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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유권조, <연중무휴 던전: 던전의 12가지 모습>

by Jaime Chung 202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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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유권조, <연중무휴 던전: 던전의 12가지 모습>

 

 

던전을 주제로 한 소품 12편을 모은 소품집. 단편소설보다 더 짧아서 앞뒤로 ‘들어가기’와 ‘나오기’에 해당하는 글까지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기준 153쪽밖에 안 된다.

 

이 책은 이세계에서 쓰인 <작자 미상의 기록물들을 통해 살펴본 지극히 단편적인 던전업 종사자들의 삶과 선후 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사건들>이라는, 사사메토 쿤탄(이라는 가상 작가)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했다는 설정이다. 기가 막힌 판타지 세상 ‘차모니아 대륙’의 문학을 독일어로 옮겼다는 설정의, 독일 작가 발터 뫼어스의 ‘차모니아 시리즈’가 떠오르지 않는가(혹시 이 소설 시리즈를 모르신다면 한번 검색해서 살펴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나는 이걸 어릴 때, 블로그를 시작하기 훨씬 전에 읽어서 보여 드릴 리뷰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판타지 문학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 보셔야 한다!).

 

이 책을 거기에 대기엔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나쁘지 않은 소품집이다. RPG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던전’, 즉 몬스터들이 있고 최종 보스가 있으며 무언가 보상이 주어지는 그 장소를 주제로 삼아 소품 12편을 쓴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 그리고 소소하게 재미있다. 저자가 한국인이라 한국인스러운 상상력이 곳곳에서 돋보이는데 예컨대 이런 거다. <지하 1층: 고장 난 고기방패의 고민>에서 선배 스켈레톤은 좀비-스켈레톤-죽음의 기사로 이어지는 승진의 트랙을 빠르게 돌려면 지금 자리에 안주하지 말라며, 후배 좀비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멍하니 지금 자리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자칫 용사를 선배나 상사로 모실 수도 있어.”
“에이, 그게 뭐예요?”
“너 특채로 들어오는 스켈레톤이나 죽음의 기사 본 적 없어?”
“없는데요.”
“경력이 짧으니까 못 봤겠지. 당장 우리 던전에도 인간이었다가 곧장 스켈레톤이나 죽음의 기사가 된 경우가 있어.”
“아까는 누구나 좀비 경험이 있는 것처럼 얘기했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아무튼 모험가 중에 무덤에 묻혔다가 실력을 인정받아서 곧장 스켈레톤이 되는 경우가 있어. 용사라고 불렸거나 그 동료였던 경우에는 바로 죽음의 기사가 되기도 하지.”
스켈레톤이 또 한숨을 쉬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까 네가 10년 동안 좀비로 던전에서 살 썩도록 싸웠는데, 이제 막 모험가가 된 녀석이 여기서 죽고 몇 주 뒤에는 스켈레톤으로 나타나서 네 상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에이, 그런 일이 있으면 또 얼마나 있겠어요?”
“적지 않아. 이게 그냥 내 동기나 후배가 빨리 승진하는 거랑은 기분이 또 다르다니까? 이야, 나는 급료 이만큼 받아가면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데 출신이 모험가고 용사면 던전에서도 바로 승진한다 이거야. 이건 너도 들었을걸. 저기 동쪽 어디 던전에는 용사 출신이 마왕도 달았다더라.”
“흐음.”
“어때, 좀 진지한 생각이 들어? 우리 같은 출신은 결국 다 돈이야, 돈. 마왕이 될 것도 아니고 모험가가 될 것도 아닌데 돈이라도 있어야지. 맨날 모험가들 와서 네 항아리 깨고, 침대 부수고 가지?”
“뭐, 그렇죠.”
“전리품 좀 얻어 보겠다고 모험가들이 네 생필품 다 깨부수는데 그거 다시 사는 데에만 급료를 거의 다 쓰잖아. 그런데 스켈레톤이 되면 파괴 방지 마법을 걸어 놓은 가구도 살 수 있어.”
“그래요?”
“그렇다니까.”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도 던전에서 일하고 급료를 받는, 승진을 위해 ‘노오력’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구나… 아아…

 

이런 예는 또 어떤가. 이번에는 <지하 2층: 마왕 공개 경쟁 채용>이다. 던전의 보스, 즉 ‘경영자(!)’인 마왕을 뽑기 위한 시험이 있고 면접이 있는데, 그 면접에 참가한 인큐버스(인간 여성의 정기를 빼앗아먹는다는 남성 형태의 몽마)가 면접관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참고로 아래에 나오는 우두, 좌두 등은 케르베로스(머리가 세 개 달린 지옥의 개)의 각각 오른쪽, 왼쪽 머리를 가리킨다.

“아, 맞다. 맞다. 그거 들어야 되는데. 깜빡했네. 자기소개 준비한 거 있어요?”
“네, 네! 있습니다!”
“그거는 들어 봅시다. 1분? 1분이면 되나? 그 안에 할 수 있죠?”
“네,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해요, 해요.” 좌두 면접관이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인큐버스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 일어나서 할 것까지는 없으니까 앉아서 해요.”
우두 면접관이 살살 웃으면서 말했다. 인큐버스는 머쓱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는 갖은 욕지거리를 쏟았다.
“시작하겠습니다.”
“네에.”
“안녕하십니까. 내일의 마왕, 수험번호 340번입니다! 저는, 저는 누구보다 용사를 이해하는 마왕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몬스터처럼 강력한 신체 능력과 마법 능력은 없지만, 대신 어려서부터 용사의 이야기를 접하며 자랐고 덕분에 적의 입장에서 던전을 구성하고 운영, 아니 통치…… 그러니까 경, 경영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인큐버스의 말이 끊어졌다. 누군가 말을 자른 건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말이 잘 떠오르지 않은 때문이었다.
“다 했어요?”
“아, 아닙니다. 그, 그러니까 지금은.”
또 한바탕 인큐버스는 마음으로 욕을 쏟아 냈다.
“지금은 작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경험을 쌓아 드래곤보다 두려운 마왕이 되겠습니다! 이, 이상입니다.”
말을 마친 인큐버스가 고개가 살짝 떨구었다. 본래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용사 이야기를 많이 봤어요?”
“네,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용사를 좋아해서 본 건 아닙니다.”
“뭐, 그렇겠죠. 저기,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우두 면접관이 입에 문 펜으로 책상을 툭툭 치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 울렸다. 그가 펜을 퉤 뱉고 말했다.
“요즘에는 수험생들이 더 잘 알더라고. 면접이 당락에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은 거 알죠?”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준비했습니다.”

1분 자기소개를 시키는 거나, 그걸 하다가 머리가 하얘지는 거, 면접자가 실수한 데에서 꼬투리 잡는 것까지 K-면접스럽지 않은 게 없다 ㅋㅋㅋ 판타지 소설 읽다가 PTSD 온다고요…

 

다음은 <지하 5층: 던전수석의 속사정>인데, 그러니까 인간계 임금 밑에서, 던전 경영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던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설정이다.

던전은 크나 작으나 인간계 임금 입장에서는 주된 관심사여서 제각기 왕궁에는 던전에 관한 업무를 보는 직책이 있다. 흔히 그 장관 격을 던전수석이라 부른다. 그들은 던전을 경영하는 몬스터의 동향 따위를 조사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도 한다.

이건 일련의 사정으로 전임자에게서 인수인계를 받지 못하고 던전수석 일을 이어받게 된 신입 던전수석에게 접근하는 마왕 이야기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느 ‘편’인지는 무관하게 다 아는 사이이고 필요하다면 이득도 주고받는 그런 관계라는 게… 우리나라만이 아닌 판타지 이세계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니.

 

RPG에 가까운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면, 그리고 가볍게 읽을 거리를 찾는다면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이북 대여로 하면 심지어 3,450원밖에 안 한다! 이제 막 독서를 좀 시작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판타지 소설도 괜찮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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