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양귀자, <모순>
솔직히 이토록 유명하고 호평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소설에 대해 리뷰를 쓰기가 좀 그렇다. ‘남들 다 좋다는데 내가 이걸 이해를 못해서 별로라고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해는마시라. 사실 이 작품 자체가 별로다, 못 썼다는 뜻이 아니라 나랑 딱히 주파수를 공유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니까. 내가 공감하기 어려워하는 상황을 다루는 소설이라 그런가? 주인공 안진진은 지금 두 갈래 길에 놓여 있다. 두 명의 남자가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있으며, 조만간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은 김장우라는 감성 넘치는 사진작가로, 사정이 어려운 형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거의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형의 양말을 빨아 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지). 다른 한 명은 나영규라는 남자인데, 그 자신의 인생을 포함해 모든 것이 빈틈없이 계획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안진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에도 갈 음식점에는 예약을 해 놓고, 영화를 본다면 하루 전에 예매를 해서 절대 헛걸음을 하지 않게 한다. 게다가 나영규와 달리 집안 사정도 괜찮아 보인다. 안진진은 두 남자 중 누굴 선택할 것인가?
⚠️ 아래 독서 후기는 양귀자의 소설 <모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안진진의) 엄마와 엄마의 쌍둥이 여동생인 안진진의 이모는 이 소설에서 퍽 중요한 인물이다. 엄마와 이모는 10분 차이로 태어났는데 엄마는 ‘잘못된 남자’(이모가 만나려던 남자)를 선택해 결혼해서 평생 힘들게(그 문제의 남자, 즉 안진진의 아빠가 된 남자는 노름꾼에다가 폭력적인 성향까지 가지고 있었다고만 해 두자) 살았다. 그래서 엄마는 억척스럽게 시장에서 속옷 따위를 팔며 안진진과 동생 안진모를 키우며 살았다. 반면에 이모는 심심하고 예측 가능할지언정 풍요롭고 교양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 우아하게 살았다. 이모는 딸과 아들을 낳아 잘 키워서 유학까지 보냈고, 자기 조카인 안진진을 애틋하게 생각할 정도로 삶에 여유가 넘친다. 그러다가 그 넘침이 부족함보다 못해 평탄함 삶이 마치 “무덤 속”에서 사는 것 같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 후 자살한다. 물론, 안진진은 사랑하는 이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풍요로워서, 가진 게 많고 어려움을 겪지 않아서 삶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우울증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우울증이 있다면 다른 상황에서도, 그러니까 안진진의 엄마처럼 집안 살림에 도움이 안 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애 둘을 스스로 돈을 벌어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도 똑같이 괴로워하며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문제는 우울증이지, 넘치는 돈, 안락한 삶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렇게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우울증으로 삶을 마감한다는 사실 자체는 현실에서도 일어나는 100% 진실이 맞는다. 그것이 삶의 ‘모순’인 건 맞지만, 우울증의 원인이 ‘가진 게 많아서, 부족함이 없어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이모가 원래 엄마보다 (아무래도 풍족하게 사니까 그런 것에 더 신경 쓸 여유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감성도 풍부한 것 같고, 기질적으로 우울증에 취약했나 보지.
제목은 ‘모순’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삶에 대한 부러움 또는 동경’으로 해석했다. 안진진의 삶이 ‘모순’이 되려면, 엄마가 자신을 가난하게 살게 만든 남자를 선택해 고생한 모습을 보고도 안진진은 자신을 가난의 길로 인도할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김장우를 골랐어야 한다. 그런데 안진진은 결국 돈도 많고 삶을 일련의 계획표에 따라 사는 것 같아 보이는 나영규를 선택한다. 물론 그 이유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의 앞에서는 꾸미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래 인용문처럼.
나는 나영규 앞에서 솔직했다. 동시에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외 모든 정황은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나영규는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알고 있다. 나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 주는 데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이게 ‘더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도적으로 엄마의 삶과는 다른 삶을 위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모순이 아니잖아요…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고서도 똑같은 선택을 해야 ‘모순’이 되는 게 아닌가? 이모가 자살한 때 남긴 편지에도 자기 언니(즉 안진진의 엄마의 삶)의 삶은 가난하더라도 뭔가 할 일이 있고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 부럽다는 생각이 엿보이는데, 이거야말로 자기가 살지 않은 남의 삶을 부러워하는 거지…
나는 이 책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풍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한 여자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두 남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이 책의 주요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이 남자들은 오스틴의 소설에서 흔히 그러듯이 온전히 여자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통 남자 작가들이 쓴 작품에서 여자 캐릭터들이 어떤 매력적인 뒷이야기나 설정도 없이 온전히 남자 주인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근데 그걸 성 반전하면 딱 이 김장우와 나영규 같다. 그 점은 마음에 든다. 애초에 나는 결혼이라는 선택지에 큰 관심이 없지만, 저자가 안진진의 입을 빌려 ‘이 선택에 태클 걸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정녕 그날의 다짐을 성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스물다섯 이전의 졸렬했던 내 인생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부터라도 주어진 내 삶에 전력투구하고 싶다는 그 가상한 각오가 이렇게 무너지는가.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한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기 좋은 말들로 나를 설득할 생각도 하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 결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섭렵은 끝났다. 사색이 깊은 나머지 인생 자체가 졸렬해지고 말았다면, 나라는 인간을 혐오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면, 그래서 다시 인생을 탐구해 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제 이해할 수 있을까.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한 게 과연 ‘더 잘한’ 선택일까? 안진진이 책 마지막에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도 실수이고 옳은 선택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김장우를 선택했어야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닐 거다. 왜냐하면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믿는 사람이 실수가 아니라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삶을 보는 관점이 그런데 어쩌랴.
양귀자 작가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줄거리만 봐도 흥미로워 보여서 다음에는 이걸 읽어 보고 싶다. 그래도 많이 팔리고 요즘에도 많이 읽히는 책이니까, 한 번쯤은 읽어 볼 만하다. 읽어 보고 취향에 맞으면 ‘인생 소설’을 만나게 되는 셈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으니까 한번 시도해 보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과달루페 네텔,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1) | 2025.04.02 |
---|---|
[영어 공부] incapacitate((질병 등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다) (0) | 2025.04.02 |
[월말 결산] 2025년 3월에 읽은 책들 (1) | 2025.03.31 |
[책 감상/책 추천] 돌리 앨더튼,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 (2) | 2025.03.28 |
[책 감상/책 추천] 정대건, <GV 빌런 고태경> (1) | 2025.03.26 |
[책 감상/책 추천] 오혜민, <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 (0) | 2025.03.24 |
[책 감상/책 추천] 패멀라 폴, <우리가 두고 온 100가지 유실물> (2) | 2025.03.21 |
[책 감상/책 추천] 캐럴라인 냅, <욕구들> (1)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