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에두아르도 멘도사, <구르브 연락 없다>

by Jaime Chung 2025. 4. 25.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에두아르도 멘도사, <구르브 연락 없다>

 

 

드디어 읽었다, 민음사TV 세계문학전집 월드컵에서 자주 언급되던 그 작품을! 과연 웃겼다. 200쪽이 조금 안 되는 가벼운 책인데 내용도 유쾌하니 기분 전환용으로 딱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자면, 지구를 탐사하러 온 외계인 중 한 명인 구르브. 구르브는 지구인(착륙한 곳이 바르셀로나이므로 바르셀로나인)인 척하며 우주선 밖으로 나가 원주민과 접촉을 가진다. 그 원주민은 구르브에게 자동차에 탈 것을 제안하고, 구르브의 상사인 외계인은 ‘원주민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지체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이후로 구르브와의 연락이 끊긴다! 그래서 이 외계인 상사는 구르브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는데…

 

제목으로 쓰인 ‘구르브 연락 없다’를 반복하는 이 외계인이 주인공인데, 하는 짓이 퍽이나 귀엽다. 지구인들을 흉내 내려고 애를 쓰는데 많이 모자란 그의 행동이 웃음을 유발한다. 구르브를 찾아나서기로 한 첫날, 그는 길거리를 가다가 차에 치인다.

08:00 나는 디아고날 대로와 파세오 데 그라시아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본래의 나로 변신한다. 실수다. 나는 곧바로 바르셀로네타와 발 데브론 사이를 운행하는 17번 노선버스에 치이고, 그 충격으로 내 몸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이어지는 차량 행렬 때문에 도로에 나뒹구는 머리를 수습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08:01 나는 노선버스에 이어 오펠 코르사에 치인다.

08:02 오펠 코르사에 이어 배달용 승합차에 치인다.

08:03 배달용 승합차에 이어 택시에 치인다.

08:04 나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분수대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씻는다. 덕분에 분수대의 물을 분석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주요 성분은 수소와 산소, 나머지 대부분은 똥이다.

심지어 1분 간격으로 치였다. 구르브 찾으러 나가자마자 이런 수난이…

 

같은 날 오후 2시 경, 그는 길을 걷다가 너무 힘들어져서 “왼다리를 뒤쪽으로, 오른다리를 앞으로 꺾은 채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이 꼴을 본,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5페세타(1869년부터 2002년까지 통용된 스페인의 통화 단위. 1페세타는 한화로 약 10원이니까 즉 50원…)짜리 동전을 건네준다. 이 외계인은 “행인들이 불손하다고 비난할까 봐서 동전을 꿀꺽 삼킨다.” 아니, 동전을 삼키면 안 되지!

 

같은 날 3시경, 이 외계인은 한곳을 지키기보다는 직접 돌아다니면서 구르브를 찾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다.

15:00 나는 한곳만 지키겠다는 생각을 단념한다. 차라리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찾는 게 나을 성싶다. 그런다고 구르브를 못 만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겠지만,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불투명하니 어쩔 수 없다. 나는 비행선을 나올 때 내 몸에 합체했던 청사진 지도의 안내를 받으며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나 보다. 나는 카탈루냐 가스 회사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2 이번에는 카탈루냐 전력 회사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3 이번에는 바르셀로나 상수도국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4 이번에는 국립 전화국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5 이번에는 코르세가 거리에 있는, 친선 협회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도랑에 그만 빠져, 이 바보야!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역시 바르셀로나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겠다. 역자가 각주를 아주 풍부하게 잘 달아 주었는데, 대부분이 스페인의 음식이나 유명인 같은 문화에 기반한 것들이다. 그래서 스페인, 특히 바르셀로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와, 저 맛집에 가보고 싶다’, ‘이런 명소가 여기에 언급되네! 나도 한번 구경하고 싶다!’처럼,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게 외계인들에게 제일 부러운 거였는데, 구르브의 상사인 외계인은 요리를 아예 포기하고 그냥 매일 바르(형태와 종류가 다양한,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에스파냐식 소규모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서 뭘 사 먹는다. 참고로 이 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추로(밀가루 반죽을 기다랗게 만들어 기름에 튀긴 에스파냐 전통 도넛)다. 진짜 너무 부러워… 만날 남이 해 주시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다니…! 나도 돈만 있었으면…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읽는 도중 각주가 잘못된 위치에 달려 있는 불상사가 여러 번 발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극 중 10일(상사가 구르브를 찾으러 나서기로 한 첫날)의 마지막을 이 외계인은 이렇게 기록한다.

21:50 나는 파자마를 입는다. 구르브의 부재. 마음이 몹시 무겁다. 구르브와 나는 팔백 년 전부터 밤마다 함께 지낸 사이다. 잠이 들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해진다. TV도, 롤리타 갈락시아*의 연재 소설도 내키지 않는다. 구르브의 부재가, 구르브의 침묵이 이해가 안 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구르브에게 고지식하게 구는 상관이 아니었다. 구르브한테 우주선 관리도 맡겼고, 우주선 출입도(정해진 시간 내에서) 허용하지 않았던가. 구르브가 오늘 중으로 돌아올 것인지, 늦게라도 돌아와 줄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못 오면 못 온다고 통보라도 해 주면 더없이 좋으련만.7)

‘7)’이라고 된 게 7번째 각주를 나타내는 위첨자인데, 쓱 봐도 잘못된 위치에 있다. ‘롤리타 갈락시아’ 뒤에 있는 별표 위치에 이 각주 표시가 붙어 있었어야 했다… 이렇게 각주가 잘못된 곳에 가 있는 게 세 번(7번, 30번, 91번과 92번) 있었고, ‘돈 보다는’이라고 잘못 띄어쓴(’돈보다는’이라고 붙여 써야 한다) 것도 봤다.

 

그래도 이런 사소한 단점만 참아낼 수 있다면, 또는 관대히 눈감아 줄 수 있다면, 이 책은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싶게 만드는 귀여운 외계인들 이야기, 끌리지 않습니까? 소소하게 웃기고, 귀엽고, 머리 쓰지 않는 책이 필요할 때 딱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