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오 헨리, <오 헨리 단편선>
설명이 필요 없는,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의 단편소설집. 초등학생쯤 되면 이미 다들 한 번쯤 읽게 되는 <마지막 잎새>를 비롯해 오 헨리의 작품이 무려 스물여덟 편이나 실려 있다. 보통 앤솔러지나 단편집을 소개할 때는 각각의 작품을 짧게 소개하는데 이건 양이 엄청 많으니 그건 불가능할 듯하고, 대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작품만 언급할까 한다.
<아르카디아의 두 나그네>는 <아르카디아의 단기 투숙객들>이라고도 번역되는 모양인데, 저자가 사랑하는 문학 작품 속 음식 및 음료를 소개하는 김지현 번역가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에서 언급된 바로 그 작품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터스 호텔에 머무는 두 투숙객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마담 보몽’이라고 불리는 한 여인이 패링턴 씨라는 신사와 이야기할 때 마시는 이 클라레 컵은, <생강빵과 진저브레드>에서 인용하자면, “영국식 펀치의 일종으로, 보르도산 와인을 비롯한 레드와인에 탄산수, 레몬, 설탕을 넣고 취향에 따라 셰리나 리큐어, 과일, 향신료를 첨가해서 차게 마시는 술이다. 스페인의 상그리아와 비슷하다.”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다시 상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이 커플 너무 귀여워… 완벽해…
이건 아마 다들 아실 텐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단연코 내 최애 중 하나다.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팔아 서로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는 이 젊은 부부는 내가 ‘사랑’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죠! 저는 아직도 이 단편을 읽을 때마다 웁니다… 진짜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해 주세요 😭
<붉은 추장의 몸값>과 <마녀의 빵>은 내가 어릴 적 기억이 나서 그립고 반가웠다. 일단 <붉은 추장의 몸값>은 아이를 납치해서 부모에게 몸값을 뜯어먹으려던 사기꾼 일당이 ‘육아 난이도 최상’인 아이에게 딱 걸려서 고생하는 이야기인데 어디에서 본 건지 모르겠다. 싼 값으로 살 수 있는, 딱딱하게 굳은 빵을 사 가는 청년과 오지랖 넓은 한 여인의 이야기인 <마녀의 빵>은 확실히 이원복 선생의 <사랑의 학교>(이거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려나?)에서 각색되어 나왔다는 게 기억나는데 말이다. <붉은 추장의 몸값>을 만화 형태로 본 것 같은데, 내 기억의 장난인가? 청소년용 문고본에서 소설 형태로 봤던 걸까? 🤔
어릴 적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영어 교과서에도 오 헨리의 <바쁜 주식 중개인의 로맨스>가 엄청 축약된 형태에다가 단순한 영어로 등장했더랬다. 한 주식 중개인이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자기 눈길을 끄는 속기사에게 청혼을 하는데, 알고 보니 둘은 이미 어제저녁에 이미 결혼식을 치렀다는 반전! 너무 바빠서 결혼한 것도 잊었는데 상대에 대한 설렘과 사랑만은 그대로였다는 거 아닌가. 귀엽네.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은 내가 좋아하는,풍자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약간의 풍자가 완벽하게 조합된 이야기이다. 리처드라는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이 유럽으로 떠나기 전 단 6-7분 동안만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말에, 그의 아버지는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고 큰 자신감을 보인다. 며칠 후, 리처드는 정말로 고백에 성공하고 약혼까지 하게 된다. 아버지가 도대체 뭘 했길래? 그 답은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에서 확인하시라! 핵심은, 아버지의 돈이 리처드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산 게 아니라, 사랑이 피어날 시간을 사준 것뿐이라는 점. 결국 사랑은 돈이 아닌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이니 사랑에 대한 이보다 더 순수하고 확실한 믿음이 있을까. 이 이야기는 곱씹어 봐도 너무 재밌고 귀엽고 감동적이다. 이런 이야기 더 줘!
<1000달러>도 돈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쪽은 조금 슬프다. 작고하신 숙부에게서 1천 달러와 함께 ‘이 돈을 어떻게 썼는지 변호사에게 보고하라’라는 유언을 듣게 된 주인공. 그는 고민하다 숙부의 피후견인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로리어 양에게 그 돈을 숙부의 유산이라며 줘 버린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로리어 양은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구질구질하게 ‘왜 나는 안 되냐’고 따지지 않고 쿨하게 떠난 그. 변호사에게 자신이 1천 달러를 어떻게 처분했는지 알리러 가는데… 하… 너란 남자 멋진 남자…
쓰고 보니까 나 사랑 이야기 좋아하네? ☺️ <붉은 추장의 몸값> 빼고 내가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모두 약간이나마 로맨스가 첨가된 것들이다. 사랑 이야기가 역시 최고야… 봐도 봐도 재밌어… 안 질려…
아, 내가 이전에 문예출판사판의 <오 헨리 단편선>에 소개된 <손질된 등불> 중 한 부분의 번역이 어색하다는 말을 2025년 4월 책 월말 결산에서 한 적이 있는데, 민음사판 <오 헨리 단편선>에도 이 작품이 실려 있어서 그 점을 유심히 봤다. 여기에는 문제의 “And he’s got dactylis on him.”을 “게다가 몸에는 오리새 잎이나 붙이고 다니고.”라고 번역했다. 엥? 이건 그냥 새로운 오역 같은데… 나처럼 이 부분의 의미가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한 인터넷 게시판에 질문했길래(여기), 그걸 봤더니 이 사람은 ‘dactylis’가 그 풀로 만든 향수 이름이라고 추측하더라. 콜게이트사에서 만든 이 향수가 1901년에 나왔다고 하고 이 작품은 1907년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으니 시간상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이거라고 단정지어서 말하기도 어렵다. 오 헨리는 왜 이 부분을 이렇게 애매하게 썼을까. 누가 좀 명쾌하게 이건 이런 뜻이라고 해석해 주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 부분만 빼면 번역은 딱히 흠잡을 데 없고 자연스럽다. 오 헨리의 반전 있고 귀엽고 따뜻하며 감동적인 단편소설을 읽고 싶다면 이 민음사판도 괜찮은 듯. 스물여덟 편이나 실려 있어서 읽을거리가 풍부하다는 점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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