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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by Jaime Chung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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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개가 필요 없는 고전을 드디어 다 읽었다! 일주일에 기본적으로 5일을 읽되, 빼먹은 날이 있으면 주말에 벌충하는 식으로 3개월에 걸쳐 다 읽으려고 계획했으나, 총 24일 만에 다 읽었다. 상 권은 10일, 중 권은 7일, 하 권은 7일, 평균 한 권당 8일이 걸려 끝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비안 리가 스칼렛으로, 클라크 게이블이 레트 버틀러로 분한 영화 <Gone With the Wind(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덕분에 이 원작 소설도 잘 알려져 있다. 솔직히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까지 나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남부의 때 지난 영광을 추억하는 작품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읽고 나니 그 이상이라는 걸 알았다.

 

솔직히 원작/영화가 나온 지 80년이 넘었기에 지금 이 작품의 줄거리를 말한다고 해서 스포일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Troy(트로이)>(2004)나 <Anna Karenina(안나 카레니나)>(2012), <Pride and Prejudice(오만과 편견)>(2005) 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누가 누구랑 이어지는지 등의 이야기를 한다고 스포일러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이 소설은 아무래도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고, 솔직히 읽으려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줄거리를 좀 이야기한다고 해도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정말로 이야기가 방대해서 줄거리를 하나하나 설명하기는 불가능하고, 큰 뼈대만 언급하게 될 것 같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큰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자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면 단연코 주인공 스칼렛일 것이다. 이 책은 스칼렛이 열여섯, 타라의 농장에서 세상물정 모르고 그저 ‘남미새’(이 말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이던 아가씨였던 시절부터 시작해 미국 남북 전쟁을 지나 두 번의 결혼 후, 언제나 자기 곁에 있었지만 자신이,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줄 몰랐던 레트 버틀러와의 결혼 생활을 하고, 그와 이별하는 스물여덟 살까지, 총 12년의 세월을 다룬다. 스칼렛은 애슐리 윌크스라는 금발 남자, 예술적이고 조용한 남자를 이상적인 남자로 여기고 거의 평생을 그를 사랑하는데, 그는 자기처럼 조용하지만 (그와는 달리) 내면이 강인한 멜라니 해밀턴이라는 여자와 결혼한다. 스칼렛은 여기에 욱해서 거의 충동적으로, 애슐리 보란듯이 찰스 해밀턴이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찰스는 결혼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 전쟁에서 사망하고, 스칼렛에게 아들 웨이드만을 남긴다. 스칼렛은 남북 전쟁으로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프랭크라는 남자와 결혼하는데, 이 프랭크로 말할 것 같으면 스칼렛의 동생 수엘렌이 결혼하려던 남자다. 어쨌거나 스칼렛은 프랭크를 잡아서 그 남자에게 돈을 받아 타라 농장을 살리고(세금을 못 내면 농장을 빼앗길 판이었다), 목재소를 사서 직접 운영한다. 어찌저찌 하다가 이 남편도 (엘라라는 딸을 남기고) 죽고, 언제나 스칼렛의 주위를 맴돌면서 스칼렛을 놀려먹던 레트 버틀러가 결혼을 제안한다. 먹고살아야 하기도 하고 늘 자기에게 짓궃게 구는 레트를 어떻게든 이겨 보고 싶기도 한 마음에 스칼렛은 그와 결혼하는데, 오랫동안 스칼렛뿐 아니라 동네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던 멜라니가 죽고 나서야 스칼렛은 자신이 레트를 사랑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레트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은 후. 저 유명한 “우리 귀여운 아가씨,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란 말씀이야(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영화 버전은 “내 사랑, 솔직히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오.”)”이라는 대사를 날리고 떠난다. 스칼렛은 좌절하지만, 그보다 더욱더 유명한 대사, “어쨌든 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 아닌가(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영화 버전은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뜰 테니”).”라는 대사를 날리며 내일 일은 내일, 타라 농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기로 하며 이 기나긴 작품을 끝맺는다.

이 소설에서 느낀 점을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멜라니는 천사다.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멜라니가 단순하고 일차원적으로 선하기만 한 인물이라며 깊이가 없다고 비판하는데, 나는 착한 인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악이라는 걸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어서 악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독해질 수 있는지, 그것조차 모르는 완전한 선. 스칼렛이 남미새 짓 하면서 자기 남편 애슐리를 노려도 멜라니는 그저 스칼렛이 진심으로 자기 또는 애슐리를 도와줬다고 믿는다. 나중에는 남미새 중 남미새인 스칼렛도 멜라니가 진짜 착한 사람이라는 걸, 다른 여자들과 달리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준 존재라는 걸 인정할 정도다. 어쩜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이 착하지. 멜라니를 보면서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키티가 독일 스파에서 만나는 바렌카를 떠올렸다. 바렌카도 성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보니. 나는 내 성격을 알기에, 실존 인물이든 허구든 성녀를 참 좋아한다(나약하고 소심해서 아무에게나 맞춰 주고 말도 안 되는 정의를 부르짖는 거 말고, 진짜로 누구나 존경할 만한, 성정이 선하고 따뜻한 성녀 말이다). 그래서 멜라니가 참 좋았다. 이런 인물은 허구라도 좋으니 좀 자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하고 영감을 주는 게 독자들 인격 형성 및 수양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캐릭터는 여자는 멜라니, 남자는 레트다.

 

레트는 이 작품이 쓰인, 그리고 영화화된 당시에도 인기가 많았겠지만, 오늘날 더 인기가 폭발할 캐릭터 같다. 스칼렛의 유일한 맞수라고 할 수 있는데, 둘이 주고받는 대화(요즘 말로 ‘티키타카’)가 진짜 기가 막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 상황 설명을 잠시 하자면, 스칼렛이 애슐리에게 사랑 고백을 했는데, 애슐리가 떠난 후 레트 버틀러가 이것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칼렛이 화를 내는 장면이다.

이 무례하고 건방진 남자가 얘기를 들었다니 ─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말하지 않았더라면 좋겠다고 간절히도 바라던 얘기를 다 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그녀는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의 얘기나 몰래 엿듣고 ─.」 그녀는 화를 내며 말을 꺼내려 했다.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들으면 아주 흥미진진하고 아는 게 많아져요.」 그는 히죽 웃었다.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들은 오랜 경험에 의해 나는 ─」
「이봐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신사가 아니에요!」
「잘 보셨습니다.」 그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은, 아가씨, 전혀 숙녀답지 못하죠.」 그는 스칼렛을 아주 재미있는 여자라고 여기는 듯 또다시 작은 소리로 웃었다. 「조금 아까 내가 엿들은 말과 행동을 하고 난 다음이라면, 어느 누구도 절대로 숙녀가 되긴 어려워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숙녀들이란 매력이 별로 없더구먼요. 난 숙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환히 알지만, 전혀 용기가 없는지 가정 교육을 못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생각하는 바를 통 솔직하게 얘기하질 않아요. 그리고 그런 여자는 시간이 갈수록 따분해집니다. 하지만 당신은, 친애하는 오하라 아가씨, 아주 감탄할 정도로 보기 드물게 활기가 넘치는 여자이고, 나는 그래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처럼 격렬한 기질의 여자가 고상한 윌크스 씨한테서 어떤 매력을 느끼는지 난 납득이 가지를 않는군요. 그 사람은 당신처럼 ─ 그 친구가 뭐라고 표현했더라? ─ 〈삶에 대한 정열〉을 지닌 당신 같은 여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무릎 꿇고 하느님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지만, 그 맥 빠지고 한심한 친구는 ─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들으면 아주 흥미진진하고 아는 게 많아져요.”라든가, “당신은 신사가 아니에요!”라는 비난에 “잘 보셨습니다.”라고 차분하게 대꾸하는 게 진짜 너무 웃겼다. 이렇게 레트는 스칼렛이 절대 굴복시킬 수 없는 남자인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나이 차이가 있어서 더욱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성격 면으로 보면 둘은 분명 다르지만 진짜 제일 잘 맞는데, 레트가 나이가 많으니까 (17살 차이) 스칼렛이 뭐라 하든 열이 잔뜩 뻗친 애송이가 하는 말처럼 들릴 거고, 그러니까 더 타격감 없이 쿨하게 나쁜 남자처럼 대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자가 팝콘을 먹으며 관람하게 되는 둘의 싸움을 한 군데 더 보시라.


「난 멜라니보다 훨씬 더 예뻐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이 멜라니한테 더 잘해 주시는지를 난 모르겠어요.」
「당신이 질투를 하는 모양이라고 내가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잘난 체하지 말아요!」
「또 하나의 희망이 무너졌군요. 만일 내가 윌크스 부인에게 〈더 잘해 준다〉면, 그건 그녀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아주 보기 드문 여자여서, 남을 아낄 줄 아는 그런 진실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어쩌면 당신은 이러한 자질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토록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내가 사귀는 영광을 누렸던 몇 명 안 되는 훌륭한 숙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에요.」
「그럼 나는 훌륭한 숙녀가 못 된다 그런 얘긴가요?」
「우린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전혀 숙녀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동의를 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당신은 또 그 얘기를 꺼낼 정도로 무례하고도 밉살스러운 남자의 본색을 드러내는군요! 어린애처럼 어쩌다 한 번 성미를 부린 그런 일을 가지고 어째서 당신은 날 헐뜯으려고 그러시죠? 그건 오래전 일이고, 그 후 난 많이 성숙했고, 만일 당신이 자꾸만 입에 올리며 허튼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더라면 난 깨끗하게 잊어버렸을 사건이에요.」
「난 그것이 어린애처럼 한 번 성미를 부린 경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당신이 달라졌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무슨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때 못지않게 지금도 꽃병을 집어 던질 소질이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당신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골동품을 깨뜨릴 필요도 없고요.」
「아, 당신은 ─ 내가 남자였다면 좋겠어요! 내가 당신을 밖으로 불러내서 ─」
「그리고 분풀이를 하려다 목숨이나 잃겠죠. 나는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동전에 구멍을 뚫어 놓을 정도의 실력이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보조개나 꽃병 따위, 당신에게 알맞은 무기에 의존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당신은 악당이에요.」
「그런 소리에 내가 화라도 낼 줄 알아요?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군요. 당신이 정말로 나쁜 면을 물고 늘어져 내 욕을 아무리 해봤자 난 화를 내지 않아요. 나는 분명히 악당인데, 그래서 나쁠 게 뭔가요? 여기는 자유로운 나라니까, 원한다면 악당이 되어도 상관없어요. 옳은 소리를 듣고도 욕을 먹었다고 화를 내는 사람은, 우리 친애하는 아가씨, 마음이 시커먼데도 그것을 감추려고 애쓰는 당신 같은 위선자들뿐이죠.」

스칼렛이 ‘내가 남자였으면 너랑 결투했을 거다’라고 하니까 ‘그러다 넌 죽음ㅇㅇ’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난 특히 “당신은 악당이에요.”라는 스칼렛의 말에 화도 안 내고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다고 받아치는 게 좋다. 티키타카가 이렇게 잘되는데 스칼렛은 왜 자기의 유일한 맞수가 레트라는 걸, 자기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레트라는 걸 멜라니가 죽기 직전에 알려 줄 때까지 몰랐을까?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자기의 짝이 누구인지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고 참 복 받은 일이다.

 

이렇게만 보면 레트는 나쁜 남자 같은데 은근히 속 깊고 다정한 면도 있다. 멜라니를 (위 인용문에서 인정했듯이) 훌륭한 숙녀라고 여기며 존경하고, 스칼렛의 유모인 흑인 노예 ‘어멈’에게는 최고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든지 하는 것. 또한 스칼렛이 가진 목재소를 애슐리에게 아주 팔아넘기게 설득하면서(그래서 애슐리가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 멜라니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심지어 스칼렛과 결혼해서 딸 보니를 얻게 되자, 소위 ‘딸 바보’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스칼렛의 다른 아이들, 웨이드와 엘라를 차별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웨이드에게는 이 양아들이 자기를 존경할 수 있도록 자기가 남북 전쟁 때 포병대로 참전했다는 이야기도 해 주고 평소에도 잘 놀아준다. 엘라도 자기 딸인 것처럼 잘 대하는데 ‘나쁜 남자’ 같으면서도 나에게, 그리고 내 자식들에게 따뜻한 이런 남자라니! 진짜 요즘 이런 남자가 있었으면, 실존 인물이든 허구든 인기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유일한 흠이라면 스칼렛에 비해 나이가 좀 (많이!) 많다는 것인데, 자기 또래 여자를 만났다면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을 것이다. 요즘 이렇게까지 매력적인 캐릭터는 찾기 힘들어서, 레트 버틀러 같은 캐릭터를 소설이든 영화든, 어디에서든 보고 싶다. 실존 인물이라면 더 좋겠지…

 

이 소설에서 교훈을 하나 꼽는다면, 자기와 어울리는 상대, 자기를 사랑해 주고 또 자신도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알아보고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도 참으로 복이라는 것이다. 스칼렛은 책 거의 내내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 애슐리가 아주 멋있는, 자기 꿈속의 이상적인 남자라고 생각하며 그를 사랑한다.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애슐리가 자기는 멜라니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운 여자와 어울린다는 걸 알면서도 스칼렛에게 끌림을 느끼는데, 그렇다고 뭐 초반에 ‘당장 여기를 떠나 야반도주합시다!’ 이럴 정도로 격하게 열정을 가진 것도 아니고(나중에 그가 그런 제안을 할 땐 스칼렛이 거절하긴 한다), 그저 온실의 화초처럼 아주 나약한 남자라 변해가는 환경, 즉 남북 전쟁에서 남쪽이 패배하고 이제 남부 ‘귀족’들도 일을 하고 실리를 찾으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애슐리 윌크스가 내가 보기엔 제일 못난 남자다. 스칼렛의 두 번째 남편 프랭크에겐 애초에 그만한 기대도 없어서 실망할 것도 크지 않은데, 애슐리는 멋있는 남자처럼 보이는데 내면이 유약해서 아주 빛 좋은 개살구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애슐리는 거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나오는 블랜치 느낌으로, 빛바랜 남부의 영광에 매달려 살아가는 느낌.

애슐리 욕을 많이 했는데,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어쨌든 스칼렛과 어울리는 상대는 누가 봐도 레트다. 이름부터가 어울리잖아! ‘스칼렛’은 진홍색이라는 뜻이고 ‘레트’라는 이름은 ‘빨강(red)’을 연상시키니 회색을 연상시키는 ‘애슐리(Ashley)’보다 훨씬 동류라 할 수 있지 않나. 스칼렛과 레트가 주고받는 핑퐁 같은 대화가 이 소설의 큰 재미를 차지하는데, 스칼렛은 그것도 모르나? 자기 말에 겁먹지 않고 차분히 대꾸하며 스칼렛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레트잖아! 스칼렛이 애슐리라는 ‘이상적인 남자’의 꿈에 빠져 있어서 자기와 어울리는 대상이 자기 코앞에서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레트의 마음이 식을 때까지 자기 마음도 깨닫지 못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에게 좋은, 그러니까 자기에게 어울리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상대가 늘 동일 인물인 것은 아닌데. 스칼렛은 착각만 하다가 자기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을 놓친 셈이 되었다. 이래서 내가 종종 연애 조언을 할 때 자기 취향을 믿지 말라고 하는 거다. 예를 들어 어떤 케이스에서 여자 본인은 고집도 있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자기를 휘어잡아 줄, 카리스마 있고 의지가 될 만한 남자를 만나려고 한다. 이러면 대체로 물과 기름처럼 자연스럽게 섞이질 못한다. 오히려 자기에게 져 주고, 자아가 없는 것 같은 순둥한 남자를 만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고 행복할 텐데. …당사자성 발언이다. 그때 나는 자기 인식이 잘 안 됐다. 스칼렛도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알면 자기와 어울리는 상대를 알아볼 수가 있고 그게 길게 이어지는 좋은 인간관계의 지름길이거늘…

 

물론 이 소설에서 무시하고 넘어가기에 너무나 뻔하게 드러나는 단점도 있다. 너무나 명백해서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인종 차별과 남부의 미화가 그것이다. 남부 사람들은 흑인 노예들과 오래 지내와서 그들이 어떤지 아는데, 북부 사람들은 ‘해방 노예는 믿을 수 없으니 내 아이들을 돌보는 유모 따위로 고용하지 않겠다’라는 극단적으로 차별적인 모습을 보인다. 스칼렛은 이 북부인의 말에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분노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남부의 노예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요… 해방된 흑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쩔 줄 모르고 난폭하게 군다거나, 다시 노예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심각한 인종차별이다. 심지어 극 중에서는 KKK단도 등장하는데, 애슐리와 (스칼렛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프랭크도 KKK단의 일원이었다(그나마 다행인 건 레트 버틀러는 아니었다는 거). 진짜 인종 차별이라는 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는 거냐고 좋게 해석해 줄 의지도 없고 진짜 100% 미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칼렛과 레트라는 캐릭터는 매력적이고, 이 책은 여전히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종차별적인 단점이 이 시대에는 더 이상 흐린 눈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고전의 지위에서 내리자는 의견도 있다. 그 의견도 나는 딱히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칼렛이 열여섯 소녀에서 시작해 세상 물정을 배우고, 결혼도 총 세 번이나 하며, 사업도 직접 하는 스물여덟의 여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흥미가 있다면, 혹은 레트 버틀러라는 멋진 나쁜 남자의 매력에도 한번 빠져 보고 싶다면 3권, 총 1,500쪽에 넘는 분량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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