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조예은 외 4인,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인격장애’를 주제로 한 테마 단편집. 조예은 작가의 <아메이니아스의 칼>, 임선우 작가의 <지상의 밤>, 리단 작가의 <레지던시>, 정지음 작가의 <안뜰에 봄>, 그리고 전건우 작가의 <없는 사람>, 이렇게 다섯 편이 담겼다.
첫 작품, <아메이니아스의 칼>부터 말하자면, 조예은 작가는 이름은 많이 들어 봤는데 실제 작품을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쪽은 희생하고 다른 한쪽은 (희생하지 않는 대신) 언니에게 충성하는 언니-동생의 관계를 그렸는데, 썩 괜찮았다. 단편집을 여는 작품으로서 괜찮았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자매는 각각 외현적 자기애와 내현적 자기애를 가진 것으로 그리려고 했다고.
임선우 작가의 <지상의 밤>은 사회에 복귀하는 게 두려워진 한 사람이 해파리가 되어 바다로 도망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회피형 인간을 그린 것인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들지만 나쁘지 않았다. 회피성 인간치고 회피하는 결말이 아닌 것이 마음에 든다(회피성 인간 짜증 나!).
리단 작가의 <레지던시>가 가장 읽기 힘들었다. 글을 못 썼다거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읽는 내내 심적으로 힘들었다. 자해를 하는 경계선 인격장애 인물이 주인공인데, 그걸 어찌나 잘 표현했는지 진짜 내가 다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글 속 주인공을 반드시 작가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도대체 이런 건 어떻게 잘 아시는 거예요 작가님… 진짜로 경계선 인격장애인 사람을 직접 접하는 느낌이 들어서 읽기 괴로웠다. 지인으로라도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유형…
정지음 작가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다. 첫 작품 <젊은 ADHD의 슬픔>부터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첫 장편소설 <언러키 스타트업>,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오색 찬란 실패담>까지 다 섭렵했다. 이 단편 <안뜰에 봄>은 진지하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곳곳에 정지음 작가 특유의 기발한 표현이 숨어 있다. 내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큰엄마네 집에 얹혀살며 자신의 친척 여자애의 하녀처럼 취급받던 한 여자아이가 나름대로 행복해지는 이야기라고 할까?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대충 이 정도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게 안전할 듯. 나름대로 예측 가능한 반전이 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마지막은 전건우 작가의 <없는 사람>인데, 이 단편집을 홍보하는 카드 뉴스 형태의 트레일러에도 이 작품이 소개되었다. 아무래도 제일 극적인 내용이라서 줄거리를 소개하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딱이어서 그런 듯.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이라는 단편집의 제목과도 제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그 줄거리는 이렇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한 작가의 수업에 기가 막히게 글을 잘 쓰는 L이라는 수강생이 있다. 작가는 한동안 글을 못 썼고, 그래서 그 수강생의 재능을 질투한다. 그러다가 문득, 그 천재 수강생이 쓰는 살인마에 대한 소설이 왠지 실제로 일어나는 연쇄살인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아차리는데… 다 읽고 나면 약간 뻔한 추리물 같기도 하고, 비슷한 유형의 반전 소설들이 몇 편 주루룩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흡인력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단연코 이 단편집에서 으뜸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두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책 초반 편집자는 “작가별 원고의 특성을 가능한 한 그대로 살려 편집”했고, “맞춤법은 국립국어원의 원칙을 따랐으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한 일부 표현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정지음 작가의 <안뜰에 봄>에 나오는 것처럼 ‘존나’라든가 ‘시팔’ 같은 표현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굳이 고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런 점은 나도 이해할 수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게 곧 ‘할 지’(시간의 흐름을 말하는 게 아니므로, ‘할지’라고 적는 게 맞는다)라든가 ‘아무 것’(’아무것’은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처럼 맞춤법이 틀린 것까지 그냥 놔두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드믈다’는 ‘드물다’의 오타인지, 아니면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그냥 놔둔 것인지 모르겠다(당연히 전자겠지). ‘대체로, 일반적인 경우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대개’라고 써야 할 것을 ‘대게’라고 쓰고 놔둔 것도 ‘작가의 의도’라고 말할 건가? 내가 글을 읽으면서 잡아낸 이런 사례만 총 여섯 건이다. 교정교열에 신경 써 주시길.
다른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것이다. 아무래도 극적인 이야기의 재미, 즐거움을 위해서라지만 사이코패스라든가 소시오패스라는 인격 장애를 깊은 사유 없이, 또는 뚜렷한 문제의식 없이 소재로 이용해도 괜찮은가? 이것은 꼭 이 단편집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요즘 영화라든지 소설 등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듯하다. 사이코/소시오패스는 전체 인구의 4%에 해당한다고 하던데, 4%면 대체로 인구의 4-5% 정도 된다고 하는 성소수자들(동성애자나 양성애자에 한함)과 비슷한 수준이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등이 이 세상 범죄를 몽땅 몰아서 저지르는 것처럼 그리는 현대의 미디어는, 그렇다면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모든 러브 스토리를 채우고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어째서인가, 인구 비율이 그 정도로 비슷한데. 지금쯤 동성애자/양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넘쳐나서 지겨울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지. 인구의 나머지 96%도 (당연히) 범죄를 저지르고, 또한 모든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반드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깊은 사유 후에, 시대에 맞는 적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창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전반적인 평을 내리자면, 이 단편집은 독자로서 가볍게, 잠시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며 책을 읽고 넘기기엔 나쁘지 않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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