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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홍락훈,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 드래곤 역시>

by Jaime Chung 2024.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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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홍락훈,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 드래곤 역시>

 

 

X(구 트위터)에서 답글 타래와 인용 형식으로 연재된 SF 및 판타지 소설. 추천의 글과 출판사 둘 다 ‘초단편집’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각 작품이 초단편이라고 할 만큼 짧기 때문이다. 각 초단편은 대체로 인물 간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데, 놀랍게도 구어체 대화만으로도 사건이 진행되는 걸 볼 수 있다. 또한 수록된 초단편들은 앞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물론 일부러 그렇게 순서를 정해 편집했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SF를 한 스푼 섞은 느낌의 배경도 있고, 판타지가 기반인데 의외로 현대적인 설정도 있다. 판타지 왕국의 세금징수원들이 ‘K-공무원’스러운 노력으로 최대한 많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하려 노력하기도 하고, 다른 차원과 행성간 이동이 가능해진 시대에서 행성 개척을 위해 값싼 일꾼으로 보내진 뱀파이어와 인간이 인류애를 나누기도 한다.

 

이 초단편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동물의 언어를 통역하는 기계를 발명한 한 개발 팀 이야기이다. 고양이 언어 통역기를 만든 K사에서 이번에는 조류 통역기를 만들자는 기획을 했는데, 정작 만들어서 닭에게 시험해 보니 “…세계 무결성 검사, 진행. 영혼 무결성 이상 없음, 신체 무결성 이산 없음, 전체 운행 정보 이상 없음. 기후 무결성 검사……. 15개 부분 이상 발견. 태양 무결성 검사……. 이상 없음. 일일 세계 재부팅을 완료합니다. 어서 오세요! 사용자님!”이라는 소리를 한다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 이후로 조류 통역기는 파투 났어요. 보고서에 통역 샘플을 그대로 적어서 올렸더니, 상무님이 내려오셔서는 그동안 너무 힘든 일을 무리하게 시켰다고, 조금 쉬라고 하시더라고요. 병가라도 주실 줄 알았는데, 다음 인사이동 때 뱀장어 양식장으로 발령 났어요. 뱀장어 양식장……. 사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일은 단순하고, 생각할 일 없고, 여기 온 모두가 저랑 비슷한 처지라 서로 뭘 하다 왔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한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고요. 사실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이제 누가 동물어 통역기 만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뱀장어 양식장ㅋㅋㅋㅋㅋㅋㅋㅋ 요 뒤에는 K사의 고양이 언어 통역기에 관한 초단편도 있는데, 그건 이렇다.

어…… 서비스 센터죠? 저희가 밥 주는 길고양이가, “그분의 백성을 따스하게 보살핀 자들. 그분께서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그분이 곧 오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달리시어. 그때에 우리가 그분의 발끝에 절하며 너희를 증언하리라……”라고 하는데, 고장 난 거 같아요. 수리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고양이는 진짜로 이렇게 말하고 생각할 거 같아서 이거 고장 아닌 듯.

 

동물의 언어를 통역하는 기계 시리즈에는 ‘반려동물 등록칩 2.0’이라는 듀오칩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건 반려동물 등록칩을 동물뿐 아니라 보호자에게도 이식해 쌍방향으로 정보를 공유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반려동물에게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위기 상황을 쌍방향으로 귱유해 보다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반려동물이 유기되었을 때 보다 신속하게 유기한 사람을 찾아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는데, 심지어 “단순히 위치를 추적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반려동물의 신체 정보 활동을 읽고 반응하여 자동 신고하는 프로그랩도 탑재”되었다. 이 좋은 사업이 보류된 건, 듀오칩의 쌍방향적 기능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보호자가 반려동물 곁에 24시간 있어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보호자도 등교나 출근을 해야 하는데 동물들은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니까, 반려동물이 보호자가 실종됐다고 생각해 신고를 한 것이다. 물론 보호자들이 집에 돌아오면 또 신고를 취소했고. 그게 하루이틀 쌓여서 한 달이 되니까 전산망이 마비가 될 정도였다고. 아니 이런 상상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기능을 조금 정비하기 위해서 현재 시범 사업이 보류되었습니다. 사업이 전면 취소된 건 아닙니다. 반려동물을 유기한 사람을 잡는 데 듀오칩이 의도했던 기능대로 작동해줬거든요. 사실 시범 사업이라 신청한 사람들만 이식한 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려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든 발생하더군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이게 쌍방향 칩이라고 했잖아요? 유기된 반려동물들은 보호자에 대해서 ‘실종 신고’를 했어요. 자기를 버린 게 아니라, 보호자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여간 사람이 제일 나빠요, 사람이…….

아니, 이렇게 짧은 (내 이북 리더 설정 기준 딱 두 쪽) 글로 사람 울리기 있냐고요…. 으앙ㅠㅠ 이렇게 짧은 초단편 내에도 줄거리가 있고, 신선한 설정이 있고, 또 그게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세상(불을 켜는 마법을 간단히 쓰게 해 주는 라이터!)이라든지, 고양이가 차원 중첩에 의해 증식한 상황,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전뇌 인간과, 유성 생식을 하는 ‘핸드메이드 인간’들이 공존하는 시대 등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개중에는 인류에 대한 애정과 철학적인 사고를 보여 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논쟁이 계속되자 이야기를 꺼낸 신이 다시 말했죠. “어차피 우리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가 뭘 해도 신앙은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구성했던 무언가를 남겨줘서 우리를 믿지 않더라도 신앙의 본질이 계속 융통하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자 신앙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리고 그 신은 담담하게 이야기했죠. “사랑.” “사랑을 남기자.” “그들 안에 사랑을 남기자.” “우리의 몸이 수천 수억으로 쪼개져 그들의 몸에 임재하여 사랑을 남기자.” “그리하여 그들이 신앙을 잊더라도 그 본질은 잊지 않게 하자.” ……라고요. 그러고는 그 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쪼개어 자기 세상의 수십억 인간들의 몸에 임재했어요. 그 세계에는 신이 없고 오직 인간과 신앙의 본질만이 남게 되었죠.

 

소프트한 SF나 판타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이 초단편집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한 편 한 편의 길이는 짧아도 꽤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이 책은 428쪽이나 된다. 게다가 이 책은 홍락훈 작가의 초단편집 첫 번째 편이고, 2편 <잼 한 병을 받았습니다>와 3편 <러브 앤 티스>까지 나와 있다. 관심만 있다면 읽을거리는 풍부하다! 나도 크레마 클럽에 올라와 있는 <잼 한 병을 받았습니다>까지 읽어 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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