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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by Jaime Chung 202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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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칠레 출신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첫 번째 장편소설. 191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60년간 4세대의 연대기를 다루는 이 작품을 두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에스테반 가르시아, 네가 아랫도리 간수 잘했잖아? 그럼 이런 일 안 생겼어.” (나는 <환승연애>를 보지도 않았고 연애 프로그램에 관심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이 밈만은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만든 등장인물 관계표를 보시라.

 

니베아-클라라-블랑카-알바, 이렇게 4세대의 여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점은, 역시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새끼라는 점이다. 그 얘기를 하려면 일단 소설의 맨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니베아의 딸인 클라라는 영적인 재능이 있어서 미래도 예견하고 영혼도 보는데, 어릴 때 몇 년간 말을 안 하고 지냈을 정도로 기벽이 있는 인물이다(이 기벽이라는 건 이 집안 사람들에게 다 있어서, 이 정도는 놀랍지도 않다). 클라라에게는 천사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 예쁜 언니 로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로사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되자, 로사의 약혼자였던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크게 상심한다. 광산에서 일을 해서 돈은 웬만큼 벌었는데 결혼할 여자가 죽었으니 슬퍼할 만도 하다. 문제는 그가 이 슬픈 마음을 로사네 집에 가서 ‘결혼할 나이대의 딸이 있으면 주십시오’ 하는 걸로 달랬다는 것. 클라라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영적인 재능이 있어서 미래를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가 에스테반 트루에바와 결혼할 걸 알았다. 그래서 사랑은 없지만 미래가 보인 대로 그와 결혼한다(미안하지만 이건 너무 자기 충족적 예언 아닙니까? 네가 결혼하기로 했으니까 둘이 결혼한 미래를 본 게 아니냐고!). 난 이게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새끼스러움을 보여 주는 첫 번째 일화라고 생각한다.

잠시 다른 작품 이야기를 하자면, 같은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인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는 사랑하는 여인 티타와 함께하고자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는 페드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집안에는, 막내딸은 엄마가 죽을 때까지 결혼도 못하고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타는 엄마 마마 엘레나를 돌보면서, 자기 언니 로사우라가 페드로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결혼생활하는 것을 곁에서 바라봐야만 했다. 이 점 때문에 민음사TV에서는(이 영상이 영상) 페드로를 최악의 애인으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공감하지 않는데, 적어도 페드로는 지금 티타와 당장 결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로사우라와 결혼하면 적어도 사랑하는 티타 곁에 머물면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는 이유는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그렇게까지 최악의 애인으로 꼽힐 만한 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상도덕은 없지만 그래도 진짜 ‘사랑’ 때문에 선택한, 나쁜 수였다고 생각한다. 진짜 최악인 건 에스테반 트루에바 같은 경우다. 그는 자기가 사랑한 로사가 죽었다고, ‘일단 나를 사윗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집안이니까, 결혼할 만한 나이대의 딸이 있다면 나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정말로 정확하게 이런 마음으로!) 로사네 집에 가서 클라라를 만난 것이고,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후 곧바로 청혼을 한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사랑하는 여자가 죽어서 슬프고 적적했으면 다른 데 가서 새로운 여자를 찾아보든가, 그 여자의 동생에게 구혼을 하는 건 무슨 경우냐? 이건 사랑도 없으니까, 나는 이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페드로보다 더 얼탱이 없고 용서가 안 되는 경우라고 나는 본다.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성욕이 주체가 안 되는 놈이라, 현실과는 좀 떨어져 꿈에서 사는 것 같은 클라라에 비하면 짐승이나 다름없다.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에도 트레스 마리아스라는 시골 동네에서 소작농을 부리는 주인 나리 노릇을 하면서 여러 여자를 덮쳤는데, 그 피해자 중 한 명이 판차 가르시아다. 판차가 에스테반 트루에바에게 강제로 당해서 낳은 아들이 에스테반 가르시아(아버지의 이름을 땄다)인데, 얘가 나중에 에스테반 트루에바의 손녀딸 알바의 인생을 망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 에필로그 바로 전 장이 사생아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알바를 고문하는 내용이다. 알바 살려… 스포일러를 하지는 않겠지만 알바가 딱히 잘못을 한 것은 아니고, 당시 공산주의를 지지하며 독재자에 반대했다는 게 이유다. 참고로 이 소설의 배경은, 어느 나라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칠레의 모습을 많이 닮은, 라틴 아메리카의 한 나라로 되어 있다.

어쨌거나, 에스테반 트루에바는 자기 아랫도리를 잘못 놀려서 한 여자를 능욕했고, 주인 나리의 아들이라고 정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이 사생아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손녀딸인 알바의 삶을 처참하게 만든다. 알바는 이것이 카르마가 돌아오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결국에는 복수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만약 자신이 그에게 복수한다면 그 카르마가 또 어떻게 돌고돌아서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정말이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체로 성녀 같다. 비꼬는 거 아니고 진짜로. 니베아는 여성주의 운동을 했으며, 클라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게 정의가 아니라 자비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빈민가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블랑카와 알바는 다운 증후군 아이들에게 진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법을 가르쳐 주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본다. 반면에 이 집안 남자들은 이 성녀 기질을 공유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클라라의 쌍둥이 아들 중 의사가 된 하이메 정도가 빈민을 도우려고 노력할 뿐이다.

클라라의 딸이자 알바의 엄마인 블랑카도 에스테반 트루에바 때문에 삶이 고달파진 쪽이다. 블랑카는 어릴 때부터 친구인 페드로 테르세로 가르시아라는 남자와 서로 사랑하는데, 이 남자는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계급 혁명을 암시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그래서 ‘주인 나리’인 에스테반 트루에바 눈 밖에 났고, 블랑카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스포일러는 더 이상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에스테반 트루에바 때문에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남자와 억지로 결혼해 힘들게 살다가 나중에야 조금 숨통이 트이게 된다. 그리고 에스테반 트루에바가 클라라를 때려서 이가 빠지게 만든 이후로 클라라가 블랑카를 데리고 집에서 나와 클라라는 죽을 때까지 그와는 말도 안 섞고 살았다. 에스테반 트루에바 이놈 한 명 때문에 힘든 삶을 산 사람들이 몇 명이냐고! 에스테반 트루에바 네놈만 없었으면!

이 소설은 이사벨 아옌데가 외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원했다. 아옌데는 당시 99세인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해 드리려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인 타타와 메메를 모델로 해서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이 소설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라고 한다면 역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그래도 여성 작가의 작품을 먼저 접하고 싶은 마음에 이걸 선택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야지… 이제 두 권짜리 책은 두렵지 않아요! 아, 이 작품은 1993년에 할리우드에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제레미 아이언스(에스테반 트루에바 역), 메릴 스트립(클라라 역), 안토니오 반데라스(페드로 역), 글렌 클로스(페룰라 역), 위노나 라이더(블랑카 역). 에스테반 트루에바 역이 제레미 아이언스라니, 얼굴 때문에 그의 악행이 조금 묻히지 않을까… 어쨌든 책을 읽었으니 영화도 볼 예정이다. 책은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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