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강성은 외 7인, <바리는 로봇이다>
기존 설화/동화를 현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쓴 단편소설들 모음. 강성은, 김미월, 김유담, 김현, 박서련, 배예람, 오한기, 조예은 등 작가 8명이 참여했다.
각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전반적인 평을 내리자면, 모든 작품이 공통적으로 가진 현대 동화 같은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이런 앤솔러지가 대체로 그러하듯 개인 취향과 작가의 역량에 따라 좋은 작품, 마음에 드는 작품과 별로인 작품이 극명하게 나뉜다. 대체적으로 고만고만하게 괜찮거나 고만고만하게 별로인 앤솔러지는 잘 못 봤다.
이제 한 편씩 소개를 하자면, 일단 내가 좋아하는 박서련 작가의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바리는 로봇이다>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바리데기 설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59명의 로봇 공학 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로봇인 바리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불린 적도 있었던 대단한 배우인 할머니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열다섯 때 모습을 꼭 빼닮게 만들어졌는데, 정작 바리가 만들어지자 “내가 열다섯 때는 이것보다 훨씬 예뻤다고요”라며, 바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저 ‘버리라고’ 한다. 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한 박사가 이 로봇의 이름 칸에 ‘바리Vari’라고 적어넣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이름을 가지게 된 바리. 박사들은 이 로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긴 토론 끝에 박물관에 보내기로 한다. 그렇지만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뭔가가 떨어져 다리를 부순다. 바리와 박사, 경호원들이 탄 자동차는 다리 아래로 떨어졌고, 물에 가라앉았다. 바리를 박물관으로 데려가려던 박사와 경호원들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 바리는 혼자서라도 박물관으로 가기로 하는데… 아래 인용문은 소설 거의 첫부분에 등장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리고 싶었다.
박사님들은 왜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모양의 로봇을 만들었을까? 누군가 그런 로봇을 사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로봇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친구나 가족이 필요했던 사람, 예를 들어 지금 막 열다섯이 된 친구를 만나고 싶은 인간 여자아이, 잃어버린 딸을 그리워하는 엄마 아빠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함부로 대하고 마구 부려먹을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데 그게 10대 여자아이 모양을 하고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한 나쁜 사람들도 있었다. 옛날 옛날 새날 새날의 이야기지만, 사람은 사고팔 수 없어도 사람을 쏙 빼닮은 로봇은 사고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바리 같은 로봇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는 착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로봇을 가족이나 친구로 여길 수 있는 다정한 사람들은 조금 지나면 곧 로봇이 나이를 먹지 않는 점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지만 나쁜 사람들은 오히려 로봇들이 나이를 먹지 않아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따라서라고 하기에는 역시 조금 이상한 얘기지만, 59명의 박사님이 만든 뛰어난 로봇들은 매우 인기가 좋았다.
김현 작가의 <스위밍>은 인어공주 이야기이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수영은 극 중 메타버스 플랫폼인 ‘와일드’에서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디바 아몬이라는 가상 인간에게 푹 빠지게 된다. 두 다리가 없는 27세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은 이 가상 인간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수영은 자기도 ‘와일드’에 가입해 ‘스위밍’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창조한다. 아래 인용문이 그 캐릭터에게 수영이 부사한 ‘존재 서사’, 즉 캐릭터 설정이다.
존재 서사를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수영은 확인 버튼을 터치했다.
스위밍. 타운 노아 S존에 사는 스물일곱 살 장애 여성. 수중에서 수화로 〈Part Of Your World〉를 부르는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이름 대신 ‘농아 인어공주’라고 불리기도 함. 그 때문에 악성 와일러들에게 시달림(
공주가 병신이라니).……하지만 스위밍은 그런 혐오폭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서양 프리 다이빙에 도전하기 위해…… 수영은 ‘익웨프 슈트’를 입고 프리 다이빙을 하며 이를 와일드에 업로드하는 스위밍의 존재 서사를 쓰며 기뻐했다. 그 이야기는 이전의 스위밍과 이전의 수영에게 전혀 다른 꿈을 선사하는 것이었기에. 수영은 쓰면서 다른 세계를 잊었다. 이 세계에서는 계획대로 물거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음… 예… 그렇군요… 장애인이 혐오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타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모든 장애인이 그런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 비장애인이 그런 장애인의 서사를 꿈꾼다는 게 약간 께름칙한 부분이다. 트랜스 장애인 같은 건가? 아무리 저자가 (각 단편 바로 뒤에 나오는) 작가 후기에 “’장애인다움’이란 없다”라고 썼다지만, 극 중 비장애인 인물이 디즈니의 인어 공주를 동경하며 장애인 (게임) 캐릭터를 만든다? 누군가에겐 현실인 장애가 누구에겐 자신의 서사를 멋지게 만들 패션 아이템 같은 건가? 비장애인인 나라면 굉장히 조심했을 거고, 인어공주 이야기를 굳이 쓰고 싶다면 다른 식으로 표현했을 것 같다.
조예은 작가의 <탑 안의 여자들>은 라푼젤 이야기이다. 저자는 라푼젤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녀의 마지막을 누군가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알 담아”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최애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도 않은, 적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오한기 작가의 <속초 도수치료 후기>는 손톱을 먹은 쥐가 그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를 이용했다. 만날 책상 생활을 하는 작가(원래는 소설가였지만 먹고살기 위해 파워블로거가 된 작가)가 속초로 가족 여행을 떠나는데, 아뿔싸, 아이를 안아 차에 태우다가 허리를 삐끗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운전을 강행했는데 호텔에 도착해서는 통증이 심해 아예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올라가 폭풍 검색 후 도수치료를 잘한다는 한 도수치료사를 찾아가게 되는데… (더보기) 나를 똑 닮은 복제 인간에게 일을 시키고 나는 실컷 놀겠다는 생각을 해 보신 분이라면 이 소설 속 주인공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김미월 작가의 <새그물을 뒤집어쓴 엘제>의 기반이 된, 그림 동화의 ‘영리한 엘제’ 이야기는 이 단편집의 모티프가 된 것들 중 제일 대중적 인지도가 낮지 않나 싶다. 영리한 엘제가 영리한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하는 한스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읽다 보면 ‘엥?’ 싶긴 한데 저자도 저자 후기에 “엘제의 영리함에 대해서는 그가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건강해진 후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써서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영리한 여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존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살림, 또는 자기 인생을 단순하고 편하게 만들어 줄 대상으로 여기고 결혼한 한스이기에, 엘제의 결혼 생활이 편하거나 쉬웠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 이야기이다.
배예람 작가의 <헨젤과 그레텔의 거처>는 말 그대로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인데, 이 앤솔러지에서 최고로 생활감 넘치고, 제일 한국적이며, 아주 무섭다고 할 수 있다. 거의 호러 소설이다. 김헨젤과 김그레텔 남매는 작은 빌라에서 살았는데, 집주인이 계약을 연장하지 않아 다른 집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러다가 중고거래 앱에서 발견한 한 문장. “세입자 구합니다. 숙식 무료로 제공. 기간 협의 가능. 상도 X동 XX-XX 번지.” 캐리어 둘과 백팩 하나라는 단출한 짐을 가지고 남매는 그 집으로 향한다. 그 집은 놀랍게도 과자집 형상이었으며, 집 안에는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넓었고(타디스인가?), 식사가 하루에 세 번 무료로 제공되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파격적으로 좋은 집이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안락함에 빠져들어가는 남매는 결국 이 집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아래 인용문은 ‘내 한 몸 뉘일 곳’을 찾는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왔다.
많은 걸 바란 게 결코 아니었다. 그냥 이 정도의 삶이면 충분했다. 지나치게 ‘열심히’가 아니라, 그냥 되는 대로 어떻게든 살다 보면 편히 쉴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 보장되는 삶. 그런 삶을 바라는 게, 언제부터 불가능한 꿈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푹신한 러그 위로 발바닥을 비비면서 빈백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다가 늘어지게 낮잠 잘 수 있는 삶, 음식 냄새가 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잘 필요가 없는 삶. 벽을 타고 들려오는 옆집의 소음에 귀를 틀어막을 필요가 없는 삶. 고지서를 보며 한숨 쉬지 않는 삶. TV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명인들의 넓고 화려한 집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런 곳에서,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는 꼭…… 그런 무력한 꿈 따위를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는 삶.
김유담 작가의 <아랑은 참참참>은 아랑 설화를 차용했는데 솔직히 이 앤솔러지에서 최악이다.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더니 어이가 없게 끝나 버려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의 말투도 자연스럽지 않다. “과거의 나는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매혹됐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쉽게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저자의 후기에는 나도 공감하지만, 그 주제 의식을 이 소설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여 주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강성은 작가의 <빛을 가져온 사람>은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재해석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짧은 정보는, 이 소설 끄트머리에도 소개되지만 바로 이것이다. “1827년 존 워커가 발명한 최초의 성냥 이름은 ‘빛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뜻의 루시퍼였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작품을 꼽으라면 <바리는 로봇이다>와 <헨젤과 그레텔의 거처>를 선택하겠다. ‘꼭 읽어라!’ 하고 추천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마주친다든가 밀리의 서재 같은 플랫폼에서 발견한다면 부담없이 한번 시도해 볼 만은 하다. 그 정도 느낌이면 딱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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