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홀리 그라마치오, <다락방에서 남편들이 내려와>
호주 출신이며 영국에서 활동하는 게임 디자이너 홀리 그라마치오의 소설. 로렌이라는 31세 여성이 이제 결혼을 앞둔 친구 엘레나와 하루를 보낸 후 집에 돌아왔더니 낯선 남자가 자기 남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모르는 남자가 너무 편하게 자기 집처럼 있길래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고 휴대폰을 봤는데 그 남자가 자기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잠금 화면이었던 거다. 알고 보니 로렌네 집의 다락방에서 매번 새로운 남자가 로렌의 남편으로 내려오고, 그때마다 집도, 로렌의 삶도, 주변 사람들의 상태까지도 바뀐다. 집의 인테리어가 바뀌는 것은 물론이요, 로렌의 직업이 바뀌기도 하고, 로렌의 쌍둥이 언니에게 아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남자가 남편으로 걸렸다? 그러면 적당한 변명을 꾸며내서 그를 다락방에 들어가게 만들면 된다. 전구가 지지직거리고 환한 빛이 나며 그 남자는 사라지고 새로운 남자가 등장할 테니까.
자기를 따라 거실로 들어온 바로 저 남자.
저 남자는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로렌이 돌아서자 남자가 물이 가득 담긴 유리컵을 건넸다. 컵을 받아드는데 자신의 손에 전에 없던 반지가 보였다.
물컵을 오른손으로 옮겨 들고 왼손을 펼쳐봤다. 손바닥을 뒤집어도 보고, 주먹을 쥐어도 보고, 엄지손가락 끝으로 만져도 봤다. 세상에! 정말 반지였다.
“짠 할까?” 남자가 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근데 우유 다 떨어졌어?”
“깜박했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 안이 또다시 달라졌다. 발밑을 내려다봤다. 카펫이 바뀌었다. 남편이 달라질 때마다 인테리어도 바뀌었다. 모두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 눈앞은 그대로인데 돌아보면 마치 누군가가 카드를 뒤집은 듯, 아니면 레버를 잡아당겨 세상을 바꿔놓은 듯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남편이 컵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을 둘러봤다. 또다시 달라진 벽지와 소파, 그리고 책.
“뭐가 있다는 거야?” 그의 몸이 반쯤 다락방 안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로렌이 휴대폰을 눌러 촬영을 시작했다.
“잘 찾아봐. 당신이 그걸 볼 생각을 하니 행복해 미치겠어. 내가 그동안 준비한 것 중에 최고야.”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마침내 남아있던 발 한쪽마저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락방 안이 환해졌다. 전등갓도 없이 대롱대롱 매달린 전구가 불빛을 뿜어내는 게 보였다. 불빛이 번쩍이며 지붕을 바치는 나무 서까래를 환히 비추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보여?” 로렌이 다락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번엔 또 어떤 남자가 나올까 궁금했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돌아서는데 이미 새로운 세상이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를 계속 들이대고 있었는데도 벽지 색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숙취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상황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해서 그런 건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락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위에 뭐 없어?” 로렌이 물었다. 어떤 남자가 나올지 궁금했다.
이런 게임스러운 상상력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꽤 흥미롭다. 다들 예상할 수 있다시피, 랜덤으로 ‘리스폰(re-spawn)’되는 남자들은 로렌의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다(참고로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말하자면, 다락방 시스템은 영화 (1993)처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뛰어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남자도 있고, 나쁜 남자도 있고, 로렌과 비교적 오랜 시간 같이 지낸 남자도 있으며 오자마자 로렌이 단숨에 돌려보내서 ‘엑스트라1’ 정도의 비중을 가진 남자도 있다. 어떤 남자는 로렌이 잊지 못해 계속 그리워하기도 한다. 다락방이 ‘마법’을 부리는 데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로렌은 직접 실험을 해 보며 이를 알아낸다. 그 점을 이용해서 ‘사건’을 해결하기도 하고. 로렌이 만나는 남편이 총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200명이 넘은 건 확실하다. 205번 남편이 코털을 다듬지 않아 돌려보냈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저자는 어쩌다가 로렌의 집에 있는 다락방에서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왜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 해충으로 변해 있다는 걸 발견하는지 카프카가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혼처럼 오래 지속되어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해야 하는 관계는 모든 것이 다 자기 마음에 꼭 들 때까지 ‘맞는’ 상대를 찾는 게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적당한(이런 표현이 적당하지 않다는 점은 인정한다)’ 사람, 그러니까 100%는 아니어도 웬만큼 나랑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그 상대를 내 삶의 동반자로 여기고 평생 함께하며 아껴 주겠다는 맹세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또 실제로 지키는 것이 행복한 장기 관계/결혼 생활의 핵심이리라. 열정은 식을 수 있지만 의지와 이성, 헌신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 상대를 사랑하고 자신의 의무를 지켜 나가야지.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결혼하신 분이나 그에 상응할 정도로 장기 관계에 있는, 또는 있어 보신 분들이 더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건, 책 자체는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편집 과정에서 교정교열을 안 봤는지 오탈자가 틀린 맞춤법이 많다는 거다. 이 책뿐 아니라 요즘 ‘얇다’와 ‘가늘다’를 구분 못 하고 틀린 경우를 많이 보는데, 얇은 건 2차원, 가는 건 3차원입니다. 예를 들어 손목이나 허리, 다리는 3차원 형태이므로 ‘얇을’ 수 없고 ‘가는’ 겁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두께’와 ‘굵기’도 헷갈리지 마시길(이 책에서는 남자 성기의 ‘두께’라고 썼는데 ‘굵기’가 더 문법적으로 옳다고 본다). ‘사나몬롤’은 ‘시나몬롤’의 오타이며, ‘피자’를 ‘파자’라고 잘못 쓴 곳도 봤다. 한두 개면 실수려니 하겠지만 아예 이렇게 ‘실수’가 많은 건 아예 노력을 안 했다는 거 아닌가. 다음 판을 찍는다면 그땐 꼭 고쳐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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