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Will & Harper(윌 & 하퍼)(2024)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코미디 배우 윌 페렐이 자신의 친구 앤드류 스틸과 같이 미국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로드 트립’을 하며 찍은 다큐멘터리. 같이 여행을 한 친구 앤드류가 이 다큐의 핵심인데,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트랜스젠더이다. 이 다큐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의 성전환 이후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를 바라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찍은 것이다(참고로 감독은 윌 페렐이 아니라 조쉬 그린바움이다).
앤드류 스틸은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이하 SNL)’에서 코미디 작가로 1995년부터 2008년까지 일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윌 페렐을 비롯한 많은 코미디 배우들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앤드류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중간에 나오는 내용을 보아하니 자기 누이를 포함)에게 메일을 보냈다. 자신이 여성으로 성전환을 할 것이며, 그 과정이나 그 이후에도 소중한 사람들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는 아직 자신의 ‘새 이름’을 정하지도 못한 상태였다(나중에 로드 트립 과정에서 하퍼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이 새 이름은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을 쓴 작가 하퍼 리에서 따왔다. 자신의 어머니가 하퍼 리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데, 하퍼 리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이거다!’ 싶었다고). 어쨌거나 윌은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응원하고 싶어서, 자신과 같이 추억이 깃든 곳들을 새로운 몸으로 돌아보자며 로드 트립을 제안하고, 하퍼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두 친구는 16일간의 대장정을 떠나게 된다.
다큐는 제목처럼 윌과 하퍼의 우정에 집중한다. 사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왜 ‘하퍼’가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했고, 어쩌다가 중년의 나이에 성전환을 선택하게 된 것인지인데 말이다. 사실 보다 보면 조금씩 그 대답을 듣게 되긴 한다. 하지만 그게 주(主)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윌은 정말 좋은 친구답게 계속해서 자신이 가진 자원, 그러니까 인기라든지 돈이라든지, 이런저런 인맥 등을 이용해 하퍼를 ‘여성’으로서 이 사회에 소개해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미즈 하퍼 스틸(Ms Harper Steel)’를 낯설어한다. 예컨대 윌이 하퍼를 데리고 간 NBL 경기장에서 그는 경기 중간 쉬는 시간에 자신의 친구를 여성으로 소개하지만 그날 저녁 SNS에는 친구에 대한 모욕이 난무한다.
윌이 자신의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연대하려는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나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윌이 정말로 하퍼를 여성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단둘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같은 차 안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수가 없어! 진짜로 하퍼가 중년의 생물학적 여성이었다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이성과 함께 하루에도 몇 시간씩 차 안에서 같이 지내며 2주가 넘게 로드 트립을 할 수가 없다. 형제자매 관계라면 또 모를까. 남남이, 결혼한 것도 아닌데,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걸 이해받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럴 리가 없다. 하퍼 본인도 자신이 이제 ‘여성’으로서 자각하는 데 아직 느리다는 점을 인정한다. 윌과 하퍼는 로드 트립 와중에 SNL을 통해 만난 친구들인 티나 페이나 폴라 펠, 그리고 (내가 이름을 모르는) 어떤 남자 코미디언 배우 등과 만나 회포를 푼다. 티나나 폴라 같은 ‘여자’ 친구들은 이제 하퍼가 여자로서 자각을 가지고 이제 좀 더 조심해야 하는 곳들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예컨대 뒷골목. 하퍼도 이에 동의한다. 얼마 전에 뒷골목을 걷다가 자신은 이제 여성이니까 좀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이에 그 남자 코미디언은 웃으면서 ‘뒷골목은 원래 위험한 곳이잖아’라고 대꾸한다. 아니 누가 그걸 모르냐고요! 여자들은 그런 곳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나는 이 남자 코미디언의 말이 ‘물타기’라고 느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뒷골목을 더욱 위험하다고 느끼고 또 실제로 그러하니까 하퍼에게 그런 말을 한 거다. 근데 원래 뒷골목은 위험하다고? 성별의 문제가 아니고? 남자들은 뒷골목에서 여자들만큼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잖아! 기껏해야 돈 좀 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내가 이 다큐를 보면서 불편했던 데가 한 군데 더 있다. 성전환 이후로 처음으로 SNL 건물에 들어가 같이 일하던 동료들을 만나러 갈 때 하퍼가 한 말인데, 예전에는 그렇게 남자들이 가득한(bro-ey) 환경에서도 잘 어울렸는데 이제 여성으로서 그런 곳에 가려니 긴장된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 남자였을 때는 그런 남성 위주의 분위기에서 잘만 일했으면서, 이제 와서 여자가 되어 다시 돌아가려니 긴장된다고? 솔직히 나는 MTF에 대해 이게 가장 불만이다. ‘아래’ 수술을 했든 안 했든, 일단 공식적으로 성전환을 하기 전 남자로 지낼 때는 남자로서 주어지는 이득은 다 받아먹고서 그걸 바꿀 생각을 안 하다가 ‘나 이제 여자예요’ 하면서는 생물학적 여성들이 살기 불편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거나 이를 개선해야겠다는 어떤 의지를 강력히 내보이지는 않는 것. 생물학적 여성이 웬만큼 살 만해야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인권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때로 나는 왜 MTF들이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여자들처럼 꾸미고, 옷 입고, 화장하는 게 좋아서? 그건 여자가 아니라도, 남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여자들만 그래야 하는 거냐고. 그걸 안 해도 나는 여자인데. 게다가 성전환을 하면서 엄청나게 커다란 가슴을 다는 것도 나는 불쾌하다. 물론, 가슴이 일종의 여성성의 상징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이해한다. 가슴 수술을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건데, 자기 체격에 맞는 크기로 해야 자연스럽지. 어떤 MTF 트랜스젠더들은 웬 수박을 가슴에 달고 다니더라. 여자란 그렇게 가슴이 큰, 하이퍼-섹슈얼한 존재인가? 가슴이 크지 않으면 여자가 아닌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불쾌하다. 하퍼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무슨 포르노 배우 같은 크기의 가슴을 가진 MTF 트랜스젠더들에게 하는 말이다(이런 트랜스젠더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 그들이 생각하는 여자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뜻이다. 여자를 그렇게 생각할 거면, 왜 성전환을 한 거지? 생물학적 여자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할 생각은 있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다큐의 감독은 윌 페렐이 아니라 조쉬 그린바움이다. 우리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게 두 친구의 뜨꺼운 우정 이야기라는 사실은 절절히 느끼게 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팩트’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이건 두 친구의 로드 트립을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너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때로 이게 감독이 있고 각본이 있는 미디어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물론 두 친구의 우정과 케미는 진짜겠지만, 그래도 어디까지가 카메라 앞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카메라를 의식해 만들어낸 행동을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후자라는 건,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그림’이 되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만약 카메라 앞이 아니었다면 안 했을) 행동을 한다는 거다. 윌 페렐처럼 노련한 배우가 아무래도 그걸 모르진 않을 테니.
친구를 위해 같이 미국 이곳저곳을 횡단하는 로드 트립에 나서고, 다큐를 찍으면서까지 응원해 주는 모습은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하지만 모든 MTF 트랜스젠더들이 그만한 지지와 응원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현실적인 면도 그렇고. 하지만 그래서 더 윌과 하퍼의 우정이 빛나는 게 아닐까. 이 정도면 다큐 아니고 판타지라고 해도 될 듯…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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