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레이첼 요더, <나이트비치>
레이철 요더의 데뷔 소설 <나이트비치>는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만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 여성은 이름이 없다. 그냥 ‘여자’, ‘엄마’, (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후에는) ‘나이트비치’라고만 호명되는데, 사실 그게 핵심이다. ‘나이트비치’라 함은 ‘밤(night)’과 ‘암캐(bitch)’의 합성어로, 글자 그대로 밤이 되면 개로 변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잠깐, 이게 말이 되냐고요? 잠시 그런 의문은 내려놓으십시오. 늑대인간(이라고 하지만 거의 99% 남성의 형태로만 묘사되는 상상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잖아요. 그러니까 밤에 개로 변하는 여자도 있을 수 있죠. 문제가 될까요?
사실 이게 가장 큰 호불호 포인트일 것 같다. 애초에 ‘한 여자가 밤에 개로 변한다’라는 설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을 굳이 시도하지 마시라. 용이니 유니콘이니 뱀파이어니 하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해서 이야기를 지어냈는데, 그것들은 오래됐으니까 괜찮고 ‘나이트비치’는 안 된다? 이 ‘나이트비치’라는 단어와 개념을 사람들이 꾸준히 사용하면 한 백 년 후에는 엘프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판타지 요소’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이걸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많이 보이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생각한다면 받아들이기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다소 이상하고 껄끄러워 보이는 이 설정을 받아들이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이게 모성에 대한 풍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름이 없는 우리의 주인공 ‘여자’는 두 살배기 아들이 있는데 남편은 출장이 잦은 엔지니어라 독박 육아 중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잘나가는 예술가였던 여자. 어느 날, 여자는 온 몸에 털이 많이 자랐으며 송곳니도 날카롭고 뾰족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등뼈 아래쪽에는 혹이 나서 째 보니 털 뭉치가 들어 있었는데, “그 털 뭉치를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꼬리였다.”
여자가 ‘나이트비치’란 이름을 얻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당신 말이야……. 남편은 잠시 망설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어젯밤 한마디로 개(bitch) 같았어.
남편은 단지 관찰에 따른 의견일 뿐, 비열한 의도는 아니라는 듯 피식거렸다.
나이트비치. 여자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맞아, 난 나이트비치야.
그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달리 무슨 반응을 하겠는가? 여자는 한밤중에 치밀어올랐던 분노와 응어리, 매정함에 자신조차 깜짝 놀랐다. 그래서 전날 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내심 끔찍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이트비치는 늘 그 자리에, 심지어 그리 깊지 않은 내면에 있었다는 것을.
나이트비치가 그렇게 등장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자기희생적이고 가정적이며, 불평도 없고 투덜대지도 않는 전형적인 어머니상 그 자체였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찌뿌둥한 밤을 보낸 뒤에도 금세 생기를 되찾아 아기를 돌보고 토닥이고 곤히 재웠다. 반면 자상한 남편은 밤새 코를 골며 잠에 곯아떨어지거나, 사실 대부분은 아내 곁에 없었다.
그 “한밤중에 치밀어올랐던 분노와 응어리, 매정함”은 왜 생겼냐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자 혼자 독박 육아를 해서 그렇다. 소설에는 육아를 도맡아 하면서 남편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여자가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이나 동시에 워킹맘 친구를 만나 ‘나도 재능 있는 예술가였는데 지금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하는 자괴감을 느끼는 모습도 정말 생생하게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여자가 훌륭하다는 증거는 이렇다. 아들이 태어난 날부터 매일 밤 깨었다가 또 깨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신통방통한 능력. 아쉽게도 남편은 수면 부족을 잘 이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여자는 놀랍도록 잘 일어났다. 평생 늦잠과는 담쌓은 사람처럼, 한밤중에 매시간 깨다가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게 유전적으로 입력된 것처럼. 물론 이 삶에 지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절대 고단해하지 않았다. 몸을 혹사해서 한계에 다다르고 녹초가 되어 몹시 억울하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어도, 매일 아침 벌떡 일어나 하루 종일 똑바로 서 있었다. 그야말로 예전처럼 잠을 안 자도 되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능력의 소유자인 듯이 다 이겨 냈다.
난 안 피곤해! 여자는 죽도록 일하던 시절에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주로 혼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집에 있던 1년 동안에도 여전히 눈을 말똥말똥 뜨고 놀랍도록 똑같은 어조로 읊조렸다.
난 괜찮아! 여자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어쩐지 망설이는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정말 괜찮았다. 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가슴에 아기 포대기를 질끈 묶고 동네를 걸어 다녔다. 아기를 흔들며 함께 낮잠을 자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했다. 잠이 들기는 했지만 대부분 제대로 자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다 아들이 두 살이 되면서 덩달아 여자 안에 있는 무언가도 바뀌었다.
여자의 문제는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부정적 생각” 및 기타 등등. 그 생각들을 멈추려 애썼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애쓴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남편이 돈을 더 버는 게 여자 잘못이었나? 남편이 일을 관두는 것보다 여자가 일을 관두는 게 더 나은 일이었나?
남편이 항상 집을 비우며 일주일 내내 아내를 사실상의 싱글맘으로 만든 것도 과연 여자 잘못일까?
기차놀이가 정말정말 지루하다고 생각한 것도 여자 잘못이었을까? 아주 작은 정신적 자극이라도 얻고 싶어서 옛날 책 더미로, 오랫동안 벽장에 내버려 둔 반쯤 완성된 프로젝트로, 오후 내내 고독함과 고요함을 즐기는 시간으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도?
정신적 자극을 갈망했지만 여전히 독창적 사고나 의견을 꾀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도 그녀 잘못이었을까? 솔직히 여자는 더 이상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정치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영화든, 모두 다 지루했다. 가십과 리얼리티 TV를 탐닉할 뿐이었다.
여자가 리얼리티 TV에 빠져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도 그녀 잘못이었을까?
젊은 여성이 그저 일류 교육을 받으면 모성이라는 역사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단순히 경력을 쌓기만 하면 아이를 낳은 후에도 쉽게 직장에 복귀할 수 있으며 이전 세대가 했던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있다는 대중적인 사회적 통념에 빠져든 것도 여자 잘못이었을까? 물론 아이를 낳는다는 게 이론적으로 언젠가 복귀할 수 있는 직장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대신 그건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특히 정신적으로) 비틀거리게, 너무나 비틀거리게 하는 일에 대한 몰입, 상상할 수 없는 일의 무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업무량을 의미했다. 정신적으로 가장 건강한 사람조차 생물학에 맞선 비뚤어진 야망, 본능에 맞선 출세주의, 현대의 엄마가 스스로 행복해지려면 덜 동물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자, 지금 우리는 진화했고 문명화되어 있잖아. 대체 네 문제가 뭐야? 정신 차려. 정말 창피하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정체성, 거칠고 사나운 야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느 날 여자는 콜리와 바셋 하운드, 그리고 골든 레트리버, 이렇게 세 개를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이끌려 진정한 의미에서 ‘나이트비치’가 되는 경험을 한다.
여자가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바랐던 대로 그 개들이 찾아왔다. 개들은 여자가 무리에 합류하길 원했고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여자는 가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저항해도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점점 빨라졌다. 그들과 합류할 생각에 들떴지만, 그 느낌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주인과 상의하지 않은 몸이 먼저 앞으로 뛰어내려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깊은 밤 속에 널브러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더 컸다. 여자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늦여름 매미가 경쾌하게 윙윙대는 소리와 꽃가루 무성한 공기의 이슬 같은 무게에 굴복하고, 유혹당하고, 그 따뜻한 포옹에 끌려 들어갈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자가 보고 있는 장면은 도저히 현실일 수 없었고, 백일몽이어야 했으며, 스트레스와 피로로 생긴 일종의 각성시환각이어야 했다. 여자는 머리를 앞뒤로 심하게 흔들다가 꼬리까지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마치 수영장에서 막 나와 물방울을 털어내는 것처럼.
운동복 바지 속에서 여자의 꼬리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돌연 양쪽 귀를 하나씩 제어할 수 있게 된 여자는 각각의 귀를 앞뒤로 움직이며 개들의 숨소리, 낑낑대는 소리, 꿀꺽거리는 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여자는 감히 현관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현관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갈망과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로운 한밤의 소음, 너무나 다채로운 향기에 무작정 이끌렸다. 잃을 게 뭐 있어? 이건 그저 환상일 뿐이야. 여자는 아들에게 자주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냥 놀이야.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나이트비치’가 가진 야성은 사실 모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모성은 절대 아름답기만 하지 않고, 어머니는 거칠고 무서운 존재일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은 결말까지가 완벽하게 현대 사회, 특히 미국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 그리고 예술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한에서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표현하자면, 예술가들은 자신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것, 분노하는 것까지 전부 예술로 승화시킨다(또는 그래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라.
이 소설은 마리엘 헬러가 감독하고 에이미 아담스가 ‘나이트비치’ 역으로 주연해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Can You Ever Forgive Me?(날 용서해 줄래요?)>(2018)와 <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2019)를 만든 바로 그 감독이다. 내가 방금 언급한 이 영화들은 평이 꽤 좋았는데 영화 버전 <Nightbitch(나이트비치)>(2024)만 평점이 낮은데… 그 이유는 영화 리뷰에서 풀도록 하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책이 영화보다 훨씬 나으니까 영화를 보지 말고 원작 소설을 읽는 게 낫다.
사실 한 여자가 뜬금없이 개로 변한다는 설정보다, ‘어머니’가 된다는 게 얼마나 강렬한 날것의 경험인지, 그것을 ‘개가 된다’라는 비유로 표현했다는 점이 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어머니는 무조건 강인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라고만 생각하는 이라면 이 소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된다는 건, 그렇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경험이 아니다. 인간이 개가 되는 정도의 큰 변화인 것이다… 이만큼 날것의 작품도 오랜만인 것 같다. 도전해 보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유즈키 아사코, <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 (4) | 2025.06.09 |
---|---|
[책 감상/책 추천] 오 헨리, <오 헨리 단편선> (9) | 2025.06.06 |
[책 감상/책 추천]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4) | 2025.06.04 |
[책 감상/책 추천] 빌리 베이커, <마흔 살, 그 많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 | 2025.06.02 |
[월말 결산] 2025년 5월에 읽은 책들 (1) | 2025.05.30 |
[책 감상/책 추천] 김도영, <교도소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1) | 2025.05.26 |
[책 감상/책 추천] 원도, <파출소를 구원하라> (2) | 2025.05.21 |
[책 감상/책 추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2) | 2025.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