺼이꺼이 울어도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좀 솔직하게 굴어라! ‘강한 척하지만 나 사실 약해. 나를 위로해 줘. 내가 얼마나 여린지 알아차려 줘’. 같은 걸 은근히 요구하는 사람은… 본인은 티가 안 난다 생각해도 주변 사람들은 그냥 그런 걸 느낄 수 있게 마련이다. 죄송합니다, 저와는 그냥 생리적으로 안 맞는 것 같네요.

애초에 쿄코가 한 말도 좀 웃기긴 하다. “걔가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사실 속은 여리고 약한 애야”라는 말은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지만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아주 외향적이다” 뭐 이런 말과 다름없지 않나? 길 가는 사람 백 명을 붙잡고 물어보면 적어도 70%는 자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라고 대답하겠지… 누구나 강한 면도 있고 약한 면도 있게 마련인데. 예컨대 위대한 사람도 인정받지 못하던, 또는 힘들었던 시절이 있다, 또는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같은 맥락이라면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인간적인 면모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인본주의’적 사상 때문에 전혀 오글거리거나 유치하지 않다. 그건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사고 희망과 힘을 준다. 하지만 ‘나 밝아 보여도 내면에는 사실 깊은 슬픔이 있어’ 같은 건 셀프 모에화이자 오글거림의 극치일 뿐이다.

이제 내가 왜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에 비유했는지 이해하실 것이다. 남성 주인공이 ‘성장’하기 위해 여성 주인공이 죽는 거나, 그 여성 주인공의 캐릭터화, ‘아, 참 슬프지만 아름답네요’ 같은 감성 때문이다. 단순히 ‘슬픈데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의미 있는 알맹이가 없어서 때문에 허무하다. 하, 나도 남친이 아니었으면 이걸 볼 일은 절대 없었을 텐데… 설마 나도 남친의 ‘성장’을 위해 죽는 엔딩은 아니겠지? 😂 그런 거에 비하면 좀 구린 애니메이션 한 편 본 걸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싶고 감사하다. 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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