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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아은,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by Jaime Chung 2025.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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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아은,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최근 내가 읽은 책 중 이만큼 혼란스러운 책도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1장만 읽었을 때는, 문학에 등장하는 여러 사랑의 형태, 다른 스타일의 연인들을 소개하는 논픽션 에세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책의 진짜 모습은, 어딘가 이상한 사랑 예찬이다. 무슨 말인지 곧장 설명하겠다. 비록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의도를 가졌더라도, 육영수와 이희호 여사를 비교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책 내에서는 계속 육영수 ‘여사’라고 하는데 나는 독재자의 아내를, 비록 아내 본인이 독재를 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올려쳐 주고 싶지 않아서 그냥 육영수라고 하겠다.

육영수 꼭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육영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박근혜라는 신인 정치인이 등장했을 때였다. 박근혜에 대한 내 관심은 러시아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에 대해 사람들이 흥미를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로, 이 시대에는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희귀한 인물을 만날 때 느끼는 신비감을 동반했다. 지나가버린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오기라도 한 듯 비장하고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는 뉴스 화면 속 인물을 뜯어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흥미로운 인물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딸인 박근혜가 쓴 육영수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육영수라는 사람에게 진지하게 접근했고, 그 역사적인 인물이 내뿜는 온화한 분위기와 힘에 빨려들어갔다. 이 사람, 멋있는데? 고리타분하고 답답할 줄 알았는데 안 그렇잖아!

네? 이 리뷰를 쓰면서 혹시나 싶어서 출판 일자를 확인해 봤다. 서지에 따르면 등록이 2021년 5월 28일, 전자책 발행은 2022년 8월 8일이다. 박근혜가 탄핵된 게 2016년 12월의 일인데? 이 일이 있고 나서도 육영수라는 사람에게 ‘진지하게 접근’하고 그에게서 ‘온화한 분위기와 힘’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못 하겠는데요…

 

아래 인용문은 더더욱 가관이다.

육영수는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집권한 박정희에게 강력한 면죄부로 작용했다. 육영수가 남편의 쿠데타나 독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막연히 권력을 놓고 물러나 필부로 살기를 염원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기는 하나, 적극적으로 남편의 독재를 막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육영수는 남편이 하는 일을 ‘되돌릴 수 없는 일’로 여기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영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마치 그녀의 영혼이 ‘내가 뭐라고 하든 그분은 권력을 잡고 나라를 통치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 권력의 열매가 뜻있게 쓰일 수 있도록 하겠어!’라고 되뇌는 듯하다.

솔직히 내가 육영수라고 하더라도, 내 남편이 독재자 짓을 하려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끔찍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면 나 혼자의 힘으로 상대를 바꿀 수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제정신이 있으니 이혼하고 관계를 손절하며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서 살았을 거다. 그런데 뭐? ‘되돌릴 수 없는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를 힘없는 일개 개인으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건데, 최불암 배우님의 일화를 보면 별로 힘없어 보이지도 않더만. 자기 남편이 (당시 방영된 드라마 <수사반장>를 보고 나면)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최불암 배우에게 전화해 극 중에서 담배를 넉 대가 아니라 두 대만 태우는 것으로 하라고 간섭했단다(관련 기사). 자기 남편이나 단도리할 것이지, 일면식도 없는 배우에게 대뜸 전화를 걸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온화한 분위기와 힘’을 가진 여인이 할 일인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박정희 본인이 그만하라고 말렸을까. 이래도 자기 남편을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었던 여자라고 할 셈인가. 참고로 그 시대는 박정희가 TV 보다가 예쁜 여배우, 눈에 드는 여배우가 있으면 ‘쟤 데려와’ 해서 데리고 놀던 시절이다. 아아, 자기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뭐라고는 못하고 주위 사람들만 잡던 육영수를 위해 남미새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나 보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물의 근원은 사랑, 박정희라는 한 남자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었다. ‘나’라는 여성의 시선에서, 육영수라는 여성은 그렇게 닮고 싶은 롤모델은 아니다. 남편을 ‘그분’이라 칭하고, 그분이 깨어나시길 기다렸다가 따뜻한 세숫물을 대령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냉면을 즉각 해 바칠 수 있도록 언제나 대기 상태로 있는 삶이라니. 나는 단 하루도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나이지만, 육영수라는 역사적 인물을 통해 나보다 타인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이 결국 나를 세우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성에게만 타인을 우선순위로 놓으라고 강요해온 문화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를 ‘여성’에 한정하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로 본다면, 타인에게 헌신하는 삶만큼 의미 있는 삶이 또 있을까. 지극히 전통적인 사랑을 했던 육영수. 그는 그런 사랑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한국 역사상 가장 공적인 개인으로 탄생했고, 동시대인들은 물론 후세들에게도 두고두고 사랑받는 인물로 남았다.

그렇게 닮고 싶은 롤모델은 아닌데도 굳이 이 인물을 골라서 ‘여사’라는 극존칭까지 써 가며 이 책에서 소개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육영수가 봉사 활동을 얼마나 했든, 박정희의 군부 독재와 피비린내 나는 학살 행위가 조금이라도 면죄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후세의 누가 육영수를 사랑하는지…? 일단 내가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아무리 상대를 지극히 사랑했어도 그 결과가 남편의 독재를 용인하는 것이라면 숭고한 사랑도, 희생도 아니고, 그저 정신머리 없는 열병을 앓은 것에 지나지 않다. 자기 배우자의 허물을, 잘못된 점을 보았으면 따끔하게 지적해야지, 그걸 그냥 놔둬? 아무리 사람은 고쳐쓰는 거 아니라지만, 이렇게 아무 노력도 안 하는 것은 그냥 본인이 똑같은 사람이라서, 애초에 그 허물을 못 봤던 것이 분명이다. 우리는 이런 걸 요새 말로 ‘남미새’라고 한답니다. 앞에서 주구장창 말했듯이요.

 

이 책에서 제일 어이 없었던 건 이 부분이다. 박정희-육영수 커플과 김대중-이희호 여사 커플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인용문인데 한번 보시라.

박정희가 한 민족의 가부장이자 한 가정의 가부장으로 제 자리를 굳건히 지켰던 데 반해, 김대중은 생의 많은 기간을, 특히 가정을 꾸리고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중·장년기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가 한 민족과 한 가정의 정신적 가부장이었을지는 모르나, 현실에서는 그 역할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희호는 남편이 감옥에 끌려가 부재한 상황에서 한 가정의 가부장 역할과 사회적 가부장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원래 강인하고 독립적이었던 이희호의 성향이 그 과정에서 더욱 단단하게 벼려졌을 것이다.

박정희가 한 민족의 가부장이요? 엥, 한국인을 학살한 일본인이 어떻게 한민족(韓民族)의 가부장이 될 수가 있지? 생각해 보니까 박정희라는 이름도 오타 같다. 다카키 마사오 씨라고 써야 하는데 오타가 나서 계속 박정희라고 쓴 듯(이 풍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은 이 기사를 참고하시라). 아니 아무리 두 사랑의 형태를 비교하려는 의도라고 하더라도, 육영수와 이희호 여사를 같은 선상에 두고 같은 문단 내에서 언급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의식이 흐려졌다.

 

이 육영수-이희호 여사 꼭지들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서태지와 신해철을 비교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비록 내가 마왕 신해철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음악가의 사생활을 비교하기에는 너무 현대, 동시대 인물이라 아직 평가를 내리기엔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체로 좋은 의도겠거니, 하고 넘어가야지 했더랬다. 서태지가 이지아와 결혼하고 나서 (이혼 소식이 터져 모두가 알게 되기 전까지) 젊은 여성이 견디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자신들과의 결혼 관계를 밝히지 않을 것을 주문한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금기를 넘어선 사랑을 한 대담한 인물로 묘사하는 건 상식이 없는 일이 아닌가?

현대사회의 ‘특권층’이 배우자와 관계 맺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회의 무의식과 조우하는 일이다. 사회의 암묵적 규범과 관습은 범위가 넓어서, 어떤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몇십 년 전에 주를 이루었던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지만, 어떤 곳에서는 ‘전통’이라 불리는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으로 사교를 벌인다. 그러한 스펙트럼에서 대중이 사회의 권력자층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금기시하는지를 추적해나가면 현대사회의 스펙트럼의 넓이와 깊이, 허용되는 평균치와 마지노선을 파악하게 된다. 마크롱은 금기에 정면으로 맞서 자신을 실현한 인물로, 한 시대 통념의 윤곽선을 다시 그렸다.

뭐, 금기를 정면으로 맞섰고 한 시대 통념을 뛰어넘긴 했지…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나도 커플 중에서 여자가 연상이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하게, 또는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여성 혐오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크롱과 그의 아내 브리지트가 욕을 먹는 게 단순히 둘 사이에 25년 차이가 나고, 여자 쪽이 연상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나. 마크롱이 브리지트의 아들의 친구였다는 걸 작가는 몰랐나? 내가 프랑스 정치나 문화는 몰라도 거기에서도 이 일로 마크롱에 대해 쑥덕댄다는 정도는 안다. 자기 친구의 엄마를 미성년자 때부터 짝사랑해서 결국 그 여자가 남편과 이혼하고 결혼한 게 멋있는 사랑 이야기인가? 이걸… 어떻게 보면 로맨스로 볼 수가 있지? 사랑에 미쳐서 모든 것을 로맨스의 눈으로 봐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가장 충격적이고 헷갈리는 점은, 이 책의 저자 정아은 작가는 이 책 출간 이후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이라는, 전두환을 비판하는 책도 썼다는 거다. 최근에 운명을 달리하신 작가는 김명신을 비판한 사회비평서 <K를 보는 여섯 가지 시선>의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고 한다(기사). 저자가 역사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단순히 다양한, (육영수로 보여 주는) 전근대적인 여성상과 그보다 진일보한, (이희호 여사로 보여 주는) 여성상을 대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다른 인물을 고를 수는 없었나? ‘기계적인 중립’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뭐가 잘못됐고 잘한 건지를, 자신의 양심에 따라 구분해서 명확하게 밝혀야 하지 않나? 육영수 같은 인물에게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역사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이 책이 혼란스럽고 불쾌했다. 사랑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더니… 개인적으로 이걸 읽으면 뭔가 어떻게 되는, 또는 하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은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걸 배우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책을 싫어하는데 이게 딱 그거였다.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은 이걸 읽고 배울 수 없어요… 이 작가의 <잠실동 사람들>이 <스카이 캐슬> 뺨치게, 사교육에 집착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잘 보여 주었다는 평이라고 하니, 이 작가의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아마 그 책이지 않을까. 이건… 기계적인 중립 말고 제대로 된, 균형 잡힌 중립의 시선에서 책을 썼다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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