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와… 어렵다. 종이책 기준 106쪽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고, 개중에 절반은 저자 본인이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 하고 나름대로 설명하는 글과 역자의 후기라서 실질적으로 소설만 따지면 한 50쪽 정도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정말 어렵다.
사실 줄거리 자체는 그래도 따라갈 만하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젊은 사학자 펠리페 몬테로는 사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이 일자리에 지원하러 콘수엘로 부인의 집에 간다. 콘수엘로 부인은 고인이 된 자신의 남편 요렌테 장군의 비망록을 정리해 줄 것을 펠리페에게 요청하고, 그동안은 이 집에서 지내라고 한다. 콘수엘로의 조카라고 하는, 아우라라는 이름의 어여쁜 소녀에게 반한 펠리페는 그 집에서 머무는 동안 아우라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콘수엘로 부인과 이 집에서 구해 주겠다고 마음먹는데…
이 뒤에 꽤 충격적인 반전이 있는데 이후 리뷰는 스포일러를 봐도 괜찮다 하시는 분만 보시길.
⚠️ 아래 독서 후기는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소설 <아우라>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반전은 이것이다. 알고 보니 콘수엘로 부인과 아우라는 같은 사람이었고, 펠리페는 요렌테 장군의 젊은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콘수엘로 부인이 어떤 흑마법을 써서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콘수엘로의 늙은 모습과 젊은 모습이 콘수엘로 부인과 아우라로 분리되었고, 펠리페는 본인이 요렌테 장군의 젊은 분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콘수엘로 부인과 아우라가 동일 인물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은근히 암시되는데, 펠리페가 콘수엘로 부인을 보러 갔을 때 그녀는 어떤 동물을 잡아 죽이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우라에게 가니 아우라는 부엌에서 양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너는 등을 돌려 부엌에서 나와 이번엔 제대로 한번 노파에게 이야기하려 해. 면전에서 그녀의 탐욕과 혐오스러운 횡포에 대해 따져야만 해. 네가 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보니 그녀는 빛의 장막 뒤에 서서 허공에 대고 무언가를 하고 있어. 허공에 팔을 뻗고 두 손을 움직이고 있어. 한 손은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뭔가를 잡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쥐고 계속 같은 곳을 치고 있어. 이윽고 노파는 가슴에 손을 모으더니 한숨을 쉬고는 허공에 대고 다시 무언가를 자르기 시작해. 그래. 이젠 분명히 보이는 것 같지. 이번엔 무언가를 벗기고 있어. 마치 짐승의 가죽 같은 것을…….
너는 막 달려가. 현관을 통해 거실을 지나 식당을 향해서. 거기서 아우라는 천천히 새끼 양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데, 그 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네가 들어오는 소리도, 네가 말하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네가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거야.
너는 몸을 말리면서 노파와 젊은 여인이 너에게 미소 지으며 서로 껴안고 있던 것을 기억해 내. 그들은 방에서 나가기 전에도 껴안고 있었어. 그들이 한곳에 있을 때에는 항상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되새겨. 그들은 마치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한 사람의 의지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된 것처럼 서로 껴안고, 동시에 미소 짓고, 식사하고, 말하고, 함께 들어왔다가 나가. 너는 면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 뺨을 살짝 베고 말아. 너 자신만큼은 네가 통제하려고 노력해. 면도를 끝내고선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하인이 하숙집에서 가져다 놓은 여행 가방 안의 짐들과 플라스크 병들, 그리고 튜브 등을 살펴봐. 이 물건들을 만지고, 이름을 중얼거리고, 용법과 내용물에 대한 설명서를 읽으며, 상표 이름을 발음하기도 하지. 너는 이름도 없고, 상표도 없고, 합리적인 일관성도 없는 무언가를 잊기 위해 애써 이러한 물건들에 집착하는 중이야. 아우라가 네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여행 가방을 쾅 덮으며 자문하지. 도대체 뭘 원하는 것일까?
한쪽만 늙고 다른 한쪽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작품은 심지어 2인칭(’너는~’)으로 서술되어 더욱 신비하고 묘한 느낌을 준다. ‘네’가 펠리페라는 사학자이고, 요렌테 장군의 젊은 분신이라면, 그를 ‘너’라고 부르는 이 화자는 요렌테 장군 본인일까?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하다.
종이책은 6,300원, 전자책은 단돈 4,900원인데 딱 이 가격을 가지고 뭔가를 읽었다는 티를 내기에는 더없이 좋다. 다만 이해가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거… 개인적으로 본문은 그나마 줄거리라도 따라갈 수 있었다지만, ‘나 자신을 읽고 쓰기에 관하여 — 나는 <아우라>를 어떻게 썼는가’라는 저자의 노트는 거의 미스터리다. 자신이 어디에서 <아우라>를 쓸 영감을 얻었고 어떤 요소를 어디에서 따왔는지 설명하기 위해 일본 영화감독 미조구치 겐지나 프랑스 영화 <절멸의 천사> 등을 접했던 경험을 소개하는데, 아… 정말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낯선 언어권, 낯선 문화권의 작가라서 배경 지식이 없는데 마리아 칼라스 얘기가 나올 때엔 완전히 그냥 내 정신을 놓아버렸다. 번역가가 쓴 작품 해설은 그래도 조금 도움이 되긴 하지만, 쉬운 말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똑같다. 이쯤 되면 소설 본문이 제일 쉬웠다. 이해가 안 되어서 더욱더 신비하게 느껴지는 이 소설의 마법…
아쉬운 점은, 100쪽을 겨우 넘는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교정교열이 잘못된 부분이 네 곳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본문이 시작하자마자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 이게 가장 큰 문제이다. 본문 첫 페이지에는 월급이 ‘3000페소’라고 되어 있는데, 그다음에는 월급이 언급되는 부분마다 ‘4000페소’라고 한다. 내가 너무 황당해서 영어 번역본을 찾아봤더니 분명히 맨 처음 광고에서도 월급이 ‘4000페소’라고 명시돼 있다. 이건 100% 번역본에서 실수한 거다. 아니, 틀릴 거면 다 틀리든가, 왜 뒤에는 4000페소라고 맞게 써 놓고 처음 나왔을 때 거기에서 딱 틀려 버리냐고요… 내가 좋아하는 출판사이긴 한데 이렇게 중대한 실수를 하다니 민음사에 실망했다. 그 외에 “인용하자면사랑의”처럼 띄어쓰기를 안 한 부분도 있고, “마지막 으로”라고 하지 말아야 할 띄어쓰기를 한 부분도 있다. “‘나 ‘와’너 ‘의” 이 부분은 (작은따옴표가 폰트에 따라 안 보일 수도 있으니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작은따옴표 열고)나(작은따옴표 닫고)와 (한 칸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너(작은따옴표 닫고)의”가 되어야 할 부분인데 “(작은따옴표 열고)나(작음따옴표 또 열고)와(한 칸 띄지 않고) 너 (어이없게 여기에서 한칸 띄고)(작은따옴표 열고)의”가 되어 버렸다. 말로 하니까 헷갈릴 수 있는데 본문으로 보면 눈에 확 띈다. 편집할 때 이걸… 놓치셨다고요? 이 짧은 책에 네 곳이나 교정교열 실수가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다음 쇄에는 꼭 고쳐 주시길 바랍니다.
이북으로 사면 단돈 5,000원도 안 하는 돈을 가지고 미스터리에 빠진 듯한 신비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한 번 시도는 해 볼 만하지만 취향에 맞을지는 장담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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