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과달루페 네텔,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작년 내 독서 챌린지 중 하나가 ‘스페인﹒중남미 문학 읽기’였더랬다. 그래서 읽을 만한 책들을 여럿 발굴했는데, 그때 보관함에 넣어 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생일을 맞이해 친구가 생일 선물로 뭘 원하는지 넌지시 묻기에 책을 달라고 했고, 이 책의 링크를 전송 후 이북으로 선물받았다.
이 책의 리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줄거리를 소개해 드리겠다. 이 소설의 화자는 라우라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프랑스에서 유학했고, 지금은 멕시코로 돌아와 학업(논문 쓰기)을 계속하며 자유롭게 사는 비혼 여성이다.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나팔관을 묶는 피임 시술을 받는다. 라우라에게는 알리나라는 절친이 있는데, 그녀도 라우라처럼 아이를 원치 않았지만 남편 아우렐리오와 결혼 후 남편과 합의하에 아이를 가지기로 한다. 라우라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던 친구가 아이를 가진다니 이제 서로의 세상이 달라져 둘 사이에 거리가 생길까 걱정하지만, 그래도 알리나의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해 준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알리나의 임신이 아니었다. 알리나의 아기, ‘이네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아기를 진단한 의사들에 따르면, 이네스에게는 소실뇌증이 있다고 한다. 아기의 뇌가 발달하지 않아서, 시력이나 청력 등을 온전히 가지고 태어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리나가 이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버릴 거라고 한다. 이제 알리나와 남편 아우렐리오는 이 아기를 포기할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살 수 있도록, 아기에게 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를 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은 이 책의 두 가지 큰 주제를 암시한다. ‘이네스’ 부분은 페미니즘, ‘태어날 거야’는 결혼﹒출산﹒양육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네스’는 유명한 멕시코의 여성 작가이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최이슬기 씨는 이 저명한 작가를 이렇게 소개했다.
1648년 혹은 1651년, 스페인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의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아홉 살의 나이에 남자 옷을 입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엄마를 조르던 그 아이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읽고 쓰기 위해 수녀의 길을 택하고, 명성 덕분에 궁에 입성하여 통치 권력의 후원을 받고 부왕비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작가가 된다. 그녀를 부르는 이름의 목록은 길다. 천재, 멕시코의 열 번째 뮤즈, 아메리카의 피닉스(맙소사), 괴물 혹은 프릭, 어쩌면 레즈비언, 아메리카 최초의 페미니스트. 그리고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여자’.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Sor Juana Inés de la Cruz.
극 중에서 알리나가 딸의 이름을 선언하는 장면은 이렇다. 라우라가 단번에 이름에 찬성하는 거 역시나 좋은 친구답달까.
“딸입니다. 여기 외음부 형태가 아주 선명하게 보여요.”
알리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는 둘 다 그녀가 딸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네스라고 부를 거야.” 알리나가 말했다. 나는 듣자마자 그 페미니스트 시인의 이름에 찬성했다.
알리나가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동안 나는 대기실로 돌아갔다. ‘딸이라니.’ 머릿속에서는 우리 나라 같은 곳에서 그게 어떤 위험을 의미하는지를 헤아리며 나는 생각했다.
반면에 ‘태어날 거야’라는 부분은, 말 그대로 출산을 뜻한다. 이 (한국판) 제목은 알리나의 출산 당일 알리나가 라우라에게 보낸 문자에서 따왔다(참고로 원제는 ‘La hija única’, ‘외동딸’이라는 뜻이다). 알리나는 결국 이네스를 낳기로 결심한 것이다. 잠시 여기에서 표현을 감상하자면, 결국 이네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알리나인데 이네스가 오늘 ‘태어나다’라는 자동사로 표현했다는 게 놀랍다. 아기들은 결국 부모의 상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자기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니까. 기가 막힌 표현…
사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공감하기가 참 쉬웠는데, 라우라의 상황에 개인적으로 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라우라와 같이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알리나가 일 년 먼저 멕시코로 돌아가고, “거리는 우정에 대한 확실한 시험대가 된다.” 하지만 다행히도 “알리나와 나 사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둘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간다. 나도 나에게 이 책을 선물해 준 친구와 서로 먼 거리에서 장거리 우정을 이어나가는 중이기에 알리나와 라우라에게 우리를 이입시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 생각이 없다던 알리나가 “내[라우라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나[라우라]와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숨이 멎을 뻔했다. “그녀는 이제 임신하기를 원했다.” 나는 여전히 아이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데 내 친구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한다? 나의 소중하고 친근한 친구가 다르게 보일 그 순간… 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내 친구… 서로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마음속 거리가 멀어질까 우려하는 라우라의 마음에 나도 너무나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날 저녁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기쁜 척을 하지도, 세세한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우정에는 위선이 들어갈 틈이 없다. 알리나가 우동 그릇을 앞에 두고 새로운 보조생식기술에 대해 떠들어대는 동안 나의 귀는 빛에 민감한 식물처럼 서서히 닫혔다. 미리 찾아온 그리움의 감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우리가 함께한 청춘의 장면들이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선명하게 떠돌았지만, 이제 임박한 미래로 인해 곧 흐릿해질 참이었다. 나는 압도된 채 식당을 나왔다. 시술이 성공하면 알리나는 내가 철저히 속하기를 거부했던 바로 그 무리의 일원이 될 것이었다. 한때 친구였지만 출산한 후로는 공원에 가거나 멍청이들을 위한 영화를 보러 갈 때만 자기들끼리 만나는 그 모든 여자들 말이다. 시술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었다. 알리나는 모성을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운명으로 수락한 반면, 나는 바로 그 모성을 피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으니까.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임신을 하려는 사람들, 그들을 사로잡은 갈망의 정체가 항상 흥미로웠다. 아이를 가지겠다는 일념으로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정자은행의 도움을 청하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배를 빌리느라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들. 반면 뜻하지 않은 임신이 되어 삶에 갑자기 닥친 불운처럼 임신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리나는 임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고용량의 호르몬 투여로 체중이 오르락내리락했고 마치 회전식 탈수기에 탈탈 털린 것 같은 기분 상태였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제선 밀라레파Jetsun Milarepa의 시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복해지려 애쓰면서 자기 고통을 향해 뛰어들다.” (…)
그리고 알리나가 임신 소식을 라우라에게 알릴 때는 또 어떤가.
요일 오후, 알리나에게 전화가 왔다.
“좋은 소식이 있어.” 그녀가 말했다.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고 싶어서.”
아무 말도 더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했고 나는 알리나 목소리의 떨림만으로도 무슨 말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임신’이라는 단어를 발음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 느낌이 환희에 가까워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내가 기뻐할 수 있지? 알리나는 어머니라는 종교집단에 합류하여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자기 인생이라고는 없이 거대한 다크서클이 내려온 좀비 형상을 하고 유아차를 질질 끌고 다니는 존재들 말이다. 아마 일 년도 되기 전에 육아 로봇으로 변신할 것이었다. 항상 의지했었던 친구가 사라져버릴 텐데, 나는 거기, 수화기 반대편에서, 그걸 축하하고 있다고?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행복에 전염성이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나의 성이 그 짐을 피할 수 있도록 내 평생을 바쳐 활동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이 기쁨에 맞서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진짜 좋은 친구다… 물론 나도 그런 소식을 들으면 축하한다고 말해 주겠지만, 진짜 진심으로 이를 기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상황을 상상해 봤는데, 그래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내가 승진을 딱히 바라지 않는데(승진해 봤자 일만 늘고 연봉은 거의 그대로일 테니까) 친구는 열심히 일해서 승진하고 싶어 하고, 또 실제로 그걸 얻어냈다면? 당연히 나도 축하한다고 할 거고, 그 말은 정말 진심일 것이다. ‘우리 뫄뫄 대단해!’라고 뿌듯해하면서. 질투는 1g도 없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임신은? 모르겠다. 내가 단언컨대 한 번도 원하지 않았고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거라서 그런가. 위에서 라우라가 인용한 “행복해지려 애쓰면서 자기 고통을 향해 뛰어들다”라는 시구에 공감할 수밖에 없달까…
어쨌거나 알리나는 임신하고, 그 이후는 내가 위에서 소개한 대로다. 이네스는 소실뇌증이라는 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나고, 알리나와 아우렐리오는 생각보다 오래 살아내는, 의사들이 예측한 것처럼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자마자 죽어버리지 않는, 이네스를 집으로 데려가 키우느라 애를 쓴다. 이러다가 결말까지 스포일러 해 버릴까 우려되니까 딱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결국 알리나와 아우렐리오는 마를레네라는 보모를 들인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동 교육을 전공했으며, 몬테소리 학교에서 도우미로 일하기도 했다. 나이는 서른 살인데 본인의 아이가 없어서 이네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늦게까지 남거나 아예 이네스 옆에서 자면서 아이를 돌봐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굳이 이것까지 말하면 줄거리가 헷갈릴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라우라의 옆집에는 도리스라는 한부모와 그녀의 아들 니콜라스가 산다. 라우라는 종종 밤에 험한 말을 하고 악을 쓰며 엄마 도리스의 말을 듣지 않는 소년 니콜라스와 친해지고, 도리스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라우라는 자기 집 대들보에 둥지를 튼 비둘기 가족도 관찰하는데, 그 비둘기 부부의 알은 한 뻐꾸기의 알로 대체되고 비둘기 한 쌍은 알에서 태어난 뻐꾸기를 기른다. 마를레네가 알리나 부부를 대신하는 이네스의 또 다른 양육자가 되듯, 라우라는 도리스를 대신해 니콜라스를 돌보아주는 ‘이모’가 되는 셈이다. 비둘기와 뻐꾸기는 라우라네 집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의 상징과도 같다.
소설 전체를 다 살펴본 게 아니라 정말 겉만 훑었는데도 이 정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정말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난치병이 있고 오래 살지 못할, 그리고 산다고 하더라도 삶의 질이 현저히 낮을(스스로 자기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아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명이라도 키워야 할까? 또한 생물학적 부모가 정말 아이에게 최고의 보호자일까? 자기의 친자식이 아니라서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어떻게 애를 먹여 살리지?’ 같은) 실질적인 걱정 또는 ‘너는 이 아이 부모니까 이 아이를 사랑해야만 해!’라는, 입 밖에 내어 말해지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강제에 지배되지 않고, 사랑만을 기꺼이 줄 수 있는 다른 이들이 더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건 아닐까? 무엇보다 나는 아이를 절대 원하지 않는 나 같은 비혼 여성의 모습을 소설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반갑고 기뻤다.
솔직히 이 소설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몇 군데 아쉬운 점이 존재한다. 극 중 타로 카드 점을 보고 이게 약간의 ‘떡밥’ 역할을 한다는 점이나, 라우라와 엄마와의 관계가 드러나긴 하는데 뚜렷하거나 큰 갈등 없이 적당히 언급되고 지나가는 정도라는 점, 마를레네가 진짜 믿을 만한 보모인지, 뭔가 반전이 있는 건가 하는 혼란을 주었지만 사실 결과적으로 아무 일 없다는 점, 그리고 ‘라 콜메나(벌집)’이라는 이름의 페미니스트 단체가 등장하는데 엄청 임팩트 있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 아, 그리고 마지막에 반전이라면 반전이 하나 있는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고 이입할 만한 지점이 많아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아이를 원치 않는 여성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이런 소설을 더 많이 만나 보고 싶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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