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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by Jaime Chung 2025.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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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솔직히 엄청 기대했는데 다소 실망했다.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느낌. 일단 책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들, 즉 ‘괴물들’의 작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저자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한 에세이다. 내가 보기에 나의 실망은 이 책이 논픽션 중에서도 ‘에세이’라는 점에서 온다. 그러니까, ‘이러이러한 예술가들이 요러조러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끔찍하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고 고발하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예술가들이 요러조러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작품들을 사랑하는걸…’ 하고 말끝을 흐리는 듯한 개인적인 글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일단 아동 성폭행범 로만 폴란스키 감독부터 시작한다. 그는 열세 살짜리 소녀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약물을 먹이고 강간했다. 저자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작품을 보았다. 그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명작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 하지만 정말로 이런 범죄자의 작품을 소비해도 되나? 저자는 고민에 빠진다.

그의 범죄를 용서했기에 그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용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조건과 개인사를 이해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성인 남성과 십 대 소녀와의 섹스는 지금과는 달리 정상적인 일처럼 취급되면서 영화나 음악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피해자 게일리는 그를 용서한다고 말한 바 있고, 폴란스키 또한 어떤 면에서는 환경의 피해자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었고 아버지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아내와 태아는 맨슨 패밀리에게 살해되었다. 폴란스키의 인생에 드리운 비극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비극이 그에게, 한 개인에게 일어났다. 그래도 이런 맥락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용서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앞뒤로 꼼꼼히 따져 보니 참작이 되어 그의 범죄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고 결정 내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영화가 그저 훌륭했기 때문에 더 보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폴란스키는 천재이고 그것이 문제 해결의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찌릿한 통증에 가까운 불쾌한 느낌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찌릿한 통증 이상이었다. 내 양심이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폴란스키의 죄라는 망령이 이 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생각만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폴란스키의 영화가 형편없었다면 그는 관객에게 아무 고민거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블랙홀이 되어 버린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현대 인물들 중에서 명징한 괴물성과 명징한 천재성이라는 두 가지 힘을 평등하게 만들어 조화를 이룬 인물은 한 명도 없다. 폴란스키는 세기의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폴란스키는 열세 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했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사실이 존재한다. 이 모순 사이에서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저자는 자신이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이메일을 보내 가면서까지 이 문제, 그러니까 우리가 혐오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예술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여전히 감상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 리뷰를 읽는 독자분이라면 예측하실 수 있듯이, 그 문제에 대한 뚜렷한 답은 없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엿볼 수 있는 저자의 태도를 한 인용문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본인을 변명하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심장은 원하는 것을 원한다.” 오든은 언제나 그렇듯이 같은 말을 조금 더 점잖게 했다. “우리 심장의 갈망은 나선형의 코르크따개와 같으니.” 관객의 심장이 원하는 것 또한 나선형의 코르크따개 같다. 우리는 싫어해야 마땅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한다. 우리는 그 사랑을 스위치 끄듯이 꺼 버리지 못한다.

 

오해는 마시라. 저자는 끔찍한 범죄자들, 예를 들어 지독한 여성 혐오자이자 자신의 애인들을 학대했던 피카소나 헤로인 중독자이자 포주였던 마일스 데이비스 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모함이었다거나 중죄가 아니라고 음모론을 쏟아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저지른 잘못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을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음을 괴로워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약한 태도를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요! 나는 이 책이 그런 괴물들을 좀 더 정확하게 가리켜서 비난하고 꺼지라고 말하는 그런 책인 줄 알았다고요! 그러니 독자분들도 내 실망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강력한 감정을 가지는 부분이 딱 두 군데 있다. 첫 번째는 J. K. 롤링에 대한 장(章)이다.

2021년 J. K. 롤링은 영국에서 목소리가 점차 커지던 ‘생물학적 성’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롤링은 성별은 성기에 의해 결정되고 더 나아가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소녀와 여성의 삶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여성들을 ‘월경하는 사람’이라거나 ‘외음부를 가진 사람’이라 부르는 ‘포괄적’ 언어”3 사용에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녀는 주장했다. “나는 트랜스 여성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와 동시에 여자 성별로 태어난 소녀와 여성이 덜 안전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 여자 화장실과 여자 탈의실의 문을 자기가 여자라고 믿거나 느끼는 모든 남자에게 열어 주면—내가 앞서 말했듯이 젠더인정증명서는 이제 어떤 호르몬 치료나 외과적 수술을 거치지 않아도 발급받을 수 있다—그 공간에 들어가고 싶은 모든 남자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과 다름없다.” 인터넷상에 엄청난 분노가 일어났다. 포터 키즈들의 일부는 트랜스젠더였고 그들은 당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그 분노 밑에는 깊은 슬픔이 깔려 있었다. 사랑하는 무언가에 얼룩이 졌다는 슬픔이었다. 롤링의 이야기가 일어난 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이었지만, 그 장소에 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린 <해리 포터> 시리즈의 저자로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 저자가 ‘생물학적 여성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여성이 되려고 애쓰는 남성들을 여자로 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버튼이 눌린 듯. 아니, 거시기를 자른다고 남자가 여자가 되지는 않는걸. 그들이 진짜로 자기를 여자로 본다면 왜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우지 않고, 자신이 성적인 대상으로 보이기를(다시 말해, 많은 여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바라는 것인지? 롤링만큼 실제로 생물학적 여성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없는데 왜 롤링을 욕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로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면 여성이 처한 현실을 알고 공감하며 여성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건 관심도 없고 그냥 여자로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을 어떻게, 그리고 왜 (위 인용문에 나온 표현을 이용하자면) ‘포함’시켜 줘야 하는데요? 여성 인권 향상에 관심이 없으면 같은 여자라도(예를 들어 남미새들) 함께할 수 없거늘, 아무렴 자기도 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어련하겠어. 그러니 (저자나 ‘트랜스’ 권리 운운하는 남자들은) 이런 🐶소리를 할 거면 접어두시고,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나 읽으시길. <해리 포터>보다 그 책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내가 강력한 감정을 느낀 다른 한 군데는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장이다. 내가 진짜로 흥미를 가지고 읽은 부분. 9장 ‘나는 괴물일까?’는 여성 예술가를, 10장 ‘자녀를 유기한 엄마들’은 ‘어머니’인 여성 예술가를, 그리고 11장 ‘여자 라자러스’는 밸러리 솔라나스와 실비아 플라스를 다루었다. 10장에서 여성 예술가들에겐 어떻게 남성 예술가와 달리 ‘아이를 버리는 일’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여겨지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이건 너무나 명확하게 이중 잣대다. 남자들은 예술가든 아니든 아이를 버리는 일이 많은데? 꼭 애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직접 양육하지 않고 아이와의 감정적 유대도 희박한 경우를 다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 애인데도 여자에게 아이 돌보는 일을 미루잖아요? 그러니 여자는 왜 이미 많은 남자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한다고 해서 더 큰 욕을 먹어야 하지? 아래는 10장에서 특히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인용문이다. 내가 ‘엄마됨’에 관심이 없어서 더 공감한 것 같다.

여성에게 예술적 자유(자유 옆에 방점 하나를 찍고 싶다)는 대개 임신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아주 어렸을 때도 독자로서 이를 직감했다. 나는 고전 소설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고전 소설에서 주인공의 임신은 심심치 않게 맞닥뜨리는 줄거리였다.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와 『애덤 비드Adam Bede』 등이 그러했다. 주인공이 임신할 때마다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 독서 체험은 갑자기 지루해져서 시들해지기도 했다. 이제 주인공은 삶의 선택권을 잃을 것이다. 그녀의 세상은 집이라는 네 벽으로 축소될 것이다. 여기서 어떤 플롯이 나올 수 있는가? 나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덮어 버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책에 한번 사로잡히면 끝까지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런 줄거리를 만나면 연달아 하품을 하고 몸을 배배 꼬았다. 나를 끌고 가던 강력한 힘이 그저 죽어 버렸다. 임신한 여자에게 누가 관심이 있지? 일단 나는 아니다. 어렸을 때는 이렇게 보았다, 아니 느꼈다. 임신은 선택권의 사망을 정의한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확고했다. 도리스 레싱이 제니 디스키에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 임신을 하면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도중에 식는 것을 느낀다. 엄마로 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한다. 심지어 나는 임신 기간도 즐겼다. 하지만 독자로서 임신은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임신은 서사의 종말이다. 모든 문이 한꺼번에 닫힌다. 앞으로 네 인생의 선택권과 영영 작별할 작정이야? 임신한 등장인물에게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다. 엄마됨은 나에게 일어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는 아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11장에서는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예술가를 소개하는데, 이게 정말 흥미롭다. 그는 1967년 <소컴 선언문(SCUM Manifesto)>을 쓴 래디컬 페미니스트다.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an(남자를 말살하는 사회)’의 준말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이 지구상의 남성들을 멸종시켜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사회에서 삶은 기껏해야 지루하기 짝이 없고 이 사회의 어떤 측면도 여성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시민 의식이 있고 책임감 있고 스릴을 추구하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부를 전복하고 화폐 체제를 해체하고 완전한 자동화를 도입하고 남성이라는 성별을 말살하는 것뿐이다.” 헐! 이렇게 신선할 수가!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는 앤디 워홀에게 총을 겨누었다. 살해 시도를 한 것이다(그리고 그날 저녁에 자수했다). 그의 주장이 과격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고 또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해 볼 지점을 선사하기도 한다. 여성 예술가가 이토록 과격하고 폭력적인 면을 드러낸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가? 솔직히 처음인 것 같다. 여성이, 여성 예술가가 이럴 수도 있구나! 그래서 내가 앞에서 ‘신선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솔라나스의 선언문은 그녀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력감을 표현한 것일지 모른다. 그녀의 혁명은 너무 거대해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한 남자를 쏘았지만 그 과격해 보이는 행동조차도 취약함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었다. 선언문에서의 솔라나스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상대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단호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총격 시도에서는 확고한 의지가 부족했다. 허둥지둥했다. 『스컴 선언문』은 심오한 권한이 부여된 목소리로 작성된 심오한 취약성에 관한 문서다. 상처뿐인 세상에 사는 여성이 작성한, 동지를 부르는 처절한 호소문이다.

 

완벽한 책은 아니고, 내가 기대한 것과도 거리는 있었지만,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장들은 진짜 좋았다. 나머지 장들도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여성 작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공감하면서 어떻게 롤링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 있는지도 이해가 안 간다. 이래서 사람은 참 다양한 면이 있다고 하나 보다… 속 시원하게 ‘괴물들’을 비판하는 책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심지어 타깃 하나는 틀렸다고요… 내 돈으로 직접 사서 본 게 아니라 밀리의 서재로 봐서 다행이었다.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장은 좋지만 책 전체를 추천하겠느냐고 물으면 ‘글쎄요’라고 대답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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