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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히가시노 게이고, <명탐정의 규칙>

by Jaime Chung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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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히가시노 게이고, <명탐정의 규칙>

 

 

어떤 장르든 ‘고인 물’일수록 그 장르 특유의 트로프(trope;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 포스트를 참고)를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가지고 놀 정도이게 마련이다. 추리/미스터리 장르의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처럼. 이론 소설이나 추리/미스터리물을 잘 안 읽는 나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쪽 ‘고인 물’ 중의 ‘고인 물’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책 한 권으로 추리물을 섭렵했다.

무슨 소리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탐정물 또는 추리물에 자주 나오는 트로프들, 그러니까 예컨대 밀실 트릭, 후더닛(Who done it; 복잡한 플롯으로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추리하는 것이 주 관심사가 되는 추리물), 다잉 메시지, 알리바이 트릭 등등을 배웠다는 뜻이다. 소설의 탈을 쓴 이 책은 평범한 탐정물에 자주 쓰이는 설정이나 트릭 등을 설명하면서 살살 놀린다. ‘솔직히 이런 트릭들 너무 많이 쓰이지 않냐?’ 하면서 독자에게 살짝 ‘너도 무슨 말인지 알지?’라는 의미의 윙크를 해 보인다고나 할까. 소설의 서술자는 오가와라 반조라는 이름의 일본 지방 경찰 경감인데, 그는 자신이 탐정물 내에서 맡은 역할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덴카이치라는 명탐정을 돋보이게 하고 이야기 서술을 돕기 위한 조연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경감이다. (…) 그러나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은 건 모두 내가 아니라 ‘어떤 인물’의 공이다.
어떤 인물이란 바로 그 유명한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다. 낡아빠진 양복에 더부룩한 머리, 연륜이 쌓인 지팡이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범인일 듯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자, 여러분!”이라는 대사로 시작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며 지팡이로 가리킨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본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를 모르더라도 현명한 독자라면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즉 나는 이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의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명탐정 소설에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는 형사가 반드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빈번히 등장한다. 그 멍청한 익살꾼을 연기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뭐야, 그럼 편한 배역이잖아.”
이런 비아냥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않아도 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놓쳐도 아무 문제 없으며, 그저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적당히 의심하기만 하면 되니 이보다 편한 역할이 어디 있냐고들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알고 보면 이렇게 힘든 배역도 없다. 사실은 명탐정보다 훨씬 고생스럽다. 그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우선 범인을 알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절대로 범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주인공 덴카이치 탐정의 역할이므로, 그가 멋지게 피날레를 장식하기 전에 내가 사건을 해결해 버리면 주인공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무엇보다, 탐정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열쇠를 번번이 놓쳐야 한다. 용의자를 적당히 의심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운 좋게, 혹은 우연히라도 ‘제대로 된’ 의심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이제 독자 여러분도 이해했을 줄 안다. 이런 제약들은 상당히 가혹한 것이다. 잘못된 추리는 얼마든지 허용되지만 그 결과 우연히, 또 과정은 잘못됐더라도 결과적으로 진실에 접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독자에게 가장 의심스러운 존재는 당연히 류진 가문의 미망인이다. 현실이 이럼에도 나와 덴카이치 탐정은 그녀가 범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독자들이 우리를 얼마나 비웃겠는가. 우리도 그런 자신이 부끄럽다. 그래도 덴카이치 탐정은 낫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체면이라도 세운다. 그에 비해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그 아름다운 여인이 범인이었다니, 이거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라며 한심한 대사를 읊어야 한다.
이처럼 내가 맡은 역할은 쓰디쓴 보조역이다. (…)

 

여기까지만 봐도 소설 속 캐릭터들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 메타 발언은 아주 흔하게 나온다. 이런 건 또 어떤가.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어쨌든 사실이 그런걸요.”
우리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기서 입을 여는 것이 누구의 역할인지 모두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덴카이치를 쳐다봤다. 하지만 녀석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 왜 이래. 명탐정이 제일 좋아하는 상황 아니야. 그 선언을 할 거잖아. 하려면 빨리하라고.”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좋아. 뭐든 좋으니 빨리하게. 탐정 소설의 정해진 패턴대로 구태의연하고 뻔뻔스러운 선언을.”
나는 또 한 번 덴카이치에게 눈짓했다. 녀석은 부루퉁한 얼굴로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경감님,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시선이 탐정에게 집중됐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었지만 눈물을 꾹 참은 채 자포자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완벽한 밀실 살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
이렇게 해서 밀실 선언이 내려졌다.

 

이 밈이 생각나는 건 기분 탓일까.

 

어쨌든 밀실 선언을 굳이 시키고 나서 “아, 또 밀실 트릭인가.”라며 지겨워하는 건 덤. 나는 비록 추리물이나 탐정물을 아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중학생 때 엘러리 퀸 시리즈를 좀 읽은 짬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메타 발언이 뭘 가리키는지 알아듣고 웃을 정도까지는 된다.

메타 발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때 만화를 보면서 만화 속 캐릭터들이 ‘뭐야, 작가 미친 거 아니야? 이런 전개로 괜찮아?’ 같은 메타 발언을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내가 읽고 있는 만화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었는데 등장인물들이 그런 말을 하면 ‘어차피 이건 허구일 뿐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아 흥이 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렇게 이런 게 재미있게 느껴진다.

여튼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메타적인 발언을 흩뿌리며 탐정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트릭을 한 편씩 집중해서 보여 준다. 개인적으로 제일 웃긴 건 ‘여사원 온천 살인 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편이었다. 이 편에서는 덴카이치 시리즈가 두 시간짜리 드라마라는 설정이라서 덴카이치도 여성으로 성별이 반전되었다.

“자네, 언제부터 여자가 됐나?”
그러나 여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모르셨어요? 이번 시리즈에서는 저, 여자로 나오는데요.”
”왜?”
“그러니까, 이번 작품은 두 시간짜리 드라마 대본의 세계라서요.”
여자는 똑부러지게 말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요 추리 서스펜스 극장의 대본이죠.”
“두 시간짜리 드라마 대본……. 음, 역시 그랬군.”
어쩐지. 그래서 종종 이상한 문체로 바뀐 거였구먼. 그건 바로 드라마 대본의 지문이었던 것이다.
“덴카이치 시리즈도 마침내 두 시간짜리 드라마가 되고 말았군.”
나는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수 없잖아요. 작가가 돈에 눈이 멀어 버렸다고들 하던데.”
“거, 한심하구먼.” 어깨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두 시간짜리 드라마라고 자네가 여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
”아니, 모르세요? 두 시간짜리 드라마는 대개 주인공이 여자예요. 시청자 대부분이 주부여서 여자가 주인공이 아니면 시청률이 오르질 않아요. 도쓰가와 경감(니시무라 교타로 원작의 미스터리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 형사 — 옮긴이)이나 아사미 미쓰히코(우치다 야스오 원작의 드라마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 르포라이터의 이름 — 옮긴이) 따위의 남주 주인공은 예외에 속하지요.”
“그래서 덴카이치 다이고로도 여자가 된 거야?”
“그런 셈이지요. 이름은 덴카이치 아리사. 도쿄의 여자 대학 3학년생으로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자신이 속한 장르를 놀리는 맛이 있으니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으랴. 덕분에 나는 이 소설책 한 권으로 탐정물을 마스터했다(아님). 뭐, 정말로 이거 하나로 탐정물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자주 쓰이는 트릭들이 해부되니 여러 종류의 탐정물을 한번 쓰윽 훑어보고 싶어 하는 입문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니면 탐정물을 깊게, 많이 읽어 보고 싶지는 않지만 대충 이 장르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은 이들이라든가. 나는 추리물이나 탐정물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반조 경감의 말을 인용한다면, “추리 따윈 하지 않아. 주인공이 추리해 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지. 그래서 지치지 않는 거야. 마지막 단계에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이해하고 만족하는 거야.”) 이 책을 썩 재미있게 읽었다. 나 같은 사람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서 하하 웃을 수 있는 책이라면, 추리물/탐정물을 극혐하거나 병적으로 싫다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웬만큼 괜찮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탐정물의 팬이라면 특히 더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 참고로 이 책은 e북으로는 출간되지 않았는데 밀리의 서재에서는 e북으로 이용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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