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웃기고 무엇이 웃기지 않은가? 무엇을 웃기다고 생각하는지는 개인, 그리고 사회에 달려 있다. 그래서 당신이 무엇을 웃기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다. 예컨대, 며칠 전 내 이웃님이 어떤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내 주신 일이 있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는 영상이었는데, 이 남자는 배수구를 기어들어가 하수구에 난 구멍으로 여성들의 치맛속을 들여다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이 미친 자는 이 똑같은 짓거리를 두 번이나 하다가 걸렸는데(아마 걸린 것만 두 번이겠지), 그는 “다시 태어나면 도로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영상을 보고 ‘아니, 이런 음습한 짓을 저지른 미친 새끼가 있다고?’ 하고 경악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그 영상 밑에 달린 댓글이었다. 범인을 골 때리는 짓을 저지른 자로 여기긴 해도, 이 골 때리는 짓이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은 없는 듯했다. 그냥 이 일을 ‘웃긴 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 소름이 끼쳐서 나는 그 유튜브 영상에서 바로 나와 버렸다. 똑같은 사건이라도 개또라이 변태의 일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과 역겨운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법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여러분도 이제 아실 것이다. 무엇을 ‘웃기다’, ‘재미있다’라고 생각하는지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이게 진짜 인간 새끼인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웃음 포인트가 다른 이들이 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그게 웃기다고 생각할 수가 있지? 그래서 나는 코미디언들의 개그를 볼 때도 유심히 살핀다. ‘이 사람의 웃음 포인트가 나랑 맞나? 나랑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인가?’ 인간성이 의심될 정도로 유머 감각이 이상한 주위 사람은 내가 운이 없어 걸렸다 쳐도, 적어도 TV나 넷플릭스, 유튜브 영상에 뜨는 코미디언들은 내 재량에 따라 피하려면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런 내가 최근에 ‘불편하지 않은’ 코미디언을 한 명 찾았다. 이름하여 테일러 톰린슨(Taylor Tomlinson). 신기하게도 어느 날 내 유튜브 알고리즘에 등장했는데 꽤 재밌어서 그간 쇼츠를 한두 편씩 보다가 이번에 아예 넷플릭스에서 1시간짜리 그녀의 스탠드업 코미디 풀 버전을 봤다. <Quarter-Life Crisis>(2020)와 <Look At You>(2022). 정말 웃겼다. 나는 여성 코미디언들을 좋아하는데, 여성 코미디언은 일단 나랑 비슷한 관점을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폭력 따위를 농담으로 삼지는 않을 테니까.
테일러 톰린슨은 주로 자신의 정신 건강 이슈(그녀는 자신의 기분 장애, 그러니까 양극성 정동 장애에 대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농담한다), 연애, 섹스, 오르가즘, 종교, 부모님 등을 소재로 삼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아래 쇼츠 참고). “친구에게 내가 양극성 장애가 있다는 걸 말하기 전에 긴장했어. 걔네들이 나를 다르게 생각하면 어쩌지, 하고. 근데 친구들에게 실제로 말했는데 아무도 나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더라고. 꽤 모욕적이었어. (…) 걔네들은, ‘야, 그거 말 된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이러는 거야.” ㅋㅋㅋㅋㅋㅋㅋ
또한 요즘과 옛날의 양육 방식이 다른 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아래 영상 참고). 자신이 15살이었을 때 우울증이 와서 자살을 생각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가 부엌 서랍에서 칼을 꺼내더니 머리 위로 흔들면서 “그래, 한번 해 봐라!” 이러셨다고. ㅋㅋㅋㅋㅋㅋ 더 웃긴 점은, 최근에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버지가 “어, 그 일 기억난다! 네가 허세 부린 건 줄 나는 진즉에 알고 있었지! 누가 안 죽었는지 봐라, 이 엄살쟁이야!” 하셨다는 점. 아버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웃겼던 농담 중 하나는, ‘부모가 될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라는 요지로 한 아래의 농담이었다. 한국어 자막을 달 수 없어서 대충 번역하자면 이렇다. “어떻게 병원 나가는 길에 당신이 (부모로서) 괜찮을 거라는 출구 인터뷰가 없어? (어째서) ‘저기요, 당신께 아이를 영원히 넘겨드리기 전에, 전자 렌지에 이 금속 그릇을 넣어 주실래요?’(라고 묻지 않는 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자 렌지에 금속 재질을 넣으면 안 된다는 단순한 사실도 모르는 멍청이에게 아이를 넘겨 줬다간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말이다.
https://www.facebook.com/watch/?v=506113213428905
테일러의 모든 농담을 다 여기에서 소개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 하나만 더 보여 드리겠다. 내가 테일러의 농담 중 전복적이고 강력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역시나 한국어 자막을 달 수 없으니 간략히 요약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테일러는 게으르게 집에서 편히 놀고 싶어서 남성 주부가 되고 싶다는 남자 말고, 목표가 있고 진취적이고 야망이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을 지지하기 위해 포기하기를 바란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지? 재능 있는 여자들이 남자의 목표를 이루는 걸 돕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그리고 그런 것을 기대하는 이 사회의) 현실을 살짝 비튼 것이다. 내가 말로 설명하려니 재미가 없는데 영어가 좀 된다 하시는 분들은 아래 영상을 직접 보시면 어떤 톤인지 느끼실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 방지 핫라인이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 등 다소 어두운 일도 소재로 삼는다. 왜냐? 글쎄, 그럴 수 있으니까. 내가 테일러가 아니라서 그녀가 왜 그런 농담을 하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추측은 할 수 있다. 바로 웃음에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의 형태를 띄는 보가트들을 물리치는 주문이 “리디큘러스( ridiculous, “우습다”라는 뜻)”이듯, 어떤 일에 대한 터부나 낙인, 공포를 걷어내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은 웃음이다. 테일러가 자신의 기분 장애나 섹스를 가지고 농담을 하는 게 그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니까 바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닐지. 만약 이 점을 다른 이들도 깨닫는다면 (코미디언이든 아니든) 소수자나 약자(예컨대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여성, 아이나 노인)를 패는 농담은 자제하지 않을까. 모든 이들이 웃음의 힘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며, 나는 테일러 톰린슨의 스탠드업을 추천하고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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