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쓴 작가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 간단히 요약하자면 앨리스 섬에 있는 유일한 서점 ‘아일랜드 서점’을 운영하는 홀아비 에이제이 피크리가 서점에 맡겨진 업둥이 마야를 키우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안다, 내가 이 줄거리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리고 이게 제빈의 작품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 손도 안 댔을 것이다. 너무… 전형적이라고 할까, 뻔하다고 할까, 대충 에이제이와 마야가 가족이 되어가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다 읽고 났으니 말이지만,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기분 좋아지는(feel-good)’ 소설이라고 하기엔 뭔가 다르다. 뭐가 다르냐면, 글쎄… 나는 이게 억지 감동이라고 느껴지지 않아서 좋달까. 분명히 설정과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줄거리만 놓고 보면 흔하디흔한 ‘감동 소설’ 중 하나 같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진정성이요? 그렇게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을! 대체로 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하면 그걸 꺼낸 사람을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인데,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놀랄 노 자다. 솔직히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해서 이 책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일찌감치 이 책에서 멀어져서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이다.
내가 책과 서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이 책을 좋아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책을 좋아하니까 이 소설도 읽었겠지만,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만은… 무슨 말인지 아시죠? 다들 서점이나 최소한 그만큼 책이 많은 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 한 번쯤은 해 봤잖아요. 근데 이건 주인공이 서점 주인이고 그 주인의 (입양된) 딸이네? 완전 애독가들의 로망 아니냐고요… 너무 좋아요… 각 장은 에이제이가 마야에게 추천하는 작품의 제목이고(예를 들어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고자질하는 심장> 등), 왜 마야가 그 작품을 읽기를 바라는지, 자기는 그 작품을 어떻게 평하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거 진짜 개큰 사랑 아닌가요? 우리 아빠가 나를 위해 이런 글을 썼다고 생각하면 나 광광 우럭…
어쨌든, 아무래도 서점 주인(에이제이)과 출판사 영업 사원(어밀리아)이 등장하다 보니, 책깨나 읽었다는 독자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다. 일단 이 부분.
그녀는 서른한 살이고, 지금쯤 임자를 만나야 되지 않나 싶다.
그렇긴 해도……
긍정왕 어밀리아의 신념은 감수성과 관심사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살 바에야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어밀리아의 어머니는, 소설 따위를 읽으니까 현실의 남자가 눈에 안 차는 거라고 곧잘 얘기했다. 그런 논평은 어밀리아에 대한 모욕인데, 왜냐면 전형적인 로맨틱한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만 읽는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로맨틱한 남주가 나오는 소설도 나쁘진 않지만, 어밀리아의 독서 취향은 그보다는 훨씬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게다가, 그녀가 비록 험버트 험버트2를 캐릭터로서 애정하긴 해도 평생의 반려자로서나 남자친구 혹은 어쩌다 만나는 지인으로라도 마다하게 될 거라는 점은 솔직히 인정한다. 홀든 콜필드3와 저 두 신사양반, 로체스터4와 다아시5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주인공.
3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4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의 주인공.
5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그렇지만 다아시는 멋있지 않나요? 로체스터는 괴팍한 면이 있으니 지인으로라도 꺼린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데, 다아시는 왜? 콜린 퍼스가 분한 다아시라면 더욱더 꺼릴 이유가 없지! (내가 엘리자베스 역이라는 보장이 없어서 그런가? 🥲)
또한 책 취향이 까다로운 독자라면 에이제이의 말에도 공감할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거?” 그는 불쾌감을 담아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싫어하는 걸 말하면 어떨까요?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말물, 죽은 사람이 화자거나 마술적 리얼리즘을 싫어합니다. 딴에는 기발하답시고 쓴 실험적 기법, 이것저것 번잡하게 사용한 서체, 없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삽화 등 괜히 요란 떠는 짓에는 근본적으로 끌리지 않습디다. 홀로코스트나 뭐 그런 전 세계적 규모의 심각한 비극에 관한 소설은 다 마뜩잖더군— 부탁인데 논픽션만 가져와요. 문학적 탐정소설이니 문학적 판타지니 하는 장르 잡탕도 싫습니다. 문학은 문학이고 장르는 장르지, 이종교배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는 경우는 드물어요. 어린이책, 특히 고아가 나오는 건 질색이고, 우리 서가를 청소년물로 어수선하게 채우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백 쪽이 넘거나 백오십 쪽이 안 되는 책도 일단 싫어요. TV 리얼리티쇼 스타의 대필 소설과 연예인 사진집, 운동선수의 회고록,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소설, 반짝 아이템, 그리고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뱀파이어물이라면 구역질이 납니다. 데뷔작과 칙릿, 시집, 번역본도 거의 들여놓지 않아요. 시리즈물을 들이는 것도 내키진 않지만 그건 내 주머니 사정상 어쩔 수 없고. 당신 편의를 봐서 말하는데, ‘빅히트 예정 시리즈’ 같은 건 그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기 전까지는 나한테 말도 꺼내지 마쇼. 그리고 로먼 씨, 난 무엇보다 말이죠, 별볼일없는 노인들이 별볼일없는 자기 아내가 암으로 죽었다고 끼적거린 얄팍한 회상록들은 도대체 참을 수가 없더군요. 제아무리 잘 쓴 글이라고 출판사 영업사원이 얘기해도. 제아무리 어버이날에 무진장 팔릴 거라고 장담해도.”
에이제이의 취향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도 그만큼이나 까다로운 나만의 기준이 있기에 이렇게 주절주절 말을 길게 늘어놓는 데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따뜻한’, ‘우리네’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말로 포장하지만 사실 별 내용 없고 작위적으로 눈물을 짜내려고 하는 ‘감동’ 소설은 싫고, 사진 작가나 어떤 인물의 삶을 다루는 논픽션도 아닌데 괜히 사진만 많고 내용은 없는 에세이도 딱 질색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서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이 영양가 없고 괜히 예쁘게만 들리는 말로 페이지를 채운 책은 제발 이제 그만 만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무엇보다, 여성을 같은 인간이 아니라 무언가의 상징이나 도구처럼 그리는 책은 논픽션이고 픽션이고 사절이다. 책 마지막에 어밀리아는 이 서점에 대해 “주인 내외는 자신들이 팔지 못할 것은 들여놓지 않음.”이라고 평하는데(이 말을 쓸 시점에는 에이제이와 어밀리아에 대한 평가가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서점을 그렇게 운영했다가는 쫄딱 망할 것이다. 안 들여놓을 책이 엄청 많을 테니까…
하나만 더.
“소설을 읽을 때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느슨한 결말이야.” 더그 리프먼 부소장은 그렇게 말하며 램비에이스가 준비한 오르되브르 중에서 미니 키쉬 네 개를 골라 담고 있었다. 십수 년간 ‘대장의 선택 북클럽’을 주최해온 끝에 램비에이스는 북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것, 대화를 나눌 선정 도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음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암요, 북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음식이죠!
이 외에 에이제이가 마야에게 점점 스며들어 가는데 아기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헤매는 모습이 특히 웃기고 귀여웠다. 마지막은 쪼오끔 눈물도 날 정도로 감동적… 아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앞에는 웃기고 뒤에는 슬프고 감동적이며 눈물을 짜내려는’ 책을 읽다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책이란 기본적으로 종이에다가 검은 잉크를 찍어낸 것뿐인데, 그게 어떻게 나를 웃게 하고 울리게 하는지, 그 힘을 나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가브리엘 제빈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리가 없는데! 좋아하는 책이 있다는 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다는 뜻이고 그건 그 작가가 글쓰기를 멈출 때까지 나도 죽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써 주세요 작가님… 여러분이 어떤 순서로 가브리엘 제빈의 소설들을 접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국내에 번역되어 유통되는 이 작가의 소설들, 그러니까 이 <섬에 있는 서점>, <비바, 제인>, 그리고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모두 강력 추천한다! (<마가렛타운>과 <다른 세상에 오신 것은>은 옛날에 나와서 현재 품절 상태다. 이 책들을 구해서 읽으실 수 있다면… 참으로 부럽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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