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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Seagull(갈매기, 2018) - 원작의 무게에 겁먹지 말고 부담 없이 보세요!

by Jaime Chung 2018.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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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영화 추천] The Seagull(갈매기, 2018) - 원작의 무게에 겁먹지 말고 부담 없이 보세요!

 

 

감독: 마이클 메이어(Michael Mayer)

 

중년의 여배우 이리나(Irina, 아네트 베닝 분)는 모스크바에서 공연 중, 자신의 오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공연이 끝나고 자신의 파트너인 작가 보리스(Boris, 코리 스톨 분)와 같이 그에게 달려가니, 오빠 소린(Sorin, 브라이언 데니히 분)이 기침을 하며 그들을 맞아준다.

이리나의 아들 콘스탄틴(Konstantin, 빌리 하울 분)도 잡지에 글을 싣는 작가인데, 어째 보리스를 대하는 태도가 살얼음 걷는 듯하다.

보리스는 콘스탄틴의 글이 실린 잡지를 건네며 '이리나 말로는 과거 일은 괘념치 않으신다고 하더군요' 하는 걸로 봐도 과거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듯하다.

콘스탄틴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이리나가 보리스뿐 아니라 의사인 도른(Dorn, 존 테니 분), 소린이 사는 시골 별장 관리인의 아내 폴리나(Polina, 메어 위닝햄 분), 폴리나의 딸인 마샤(Masha, 엘리자베스 모스 분) 등을 데리고 복권놀이를 하려고 하자 그 자리를 피한다.

방에서 자신이 쓴 글을 살펴보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콘스탄틴. 그는 얼핏 과거의 연인 니나(Nina, 시얼샤 로넌 분)의 모습을 본 듯하다.

그 순간, 그는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이 극작가의 꿈을 꾸고, 니나가 자신이 쓴 각본으로 연기를 하던 때로...

 

시골 별장에서 좋은 한때

 

콘스탄틴

 

이리나(왼쪽)와 도른(오른쪽)

 

유명 작가 보리스(오른쪽) 앞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부끄러워하는 니나(왼쪽)

 

이리나. 이건 그냥 아네트 베닝이 좋아서 ㅎㅎㅎ

 

존예로운 시얼샤 로넌의 니나 컷 한 장

 

이건 그냥 내가 마샤를 좋아해서ㅠㅠㅠ 마샤가 씁쓸하게 웃는 모습...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4막극 <갈매기(The Seagull)>를 바탕으로 했다.

각본은 스티븐 카람(Stephen Karam)이 손을 봤는데, 3시간이나 되는 원작을 적절히 쳐내고 98분가량으로 다듬었다.

이 상영 시간은 크레디트까지 포함한 것이니 실제 영화 영상만 놓고 보면 1시간 반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원작, 그러니까 연극 버전 <갈매기>가 3시간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이걸 어떻게 1시간 반으로 만들었나 놀랐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후 희곡을 읽어 보니 원래 분량이 10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7 정도로 한 3만 잘라 낸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그 3은 딱히 원작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수준이었다. 제일 많이 대사가 잘려 나간 사람은 학교 선생 메드베덴코(Medvedenko)인데, 어차피 그다지 중요한 역할은 아니라서 괜찮지 않나 싶다.

사실 어떤 작가라도 자기 작품에서 한 글자라도 빼 버릴 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그런 쓸데없는 부분은 왜 썼다는 말인가? 작가라면 정말 꼭 필요한 말만 이용해서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주제나 주인공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를 영어로 번역해 출간하며 일정 분량을 삭제해 버렸다는 말에 우리 교수님 중 한 분이 격노하시면서 '그럼 그런 분량은 왜 썼대?' 하신 적이 있다. 영어 화자들은 그 부분을 읽지 않아도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한국어 독자들은 왜 그런 부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진대, 남의 작품에 손을 대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카람은 그 일을 꽤 괜찮게 해냈다.

사실 검색을 좀 해 보니, 원래 희곡은 4막으로 되어 있고 그대로 다 연기하면 장장 3시간의 긴 공연이 되지만 연출자가 적절히 가감을 하면서 110분, 150분 정도로 공연을 올리는 경우도 더러 있더라(물론 인터미션을 포함해).

그러니 98분 정도면 아예 원작 파괴 수준은 아닌 듯하다. 적어도 나는 영화 관람 후 희곡을 읽고서 이 정도 쳐낸 정도면 준수하다고 생각했다.

체호프가 저세상에서 '아니, 내 글에 한 글자라도 뺄 것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하고 격노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희곡을 보면 3막과 4막 사이에 2년의 시간이 흐르는데, 이 영화에서는 처음에 4막의 첫 부분을 잠시 보여 주고 콘스탄틴이 니나의 환영을 보는 듯한 순간, 그 2년을 되돌아가 1막을 시작한다.

그러고 1막, 2막, 3막까지 다 진행한 후 앞에 나왔던 4막을 다시 끝까지 보여 준다. 영화에서는 자주 쓰이는 기법인데, 이걸 이 연극에 적용하다니 신선했다.

그리고 또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비(非)러시아인이 볼 때 러시아 문학에 진입하는 데 제일 큰 장벽인 여러 가지 호칭(부칭, 애칭, 본명 등)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등장인물 한 명에 그냥 한 가지 이름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 하나만 외우면 된다!

(사족이지만 나는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2012)>를 보면서 키이라 나이틀리는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알료샤'라고 발음할까 감탄한 사람이다. 원작을 읽을 때부터 러시아 이름을 대충 기억은 하겠는데 발음이 입에 익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어 이리나의 원래 이름은 이리나 니콜라예브나 아르카지나(Irina Nikolayevna Arkadina)인데, 그냥 영화 내내 이리나라고만 불린다.

단 하나의 예외라면 마샤가 콘스탄틴을 찾을 때 콘스탄틴 가브릴로비치 트레플료프(Konstantin Gavrilovich Treplev)를 애칭 '코스챠'로 부르는 정도? 이 정도면 러시아 문학에 살짝 발만 담갔던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정도니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하나 헷갈리는 것. 극 중에서 '학교 선생(schoolteacher)'으로 불리는 메드베덴코의 이름은 정확히는 세묜 세묘노비치 메드베덴코(Semyon Semyonovich Medvedenko)인데 IMDB 캐스트 정보 페이지에는 배역 이름이 '미하일(Mikhail)'로 되어 있다.

희곡에 정리된 등장인물 목록을 아무리 봐도 이름이 미하일인 사람이 없어서 도대체 누군가 하고 얼굴을 봤더니 학교 선생 역을 했던 그 배우더라.

'세묜'이나 '메드베덴코'라고 부르면 되는데 왜 미하일이라는 이름을 창조해 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인물 한 명에 이름 하나를 고정시킨 것은 헷갈릴 여지가 없어서 편하긴 했다.

 

내가 <갈매기>의 다른 프로덕션은 본 적이 없는 터라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영화의 연출도 좋다고 느끼긴 했다.

내가 제일 감탄한 것은 어느 오후 도른과 마샤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니 이리나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지루해 죽겠다는 듯이 몸을 어째야 하는지 모르고 갑자기 마샤를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마샤를 불러서 자기 옆에 서게 하고는 도른(미쳤다는 게 아니고 의사 선생님 이름이다)에게 자기랑 마샤 중 누가 더 젊어 보이냐 묻는다.

마샤가 아무에게도 말 못할 마음속 슬픔 때문에 늘 상복을 입고 다니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보드카를 들이켜는 여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이로 보면 이리나의 딸뻘이다.

이리나가 아직도 배역을 잘 맡는 여배우긴 하지만, 아무렴 그래도 진짜 젊은 마샤에 비할까.

그렇지만 자신이 젊어 보인다고, '이 나이에도 15살 소녀 역을 할 수 있다'(실제로 있는 대사다!)라고 믿는 이리나의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도른은 이리나가 더 젊어 보인다고 말한다.

이때 마샤와 도른 사이의 눈길을 카메라가 보여 주는데, '아휴, 쟤 또 저런다. 어쩌겠냐, 맞춰 줘야지' 하는 듯한 도른의 표정과 체념한 듯한 마샤의 표정 때문에 '마샤가 그 대답으로 상처 받지 않았구나, 그냥 이리나 비위를 맞춰 주는 거구나' 하고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연출이 참 흥미로웠다. 희곡에는 대사와 아주 간단한('누구누구에게 말한다' 같은) 지시문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 사이의 맥락을 읽고 장면을 상상해서 이렇게 공연을 만들어 낼까?

영화야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써서 연출하는 경우가 많지만, 연극은 대개 남이 쓴 것을 연출가의 역량에 따라 해석해서 공연으로 올리지 않나.

그런데 자신이 상상한 맥락이 맞는다고, 자신의 해석이 적절하다고 어떻게 확신할까? 체호프 같은 옛날 극작가는 죽어서 물어볼 수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롤랑 바르뜨 말대로 '작가는 죽었'고, 독자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은 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이 다른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난 그게 너무 신기하다.

같은 대사, 예를 들어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대사도 진심을 담아 정말 고맙다는 뜻으로 연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비꼬는 듯이 연기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하는 말에 자신이 없다는 듯이 말할 수도 있다.

해석의 여지는 수백만 가지나 되는데 어떻게 희곡만 읽고서도 극이 전체적으로 그럴듯한 설득력을 가지도록, 적당히 맥락을 '만들어' 낼까?

남이 해석한 바를, 그러니까 남이 프로덕션을 올린 걸 봐야지만 나도 그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건 그냥 복제에 불과하겠지만, 진짜 연출가라면 희곡을 읽고 또 읽으며 적절한 장면 연출을 상상해 내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의 연출이 꽤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 희곡을 읽으니 '이렇게 평범한 대사들을 어떻게 살려 내지?' 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우스운 얘기 하나. 극 중 콘스탄틴을 보면서 '어디서 본 얼굴인데...' 하며 '저번에 시얼샤 로넌(니나 역할)이랑 호흡을 맞췄던 그 남배우보다는 조금 더 잘생겼네'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크레디트를 보니 그 배우가 그 배우더라 ㅋㅋㅋㅋ 이번 영화에서 콘스탄틴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이 저번 그 영화 <체실 비치에서(On Chesil Beach, 2017)>의 에드워드 메이휴(Edward Mayhew)였다!

(이 영화 리뷰는 여기에서 보시라.

2018/08/22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On Chesil Beach(체실 비치에서, 2017) - 섹스 없는 사랑, 가능할까?)

같은 배우를 두고 더 잘생겼느니 어쩌느니 드립ㅋㅋㅋ... 뎨둉함미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조금 더 잘생겨 보이긴 한다. 역할 차이일까.

시얼샤 로넌은 여기에서도 눈이 참 예쁘다. 아네트 베닝도 녹색 눈이 꼭 구체 관절 인형의 유리 눈 같아 신기했다.

 

연극의 제목인 <갈매기>는 극 중 콘스탄틴이 쏘아 죽이고 니나의 발밑에 바치는 갈매기에서 따온 것이다.

나중에 니나는 자신의 처지가 갈매기 같다는 대사를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니나와 콘스탄틴 둘 다 갈매기인 듯하다.

보리스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니나를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이 갈매기처럼 파멸시킨다'.

극 중의 등장인물에게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서 뭐에다 쓰겠느냐 싶지만, 그래도 보리스가 자기 파트너이던 이리나 놔두고 니나에게서 진실한 사랑을 느꼈네 어쩌네 운운할 때부터 불길하긴 했다.

결국 시골 별장을 떠나기 전에 기어코 니나를 만나서(영화에서는 니나가 보리스에게 떠나기 전에 2분만 자신에게 시간을 내 달라고 해서 보리스가 지팡이를 놓고 왔다고 거짓말하고 그녀를 만나러 가지만, 희곡에는 그냥 보리스가 출발하기 전에 우연히 니나와 마주치는 걸로 돼 있다) 키스하고 난리...

그래 놓고는 나중에 니나를 버리고 이리나에게 돌아가니, 여전히 니나를 사랑하는 콘스탄틴은 괴로웠을 것이다.

 

괴로움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샤이다. 마샤는 이리나의 오빠 소린의 시골 별장에서 일을 봐주는 관리인 폴리나의 딸이다.

폴리나, 이 여인은 우울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물을 엄청 흘리는데(그 원인이 도른과의 비밀 연애 때문인지, 아니면 남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슬픔이 딸에게도 전염된 듯하다.

마샤는 남몰래 콘스탄틴을 사랑하고 있으며(관계를 따지고 보면 자기 부모님의 고용주의 아들이다), 이 이야기는 도른에게만 살짝 털어놓는다. 그리고 단념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지도 않는 학교 선생 메드베덴코와 결혼한다.

도른과 식당에 나란히 앉아서 자신의 슬픔을 찬찬히 털어놓는 장면이 연기도 좋아서 아주 인상 깊었다.

내가 만에 하나 이 연극 중 인물을 하나 골라서 연기할 수 있다면 단연코 마샤를 고르겠다 싶을 정도로, 내게는 제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콘스탄틴이 쓰고 니나가 연기하는 '극 중 극'의 의미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니나도 '당신 희곡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하고 말하기도 하고.

콘스탄틴은 어머니 이리나가 하는 공연을 비판하며 '연극에도 새로운 형태(form)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는데, 아니 일단 저는 이런 대사가 이해가 안 되거든요...

 

니나: 인간, 사자, 독수리, 뇌조, 뿔 달린 사슴, 거위, 거미, 물속에 사는 말 없는 물고기, 불가사리,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한마디로, 모든 생명, 모든 생명,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지구상에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은 지 벌써 수천 세기나 되었지만, 저 가엾은 달은 밤마다 자신의 등불을 헛되이 밝히고 있다. 초원에서는 이미 학들이 울면서 잠을 깨는 일도 없고, 보리수 숲에서는 5월의 딱정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춥다, 춥다, 춥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두렵다, 두렵다.

 

니나가 콘스탄틴이 각본을 쓴 희곡을 연기하는 부분이다. 이걸 연기하는 니나는 무슨 생각으로 한 걸까... 놀리는 게 아니고 진짜 궁금하다.

 

아,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탕!' 소리가 들리고 나서 도른이 그냥 자기 가방에 있는 뭔가가 터진 걸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보고 오겠다고 한 후 자기 생각대로 그냥 뭐가 터진 거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이때 이리나의 불길한 듯, 뭔가를 예상한 듯한 표정 클로즈업으로 끝이 난다.

사실 누구든 그 장면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콘스탄틴은 이번에 정말로 자살을 성공한 게 맞다.

원작을 보면 도른이 이리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일부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짓말을 하고 트리고린(=보리스=이리나의 파트너=극 중 코리 스톨)을 불러서 콘스탄틴이 자살을 했으니 이리나를 어디든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끝난다.

4막에 니나가 다시 등장하는 게 나로서는 약간 어색한데(최종 막인데 여주인공이 다시 등장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아 데려다 놓은 느낌? 사실 이런 느낌은 <체실 비치에서>에서도 느꼈다) 니나가 자신의 말로 현재 상태를 설명하고 또 콘스탄틴이 자살하게 만들려면 니나를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을 듯.

 

어쨌거나 전체적인 평을 내리자면, 원작 희곡을 몰라도, 다른 프로덕션을 못 본 상태라고 하더라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이걸 보고서 흥미가 생기면 러시아 문학을 찾아 읽거나 다른 연출가의 프로덕션을 찾아 보면 되는 거고, 아니면 그냥 이것만 봐도 무방하다.

원작의 무게에 너무 짓눌리지 말고 그냥 이걸 가벼운 마음으로 봐도 좋지 싶다. 어차피 무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보면 이 영화가 아니라 그 무엇이 됐든 즐길 수 없으니 말이다.  러시아 드라마를 전공해야만 이걸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아네트 베닝, 코리 스톨, 시얼샤 로넌, 빌리 하울 등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좋다. 한 번쯤 꼭 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부담은 가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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