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송경화,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기자 송경화의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벌써 웹툰과 드라마로 제작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게 2021년 3월(종이책 기준)에 출간된 거라 현재는 이미 후속작인 <민트 돔 아래에서>(역시 종이책 기준 2022년 9월 출간)까지 나와 있다. 나는 이 책 표지는 여러 군데에서 많이 봤는데 정작 볼 곳이 없어서 (리디 셀렉트에 없고 밀리의 서재에도 안 들어와 있어서) 도서관에서 전자책으로 빌려서 이제야 읽었다.
읽고 나니까 왜 웹툰이나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 하는지 느낌이 온다. 일단 이 책은 작가 본인이 기자이고, 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지만 ‘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기 때문에 더욱 자연스럽게, 편하게 사건들을 묘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아무래도 관련자들 이름이나 정체를 알리기에는 불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소위 ‘모치’라고 하는, 기사거리가 되는 ‘소스’를 물어다 주는 정보원의 개인적인 정보를 함부로 밝힐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소설로 표현한 게 현직 기자인 작가 입장에서는 참 지혜로운 결정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것들은 꽤 투명해 보인다. 예컨대 열 번째 에피소드 ‘빨갱이, 빨간 두드러기, 빨간 수포’는 전두환 시절 민주화 운동가들이나 정부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또는 정말 죄 없는 무고한 국민들을 잡아다가 고문해서 거짓 자백을 시켰던 일과 그 피해자(들) 이야기를 다뤘다. 소설 내에서 설명하듯 “진보 정권 때 정부 차원에서 설치한 과거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무고함을 입증하려는 피해자 ‘강팔성’이라는 인물은 분명히 허구겠지만 실질적으로 전두환 시절 피해입은 국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열다섯 번째 에피소드 ‘대통령의 올림머리’는 제목만 들어도 누구 이야기인지 느낌이 오지 않는가. 세월호는 ‘네모호’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대통령의 비선 실세와 대통령 본인은 이름조차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아니면 외신 소식이 빠른 외국인이라도) 누구 이야기인지 다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다섯 번째 꼭지 “남자 친구 찾으러 왔는데요.”이다. 송가을 기자가 홍등가 취재를 위해 잠입한 이야기이다. 송가을은 홍등가에 잠입하는 표면적 이유를 대충 ‘남자 친구가 여기로 들어가서 찾으러 왔다’라고 둘러대는데, 홍등가 안에서 만난 한 성매매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남자 친구 사진을 보여 주게 된다. 그 꼭지는 “그의 대답은 들은 나는 눈물은 펑펑 쏟으며 골목길을 빠져나와야 했다. 슬프진 않았다. 그저 비참할 뿐이었다.”라는 짧은 한 문단으로 끝이 난다. 그냥 둘러댈 요량으로 보여 준 사진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 친구 놈이 정말로 홍등가에 드나들던 더러운 성매매범이었다는 반전. 물론 당연히 송가을은 그놈과 헤어진다. 현실을 반영한 씁쓸함은 이것만이 아니다. 열세 번째 에피소드 ‘위안부를 위한 눈물’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의 자녀들을 도와주는 시민단체 및 공무원의 위선을 보여 준다. 70, 80대 노인들이 부친의 혼을 기리며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며칠간 일본을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후, 뒤풀이를 위해 만난 이들은 (’위안부’에 대해) “여성의 성적 대상화” 운운하던 태도를 버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부르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송가을은 너무 놀라 그 자리를 바로 벗어나지만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가방 놓고 가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아까 그 위안부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라며 송가을을 배웅한다. 환멸 🤮 이래서 ‘탈북자의 아메리칸드림’을 다룬 열두 번째 에피소드 ‘미국에서 만난 탈북 청년’에서 탈북자 청년(=정보원)과 송가을이 라포(rapport)를 키워 가며 이야기를 나눌 때 ‘저러다가 상대가 기자 보고 사적으로 호감 있다고 착각하고 집적대려고 하는 거 아니야?’라는 불안감을 느꼈나 보다(다행히 그 에피소드에서는 별일 없었다).
송가을 기자가 갓 입사한 신출내기 시절 경찰팀으로 시작해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 법조팀으로, 그리고 탐사보도팀으로 옮겨가며 기자의 다양한 부문을 보여 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기자가 꿈인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기자 일에 대한 낭만을 더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이다 보니까 현실을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어 대안적인 현실, 즉 허구의 세계를 창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저자가 본인의 경험을, 은퇴할 시점쯤에 회고록으로 쓴다면 진실성을 담아 ‘위험한’, 다시 말해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저자가 현직 기자이기 때문에 적어도 지금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소설을 쓴 게 아닐까.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다른 미디어, 특히 드라마로 만들면 특히 딱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각본 적당히 쓰고 연기 잘하는 배우들 데려다가 연기시키면 그 배우들 입장에서는 ‘정의를 위해 발로 뛰어다니는 열혈 기자’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얻을 수 있고(노파심에 말하지만, 이 드라마의 배우들을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또 드라마 제작자들 입장에서는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다룬다’라는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만약 드라마에서 (위에 내가 언급한) 대통령의 비선 실세와 당시 대통령을 비판하는 에피소드를 그대로 살려서 쓴다 하더라도 이미 탄핵된 자를 비판하는 데 어떤 실질적인 큰 위험이 있는가? 현재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을 비판한다면 또 모를까. 이미 비판해도 ‘안전한’ 대상들만, 특히 허구라는 옷을 입혀 비판하며 실제로 어떤 정의로운 일도 하지 않으며 ‘정의롭다’라는 분위기만 내고 싶은 건 아닌가? 영어로 하자면 ‘feel-good’ 드라마, 딱 그 정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부분의 코미디가 정치권이나 대중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사건사고를 일으킨 강자들을 비꼬는 ‘고급 유머’ 대신에 만만한 소수자들(예컨대 여성이나 못생긴 이들)만 놀리는 ‘저질 유머’로 인기를 얻어 보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자처럼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는 이들을 다루는 드라마를 만들 거라면 그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잘못한 사람에게 너 잘못했다고 꼬집어 말하는 용기를 내야 하지 않나 싶다. 뭐, 누가 이 드라마의 각본을 쓰는지도 모르는 내가 단언할 수 있는 점은 아니지만, 적어도 독자/예비 시청자로서 이 정도는 바랄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적인 재미가 있고, 또한 독자 입장에서는 흥미로워서 진실을 알고 싶어도 저자가 정보원 보호를 위해서라도 허구적인 면을 덧댈 수밖에 없었음도 인정한다. 후속작 <민트 돔 아래에서>도 내가 구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거나 내가 이용하는 정기 구독 플랫폼에 사용 가능해진다면) 읽어 볼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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